골리앗을 잡아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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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리앗을 잡아내는 법/보이는 것 너머 보이지 않는 분을 볼 수 있는 믿음이 골리앗을 이기게 한다.
[서론]
러시아는 1-2주 내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나라들도 별다른 이견이 없었습니다.
객관적인 전투력에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3달이 지난 지금도 러시아와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과히 언더독의 반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가 간과하고 보지 못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그것이 분명히 우크라이나의 정신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것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이런 골리앗과 같은 존재들을 만나곤 합니다.
때로는 내가 도저히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은 큰 시련을 겪기도 합니다.
때로는 내가 도저히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은 높은 장애물을 만나기도 합니다.
때로는 내가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강력한 적수를 만나기도 합니다.
우리 삶의 골리앗은 무엇입니까?
객관적인 평가로는 도저히 상대가 안되는 약자가 강자를 이길 수 있는 요인은 무엇일까요?
우리 삶에서 골리앗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어떻게 그 위기를 넘어갈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 속에서 성경이 말하는 그 비법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본론]
먼저 오늘 말씀의 배경을 잠깐 설명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옆 나라 블레셋은 또다시 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엘라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두 진영이 마주보고 섰습니다.
저번에는 그냥 싸웠는데 이번에는 대표장수끼리 먼저 붙자고 요구했습니다.
삼국지 같은 데 보면 이런 장면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대표 장수가 이기면 그 싸움은 보나마나 한 싸움이 되는 것이죠.
블레셋의 대표 장수는 골리앗이었습니다.
골리앗은 거의 3미터의 키에 온 몸을 갑옷과 창, 칼로 무장한 최강의 베테랑 장수였습니다.
이런 장수 앞에서 이스라엘은 두려워 떨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골리앗과 싸워 이길 자신이 없었습니다.
함부로 싸우러 나갔다가 지면 전쟁 전체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안 골리앗은 40일이 넘도록 이스라엘을 모욕하고 조롱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앞에 나와보라는 것입니다.
군사들은 점점 주눅이 들었고, 이 전쟁은 싸우나마나한 게임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용기를 잃은 군사들은 전쟁에서 허수아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은 이런 효과를 노리고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모욕하고 조롱했습니다.
이 때 나타난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원래 다윗은 자기 아버지의 요청으로 전쟁터에 나간 형들에게 도시락을 주려고 왔습니다.
그러다가 골리앗의 이런 모욕적인 말을 듣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사울왕에게 골리앗과 싸우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사울왕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지만 다윗의 호기로움에 결국 허락했습니다.
이제 다윗과 블레셋 장군 골리앗이 마주보고 서게 되었습니다.
골리앗이 보니 자기 앞에 겨우 작은 소년이 한명 서 있었습니다.
40일 넘게 아무도 내보내지 않더니 이제서야 내보낸다는 사람이 작은 소년이었습니다.
골리앗은 그 자체로서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다윗이 들고 나온 막대기도 어이가 없었습니다.
자신과 싸우러 나오는데 칼이나 창이 아닌 막대기를 들고 나왔다는 것은 죽기를 작정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다윗에게 골리앗은 자신을 개로 보느냐며 더욱 분노했습니다.
다윗이 마치 자신을 개처럼 몽둥이로 때려잡으려고 막대기를 들고온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골리앗은 너무나 화가나 자신들 신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고대인들은 전쟁을 신들의 전쟁으로 여겼기 때문에 신의 이름으로 적들을 저주하곤 했습니다.
골리앗은 다윗을 죽여 그의 살점을 공중의 새와 들짐승의 밥으로 만들어주겠다고 겁을 주었습니다.
그럼 다윗은 왜 이런 막대기와 물매를 들고 나온 것일까요?
앞장에 보면 다윗이 전쟁터로 나가려할 때 사울왕은 다윗에게 자신의 단단한 갑옷과 좋은 무기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입고 몇 걸음 걸어보니 도저히 불편해서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한번도 입어본적이 없고, 자기 사이즈에 맞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갑옷과 무기를 포기하고 자신에게 익숙한 막대기와 물매를 들고 나갔습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이런스’라는 영화를 만든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한 말인데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그의 이 말을 인용해서 유명해졌습니다.
다윗에게 가장 개인적인 무기가 무엇이었을까요?
양치기 였던 다윗에게 가장 익숙한 무기는 막대기와 물매였습니다.
이것들이 이 전쟁에서는 가장 창의적인 무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골리앗 키가 거의 3미터인데 작은 다윗이 칼과 창으로 싸운들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다윗은 자신의 열악한 신체 조건때문에 같은 무기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익숙한 막대기와 물매를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평소 양을 치며 수없이 사용해본 막대기였고, 수없이 던져본 물매였던 것입니다.
또한 다윗의 막대기와 물매는 그냥 막대기와 물매가 아니었습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이 자신과 동행하신다는 증거였습니다.
다윗이 평상시에 양들을 칠 때 하나님은 다윗이 막대기와 물매로 양들을 사자나 곰으로부터 구원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이것들은 모두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였습니다.
이런 사실을 어찌 골리앗이 알았겠습니까?
골리앗의 한계는 그가 보이는 것만 보는 자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이는 것만 보는 사람들이 또 있습니다.
바로 사울왕과 이스라엘 군사들입니다.
그들은 골리앗의 엄청난 겉모습 앞에 두려워 떨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보이는 것때문에 두려움이라는 감옥에 스스로 갇혀 버렸습니다.
이처럼 자신에게 닥친 골리앗같은 한계와 장애물 앞에 많은 사람들이 절망합니다.
도저히 눈 앞에 보이는 것이 두려워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뇌는 굳어버렸고, 눈은 흐리멍텅해졌고, 손과 발은 얼어버립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보이는 것 너머의 것들을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윗은 눈 앞에 보이는 골리앗이 두렵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어느 누가 골리앗 앞에서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두려움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조그마한 개가 우연히 큰 개 옆을 지나가는 데 전혀 기죽지 않고 짖으며 달려들더라는 것입니다.
그 개가 자신의 주제를 몰라서였을까요?
아닙니다.
알고보니 그 작은 개는 자기 주인을 너무 신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뒤에 있는 주인의 크기를 자신의 크기로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의 말을 보십시오.
너는 창과 투창을 들고 내게 오지만, 나는 니가 모욕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온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골리앗이 다윗을 죽여 짐승의 밥으로 주겠다고 했는데 다윗은 오히려 내가 너를 죽여 짐승의 밥으로 주겠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용감하게 골리앗이 한 말을 똑같이 되받아 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다윗은 온 땅의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전쟁에서 지고 이기는 것은 칼이나 창같은 무기가 아니라 오직 주님께 달린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다윗이 가장 많이 반복하고 강조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 주님입니다.
자기가 잘 싸워서 이기는 게 아니라 주님이 이기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이겨도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하신 것이지 자신이 한 게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분명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다윗이 이기면 세상 사람들은 물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 이겼지?
사람들은 그 이유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보이는 것 그 너머의 것을 보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꿈꾸는 자들이며, 상상하는 자들입니다.
믿음을 어떤 말로 달리 표현할 수 있을까요?
저는 상상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중심의 막연한 교만한 상상력은 객기에 불과하지만, 거룩한 상상력은 믿음입니다.
사울과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이러한 상상력입니다.
골리앗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상상을 할 수 있는 힘이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무시무시한 골리앗 너머있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의 두려움은 믿음을 죽여버렸고, 이에 상상력도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믿음은 그에게 골리앗을 죽이는 상상할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다윗의 믿음은 눈 앞에 보이는 골리앗에게서 두려움을 내어쫓았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두려움을 내어쫓고 우리에게 상상할수 있는 힘을 줍니다.
그럼, 이런 다윗의 믿음은 어디서 생긴 것일까요?
다윗은 날마다 양을 치면서 사자와 곰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갑자기 하루 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 하루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우리의 믿음이 현실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필요할 때만 믿음을 꺼내려고 하니까 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우리가 부딪히는 수많은 골리앗 앞에서 믿음으로 나아가려면 우리의 작은 일상에서부터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보는 것 그 너머의 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운전면허증이 있다고 모두다 운전을 잘하는 게 아닙니다.
장롱면허를 가진 사람은 한번도 운전을 해본적이 없어 제대로 운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장롱 믿음이 되지 않도록 믿음을 평상시에 사용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내게 주어진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을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이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골리앗은 몸집이 크고, 전쟁장비 무게가 너무 무거워 빠르게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반면 다윗은 항상 몸에 가지고 다니던 익숙한 것들이었기에 가볍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향해 재빨리 물매로 돌을 던졌습니다.
그 물맷돌은 결국 골리앗의 이마에 박혀버렸고, 골리앗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한 말대로 그를 죽이고는 그의 칼로 그의 머리를 베었습니다.
이렇게 40일 넘게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골리앗이 한 순간에 무너졌습니다.
그것도 물맷돌 하나를 던진 한 소년에 의해 말입니다.
다윗은 전쟁문법을 완전히 탈피했습니다.
정치에도 정치문법이 있듯 세상에는 세상 문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것에 얶매이지 않는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창과 칼은 창과 칼로 싸워야 하는데 다윗은 자신에게 익숙한 물맷돌로 나아갔습니다.
평소 양들을 지키기 위해 짐승들의 이마에 수없이 던졌던 돌맹이가 이번에는 짐승같은 골리앗의 이마에 박힌 것입니다.
다윗의 믿음은 단순한 객기가 아니었습니다.
객기란 근거없는 용기, 즉 근자감을 말합니다.
객기는 하나님을 마치 미신처럼 사용하는 자들에게 적합한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평소에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도 않으면서 전쟁터에 하나님의 궤를 가져온 게 객기입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금식을 하며 하나님을 움직이려 한 게 바로 객기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평소에도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다윗의 믿음은 자신이 상상한 대로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과연 다윗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이 물맷돌을 던졌다면 골리앗이 죽었을까요?
골리앗이 이처럼 허망하게 당했을까요?
다윗의 비장의 무기는 물맷돌이 아닙니다.
다윗에게 가장 편한 무기였기 때문에 그냥 그것을 쓴 것일 뿐입니다.
골리앗을 쓰러뜨린 게 물맷돌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1차원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다윗에게 비장의 무기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은 전쟁의 승패는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다고 믿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싸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대신 싸우신다고 믿었습니다.
그 상상하는 힘이 그에게 용기를 준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상상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상상하는 힘은 무엇에 막혀있습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만나는 골리앗과 같은 장벽 앞에서 우리가 상상하기를 원하십니다.
한편, 다윗이 이처럼 최강의 군사 골리앗을 죽이자 블레셋 군사들은 겁에 질려버렸습니다.
겨우 연약한 소년 하나가 자기 군대의 최강 용사를 잡아냈으니 말입니다.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칩니다.
그러자 이제서야 이스라엘 군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블레셋 군사들을 쫓아가 그들을 죽였습니다.
자,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는게 아닙니다.
55절입니다.
카메라가 갑자기 사울왕을 비춥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하러 나가자 사울이 군대장관인 아브넬에게 이 소년이 누구인지 묻는데 아브넬은 대답을 못합니다.
그리고는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오자 아브넬이 그를 데리고 사울왕 앞으로 가서 다윗이 누구인지 알려줍니다.
이 부분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다윗을 모를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분명 앞에서 다윗은 악령이 든 사울을 위해 수금을 탔고, 그를 사랑해서 자기 앞에서 무기를 들게 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윗을 모를 수가 있을까요?
이것은 그만큼 사울이 영적 분별력이 사라졌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떠났고 악령이 시도때도 없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영적으로 너무 어두워져 다윗을 제대로 분간하질 못한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간다고 했을 때 그때에도 건성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다윗이 이길 것이라고 믿었다면 관심이 있었을 텐데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아무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냥 한번 나가보라고 한 것일 뿐입니다.
사울이 승리한 다윗을 만났으면 그가 어떻게 이기게 되었는지 물었어야 합니다.
다윗을 통해 자신의 부족한 점을 알고 깨달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전쟁을 통해 자신들의 불신앙을 지적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전쟁에 이겼다는 결과만 신경쓸 뿐 그 승리의 궁극적인 원인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골리앗처럼 보이는 것만 보는 자가 있는 반면, 보이는 것 너머의 것을 보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처럼 봐도 못보는 자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증거가 너무나 뚜렷한데도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영적으로 어두워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더 불쌍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울처럼 자기 생각과 욕심에 갇혀, 두려움에 갇혀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리석은 자, 불쌍한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 과연 우리는 세종류의 사람들중 어떤 사람에 속합니까?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도전하십니다.
[결론]
마지막으로 최근 아내 연주가서 들었던 시 하나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함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저는 이 담쟁이가 바로 우리들,즉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넘을 수 없는 벽을 어떤 담쟁이 잎 하나가 넘어갈 때 다함께 넘어가는 것.
교회가 믿음의 담쟁이가 되어 세상의 거대한 벽을 넘어가길 원합니다.
다윗같은 믿음의 담쟁이 삶을 살아가는 우리 다카포 식구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