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앞에서 알아야 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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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앞에서 알아야 할 것들” (출 10:1-2)
(부제: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
1.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바로에게 가거라. 그와 그 신하들이 고집을 부리게 한 것은 나다. 이것은 내가, 그들이 보는 앞에서 나의 온갖 이적을 보여 주려고 그렇게 한 것이다.
2. 그뿐만 아니라, 내가 이집트 사람들을 어떻게 벌하였는지를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 어떤 이적을 보여 주었는지를, 네가 너의 자손에게도 알리게 하려고, 또 내가 주님임을 너희에게 가르치려고 그렇게 한 것이다.“
[ 서론 ]
흔한 말로, “인생은 고통의 바다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중에 이 생애를 살면서 고통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 보입니다. 고통은 우리 삶의 마디마디 마다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꼭 마주치게 되는 이 고난 앞에서 꼭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 강론하려 합니다.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10가지 재앙 중에, 어느덧 여덟째 재앙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메뚜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메뚜기를 온 땅이 새까맣게 보일정도로 메뚜기를 이집트 땅에 불러오셔서 바로 전 재앙, 우박에 상하지 않은 남아 있는 모든 먹거리..를 제하셨습니다.
이집트 땅의 열매들을 모두, 먹어치워 사라지게 하셨습니다. 푸른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로는 모세의 선포 앞에 앞선 재앙에서도 계속 그래왔듯이 마음을 완고하게 먹고, 또한 고집을 부리며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을 놓아주지 않고 있습니다. 바로는 10장 7절 말씀처럼 “임금님께서는 아직도 이집트가 망한 것을 모르고 계십니까..?” 라고 항소하는 신하들처럼, 자신의 국가에 임한 재난에 대한 심각성보다, 여전히 자신의 고집과 계산을 앞세우고 있었습니다.
결국 재앙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고야 말았습니다. 애굽의 모든 먹거리가 사라져버렸습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10가지 재양에 대해서 주욱 읽어 나가다보면, 자주 자주 등장하는,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의문과 혼란을 주는 문장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1절 말씀처럼 “바로와 그 신하들이 고집을 부리게 한 것이 나다..”라는 말씀입니다.
개역개정의 표현처럼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라는 문장이 각 재앙의 마디마디 마다 나타남을 볼 수 있습니다. 무려 8번이나 등장합니다.
저는 이 구절이 늘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해 보았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고집스럽게 하셨는데, 바로가 무슨 죄가 있는가?”
우리가 가끔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의 의도를 쉽게 한눈에 의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찾아 보겠습니다.

[ 본론 ]

첫 번째로, 오늘 1절 말씀을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성경책으로)

그대로이것은 내가, 그들이 보는 앞에서 나의 온갖 이적을 보여 주려고 그렇게 한 것이다.”
하나님이 왜 바로의 고집스러운 마음을 의도하셨는가? 바로 하나님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을 통해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스스로 증명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능력에서 나온 기적과 증거들을 보이시기 위해 바로의 고집스러운 마음을 의도하셨음을 알게 됩니다. 나는 전능자다.., 전능한 너의 주님이다. 여호와다. 라는 것을 말입니다.

또 다음으로 2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나의 말에 거역한 이집트 사람을 어떻게 벌하였는지.. 대해..” 훗날 네 자손에게까지, 나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이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록”은, 즉 역사는 인간의 실존을 반영합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자신과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이 역사를 연구하는 이유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과거를 연구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통찰을 얻는 것 입니다. 그 통찰로 오늘의 현실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어떤 인사이트를 얻기 위함입니다.
특별히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의 신적인 메시지를 담은 신학적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즉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신학적 역사를 통해 주어지는 메시지”로 자신을 이해하고 이 세상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는 우리의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은 역사를 조금 공부하다보면, 정말 깨닫는 것이 한 가지가 있는데,
지구 상에 일어나는 전반적인 모든 일들에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패션, 문화, 사회현상과 이슈, 전염병 등 그 모든 것이 자세히 관찰해보면, 그 모양과 형태만 바뀔 뿐 여전히 순환 사이클을 그리면서 반복된다라는 것입니다. 반복되는 역사적 패턴이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형태와 방식만 바뀔 뿐이지 그 본질은 변함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1장 9절에 그 말씀대로 “이미 있던 것이 훗날에 다시 있을 것이며, 이미 일어났던 일이 훗날에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이 세상에 새 것이란 없다.”라는 그 말씀이 바로 진리인 것입니다.
왜 인간의 인생을 ‘고통의 바다’라고 표현할까..바로 변할 수 없는 인간의 그 연약함, 부패함 속에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근본적인 딜레마, 무지와 무능 때문이 아닐까 묵상해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우리의 처지 가운데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이집트 사람들에게 행한 일들을 후세대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자신에 대해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무능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메시지를 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전능한 여호와다, 내가 너희와 함께 가겠다...”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진정한 소망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이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믿을 대상이 아니고, 그저 사랑받고 사랑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다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다른 무엇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먼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 사랑과 은혜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와 돌봄이 우리 삶에 이루어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그 사랑을 행하며 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인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읽고 배우고 묵상하는 삶으로 훈련되어야만 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무어라 하는가에 대해서 듣고 깨닫고, 묵상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얼마나 읽고 묵상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정말 그 메시지를 가슴에 담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십니까? 저는 단호히 말하건데, 우리가 이 땅에서 믿음의 삶을 영위함에 있어 성경의 메시지로 충분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로마서 10장 17절 말씀에서와 같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마지믹 세 번째로, 바로의 삶을 반면교사 삼아 순종의 삶을 살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의 미련함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 바로의 모습 속에 우리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단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그분의 자녀이다! 라고 막연히 들뜨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기 전 그 바로의 미련함과 부패, 고집스러움이 내 안에 있었다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그 다음 스텝을 밟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바로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가 받은 구원이 어떤 구원인 줄 아느냐? 바로 그 미련함과 무지, 고집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희를 선택했다”..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편으로는 “왜 하나님은 바로와 이집트 백성은 버리시는가..“ 이다. ”왜 굳이 그들을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여정 가운데, 마치 그분께서 변덕스럽게 가지고 노는 어떤 도구로 사용하고 계신 것일까..“
저는 성경을 읽다가 이러한 부분에 궁금증을 가지곤 합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누구는 선택하시고, 왜 누구는 그대로 불신의 상태에서 끌어오시지 않으시는가..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성품에 부합하는가?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한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많은 지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때로 ‘노방전도’를 해보면 문득 마음 가운데 이러한 생각들이 들곤 합니다. “왜 이 좋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일까...”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왜 전지전능한,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께서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방임하시는가..? 즉 신학적 용어로 유기하시는가? 즉 버려두시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신다라는 사실은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 주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통해, 그리고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 알 수 있는 분명한 한가지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주께로 돌이켜 회개함에 이르신다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 말씀에,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기를 바라십니다. 아멘.
그래서 우리는 영혼구원하는 수고를 멈출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대해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 의지 속에서 우리가 ‘선택’을 받았음을 알고 믿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바로 이것을 기록함으로써, 너희가 받은 선택이 어떠한 것인지 너와 네 자녀들에게 알려주어라. 바르게 가르치라..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참, 쉬운 길 만은 아닐 것입니다.
도처에 세상의 넓은 길이 우리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한 번 거짓말 하면, 유익이 될 일들이 내 앞에 있고, 한 번쯤은 탐닉하고 싶은 음란한 것들, 조금 더 편하게 먹고 살고 싶은 안일한 마음에 불로소득, 투자를 빙자한 투기행위들, 우리 삶에 얼마나 다양하고도 넓은 길들이 많습니까?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사는 것 같은데, 왜 내가 굳이 좁은 길을 힘겹게 가야할 필요가 있을까? 때로 외롭고, 지칠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레위기 11장 45절에서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라고 단호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백성을 광여 40년의 길로 이끄십니다. 그 애굽 노예생활의 더러운 때를 벗기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오직 나의 말에 순종함으로써 ‘살 것이다.’ “너희는 순종함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너희의 고집스러움이 꺾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고통이 필요하다. 그것은 나의 백성을 나의 백성답게 만드는 나의 방식이다.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정교회의 네 기둥 중 하나가 무엇입니까? 바로 “보여지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우리의 후세대에게 바로 “순종”의 본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아이들은 우리의 순종을 보고 배웁니다.
이 땅에서 참으로 신실한 종들, 하나님께 전심으로 순종한 자녀들은 고통을 회피 하지 않았습니다.
그 고난 앞에서 더욱 순종의 길로 걸어갈 수 있는 힘을 달라고 더 깊은 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이 땅에 위대한 신앙인 모두가 그러한 삶을 살다가 갔습니다. 어떤 이는 이 땅에서 그 순종의 복을 누렸지만 또한, 어떤 이는 그러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다 갔습니다.
히브리서의 말씀 그대로 그들은 “그들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살아간 믿음의 사람들이라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경 시대 속, 그리고 초기 기독교 시대의 성도들은 한결같이 수 많은 핍박과 죽음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가끔 그들의 삶을 조명하다, 질문해 보곤 합니다.
과연 그들에게 기도의 응답이란 무엇일까.. 말입니다. 그들의 고통 속에서 침묵하시는 하나님..그들은 그 하나님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었을까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존경하는 한 교수님은 이 신학이란 것이 ‘철학과 심리학으로 완전히 혼합이 되어서 변질되고야 말았다..’ 이러한 것들을 아주 날카로운 ‘메스’와 같은 칼로 도려내야만 하는데, 한가지 방법이 있다. 그것이 바로 “신앙고백”이다라는 말씀을 종종하셨습니다. 역사를 통해 증명된 ‘신앙고백’ 말입니다.
그 숱한 핍박 속에서도 신앙을 고수한 위대한 신앙인들이 고백처럼 남겨놓은 신앙의 글들, 그들이 남겨놓은 순수한 신앙고백 앞에 철학, 심리학, 세련된 인문학 따위는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제게 어떻게 하면 참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한결 같이, 신앙고백을 연구해라. 위대한 신앙인들의 일기를 읽어라. 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역사 속에서 증인된 진짜 신앙인들의 삶을 보고 배워라. 라고 말입니다.
정말 순수한 신앙을 살다 간 믿음의 위대한 선배들, 그들에게는 성경의 약속만으로 충분하였습니다. 아멘,
헛된 사색과 망상, 고집등을 내려놓고, 단순하게 성경이 그렇다면 그렇다는 것. 성경이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말씀하신바를 그저 순종하는 것, 그것이 곧 제자, 종, 자녀의 삶인 것입니다.
[ 결론 ]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오랜시간을 이스라엘의 노예로 살아왔습니다. 그 노예생활이 얼마나 힘겨웠겠습니까? 하나님의 구원하고자 하심은 바로 그 노예의 삶에서 해방인 것이다. 그 종된 삶에서의 자유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나중에 볼 수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광야 생활을 걷는 동안, 그들은 ‘그 노예된 옛 삶을 그리워 했다..’라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충격과 경각심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훈련되어 가는 광야 40여년 동안의 여정이 얼마나 체질에 맞지 않았으면..그 끈적끈적한 옛 더러운 향락의 삶을 그리워 한다는 것..을 통해 죄를 향한 우리의 집착과 고집이 얼마나 질긴지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이집트 바로와 다를 것 없는 동일한 죄성을 소유한 부패한 인간이 바로 우리들이란 사실을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즉 하나님은 바로와 이스라엘 백성 그 둘 모두에게 자신을 알리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나는 전능자, 여호와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고통과 재앙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바로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과 권능 속에 있다 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경의 메시지로 충분한 우리가 되어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주님께 맡겨지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때로 고난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들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 하나님, 우리 모두가 주님의 자녀로서, 그 하나님의 주권과 권능 속에 잠겨 사는 오늘 하루의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오늘 말씀 그대로 오직 성경을 통해, 우리 영혼의 상태를 직시하고. 또 바로와 이집트를 반면교사 삼아 바른 순종의 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없고, 더욱이 순종의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주여 부디 이 시간 기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은혜와 능력을 체험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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