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만 바라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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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의 의미 2. 우리가 바라 보아야 할 것 3. 평온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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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의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선거의 결과가 어떻게 되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평안과 위로를 갈망하는 제2가족 되기를 축복합니다.

반복되는 단어 “양"

오늘 본문을 읽다 보면,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어떤 동물이에요. 혹시 눈치채셨나요?
바로 ‘양’입니다. 양은 성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동물이면서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건조 지대에서 잘 자라는 풀을 먹는 초식성 짐승입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먹는 순간 소화를 시킬만큼, 소화력이 아주 아주 왕성합니다. 그리고 임신 5개월 만에 한 두 마리의 새끼를 낳아요. 1년에 두 차례 출산이 가능하다는 것이겠죠? 그리고 성질이 온순하고 무리를 지어지냅니다. 일반적인 양에 대한 설명입니다.
성경에서 양은 어떤 의미로 나타날까요? 성경 역사상 정말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성경에는 양에 대한 이야기가 정말 많이 등장하는데요, 일일히 설명하면 시간이 많이 가니까 따로 하지는 않고, 일단 양은 하나님 앞에 희생 제사를 드릴 때 사용되었어요. 레위기 말씀을 나눌 때 함께 보았던 것처럼 번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등의 모든 제사에 양은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제물이었어요.
그리고 예수님도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셨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이 양에 비유하곤 해요.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양의 역할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고, 하나님은 그것을 받고 인간의 죄를 용서해주셨잖아요? 그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을,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죄 없으신 분이 죽으셨다. 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어요.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본문에 등장하는 “양”은요. 조금 의미가 달라요. 조금 전에 성경에서 ‘양’은 모든 제사를 드릴 때 사용했던 제물이었고, 또 예수님을 양이라 말한다 말씀을 드렸는데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양’은 여기 2가지에 포함되지 않아요. 여기서 나오는 ‘양’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저와과 여러분을 이야기 합니다.
양에 대해 설명해둔 영어 주석을 보니, 양에 대한 이런 표현이 있더라구요. 양은 목자의 소리에 아주 재빠르게 반응을 한데요. 그리고 목자를 제외한 그 누구도 따라가지 않고, 모든 것을 목자에게 의존한다고 해요. 모든 것을 목자에게 의존하다 보니 양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먹을 음식들을 찾아 다니지 못한다는 것이죠. 스스로를 맹수로부터 보호할 수도 없구요. 그래서 목자에게 모든 것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정말 특이한 것은요. 목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외치거나 이끌면 그 자리에서 멈춰버린다는 것이에요. 따라가지도 않고, 먹지도 않아요.
양이요. 물을 마시고 초원을 뛰어 놀며 풀을 먹어도요. 모든 신경은 목자에게 가있어요. 언제 들릴지 모르는 목자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귀와 모든 신경이 그곳에 쏠려 있어요. 먹을 때도, 똥을 쌀 때도, 잠을 잘 때도, 늘 스탠바이 상태에요. 목자가 말하는 순간 움직이고 따라가기 위한 긴장 상태를 늘 유지하는 것이죠.
제가 지금은 살이 이렇게 찌고 똥뚱하지만, 저도 이렇게 마르고 몸이 좋았던 시절이 있었어요. 정점이었을 때가 20대 초반이었을 것 같은데요.
군대에서 공수교육을 받았는데요. 공수교육의 목적은 낙하산을 타고 빠르게 적진에 침투하는 것이에요. 바로 낙하산을 타면 위험하기에 1-2주차는 하체훈련을 계속해서 하는데요. 하체 훈련과 더불어 계속해서 하는 필수 훈련이 있어요.
인간이 가장 공포를 느낀다는 11m. 3층 높이 정도에 서서 뛰어내리는 훈련을 해요. 교관이 “스탠바이. 뛰어!” 하면 지체하지 않고 뛰어야 해요. 제가 고소공포증이 좀 있었기 때문에 뛰어! 라는 말에 바로 반응을 하지 못해서 크게 혼이 났었는데요. 낙하산을 매고 뛰기 직전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가, “뛰어!”라는 말이 끝나기 전에 몸이 반응해서 앞으로 펄쩍 뛰어 내리도록 무한 반복 훈련을 해요.
“스탠바이” “뛰어” 이 것이 언제 떨어질지 몰라요. 그러니까 긴장하고 귀를 항상 그 쪽으로 열어 두는거에요. 낙하산 무게가 15kg정도 했거든요? 그걸 매고 오래 서있으면 힘들어요. 하지만 언제 뛰라고 할지 모르니까 긴장하는거죠. 하늘에 올라가보면요. 바람의 방향이 수시로 바뀌거든요? 아래에서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바람이 불어도, 조금만 하늘 위로 올라가면 바람이 이리 불고 저리 불고, 회오리치고 하는 것이 심해요. 낙하산을 매었다고 아무 때나 뛰어내리면 진짜 죽어요. 어디까지 날라 갈지도 몰라요. 모두가 떨어져야 하는 체크 포인트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어요. 그래서 바람이 바뀌는 순간 바로 뛰어야 해요. 지체하는 순간 바람이 또 바뀌거든요.
낙하 훈련을 할 때 살아남도록 하기 위해, “뛰어!”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뛰어내리는 훈련을 하는 것이죠. 뛰어 했을 때 뛰지 않으면, 훈련이 길어질뿐만 아니라 내려와서 단체러 얼차레를 받아요. 왜? 그 한 사람 때문에 뒷사람들이 다 죽을 수도 있거든요.
그것처럼 이 양들은요. 자신들이 살기 위해 모든 신경과 귀를 목자를 향해 열어두는 것이에요. 목자가 불렀는데, 지체한다. 내가 이 풀을 먹는 것이 좋아서, 초원을 뛰는 것이 좋아서 반응을 조금 늦게 한다? 그러면 무리에서 떨어지는 것이에요. 늑대나 이리가 와서 잡아 먹겠죠. 그러니까 양들은 바로 반응을 하는 것이죠.
왜 예수님께서 모여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렇게 ‘양과 목자 그리고 도둑’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을까요?
저 옛날 예수님께서 양과 목자에 대해 이야기하셨던 것은요. 이 이야기를 듣는 대상이 바로 실제 양을 치는 목자들이었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목자는 아니지만 상상하면서 들었으면 좋겠어요. 이제부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이 때의 배경을 나눌 건데요. 가능하시면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리며 함께 생각해보면 좋겠어요.
우리는 지금 교회가 아니라, 푸른 풀밭 위에 있어요. 들판이에요. 마치 푸른 잔디가 자라고 있는 축구장 같은 풀밭 위에 있어요.
그리고 우리 앞에는 양들이 다니고 있어요. 그 양들은 풀을 먹고 뛰어 다니고 개울가에서 물을 마시기도 해요. 그리고 서로 부딪쳐서 뒹굴면서 장난을 치고 있어요.
이 양들을 데리고 그 들판에 머문지 두 달이 지났어요. 두 달 동안 양을 쳤고, 양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었어요. 늑대와 같은 맹수가 나타나면 양들을 지키기 위해 돌을 던지기도 하면서 싸웠어요.
낮에는 다 보이니까 호랑이와 늑대로부터 양들을 지킬 수 있는데, 밤에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양들이 풀을 먹는 동안, 크고 둥근 돌들을 모아서 쌓기 시작했어요. 돌들로 임시 울타리를 쳐두고, 해가 지기 시작할 때 양들을 그 돌 울타리 안으로 몰아 넣었어요. 울타리 안에 양들이 다 들어갔어요. 그리고 그 다음에 여러분은 돌담 위에 들짐승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가시나무를 얹어놓았어요.
그리고 여러분은 돌울타리 입구에 딱 앉아요. 입구까지 돌로 막아버리면, 혹시라도 돌담을 뛰어넘어 들짐승이 들어왔을 때, 양들이 도망가도록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입구는 늘 열어두는거죠. 양들은 이 울타리 안에서 평안함을 느끼고 잠을 자요. 그리고 우리는 입구에 앉아있거나 누워서 잠을 자요.
처음에는 재미있겠죠. 그런데 이것이 반복되면? 힘들겠죠? 이동하는 곳마다 돌을 주어 와야 하고, 그것을 쌓아둬야 하는 등 여러 수고로운 작업들을 반복해야 해요. 그리고 입구에 앉고 누워서 자는 것이 편하지는 않겠죠. 목자가 깊게 잠들어버리면, 들짐승이 와도 눈치 챌 수 없을테니까요.
양들은 목자가 지키는 그 입구를 지나야 나가서 풀을 먹고 물을 마실 수 있어요. 그리고 입구로 들어와야 잠이라는 쉼을 얻을 수 있어요. 목자들은 그 누구보다 이 간단한 진리를 알고 있었어요. 양들은 자신들이 지키는 문을 지나가야 살고, 문을 들어가야 쉰다는 이 간단한 진리를 알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들판에 모여 양들을 돌보고 있는 목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희가 돌울타리의 입구를 지켜 양들을 먹이고 보호하듯이, 나도 너희들과 같은 문이다.
그 문의 역할을 내가 지금 하고 있다.
너희가 나를 통해 들어가기만 하면, 너희가 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나를 통해 세상에 나오면 하나님이 준비하신 많은 은혜와 복을 누릴 수 있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우리 목동이라면, 이해가 쉽게 가겠죠? 아주 간단해요. 예수님을 만나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비하신 모든 것들을 다 내가 가질 수 있어요.
그런데 이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이있어요. 돌 울타리를 치고 목자가 문이 되어 입구를 지키고 있어도, 들짐승들이 계속 다가 오는거에요. 그 안에 양이 있으니까. 양 한 마리만 잡아가면 그 날은 배불리 먹을 수 있으니까요. 그것처럼 사탄이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요.
예수님이라는 그 울타리 안에서 머물고 있는 우리들을 물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거죠.
제가 예전에 인도에서 여행을 할 때, 함피라는 도시에 갔었어요.
완전 산 속에 있는 곳인데, 인도사람들이 대단한 것이 뭐냐면요. 돌산을 깎아서 마을을 만들었어요. 돌을 가져와서 신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 돌산에 있는 큰 돌들을 그대로 쪼개 들어가면서 신상을 만들었어요.
그 도시를 여행하다가 사진을 찍으려고, 손에 들고 있던 이 물통을 땅에 내려놨어요. 땅에 내려놓자마자, 원숭이가 달려오더니 그것을 갖고 도망갔어요. 그 원숭이도 더웠던거죠. 그런데 어디 한국에서 온 이상하게 생긴 사람이 물통을 들고 다니니 지켜보고 있었던거에요.
이것처럼 마귀는 늘 우리를 예의주시하고 쳐다보고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예수님의 음성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바로 가서 물어버려요. 아까 말했죠.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않는 양은 무리에서 떨어지고 죽게 된다고. 그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바로 끌려가는거에요.
예수님은 그런 마귀를 향해 도둑이라고 표현을 하셨어요. 예수님은 우리를 먹이고 살 찌우고 구원을 주시는 선한 목자라면, 이 도둑은 마귀고 우리를 죽이려하는 역할을 하죠. 그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여러분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는 역할을 하죠.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존재에요.
하나님을 위해 살 거야! 라고 마음먹은 우리들에게 미련을 갖도록 해요. 뒤에 있는 것에 미련을 가지면 들어가야 하는 문에 들어갈 수 없어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요. 절제하겠다는 의미에요. 세상의 것들에 미련을 조금 덜 두겠다는 것을 말해요.
세상에서 으스대며 자기가 왕인줄 아는 이 마귀가요. 여러분이 하나님과 가까워지려 한다? 하나님의 자녀로 변해간다? 그러면요. 자신이 무시당한다고 느끼는 것이죠.
왕은 자기인데,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을 자신이 줬다고 마귀는 생각하는데요. 자신이 준 것들을 우리가 버리고 절제하기 시작하니까, 자신에 대한 도전이라 생각하고 열 받는거죠.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든,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우리를 끌어내리는거죠. 어떻게든 우리가 절제하고 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미친 듯이 매달리는거에요.
예수님은요. 우리의 마음에 평온함을 주세요. 저 사람 때문에 힘들어요. 나 이런 피해의식이 있어요. 이런 마음은요.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니에요. 여러분을 뒤흔들기 위한 마귀의 고도의 전략이에요.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구원을 받아요.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어요. 그런데요. 도둑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어요. 우리도 도둑으로 살도록 만들어요.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어진 것들인데, 그것을 다 빼앗아가도록 만들어요.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모든 존경과 마음들을 다 받을 수 있도록 나를 아주 교만하게 만들어요. 하나님의 자리를 내가 차지하도록 만들죠.
도둑은 멋진 모습으로 다가오고, 번지르르한 말로 우리를 꼬드겨요.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는 척하고, 우리를 이해하는 것처럼 해요.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우리를 파멸의 길로 끌고 간다. 우리를 진짜 죽음의 길로 데려가요. 그들의 목표는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고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것 뿐이거든요.
그러나 선한 목자 예수님의 역할은 달라요. 세상의 주인인척 하는 마귀와는 다르게요. 멋지지 않은 모습으로 다가오셨어요. 가난하고 목수에 불과한 모습으로 오셨어요. 힘없는 자로 오셨어요. 번지르르한 말하지 않으셨어요. 우리의 기분을 일순간 좋게 만드는 그런 말들 하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후벼 파는 말씀들을 많이 하셨다. 회개해라! 하나님 앞에 나와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라! 예배드리는 곳에서 예배를 드려라!! 우리의 삶과 태도에 대해 막 지적하셨어요.
힘이 없으나 힘이 있으신 분이 예수님이셨어요. 예수님은 겉으로 위로하는 척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아픔을 진짜 이해하려고 하셨어요. 아픔을 알려고 하는 노력이 아니라 진짜 이해하셨다.
우리의 괴로움, 배고픔, 외로움을 함께 견뎌내셨어요. 우리의 삶과 아픔 모든 것들을 함께 이해하셨기에, 결정적일 때 우리는 그분의 보증을 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맡겨진 영혼들이 하나님을 만나도록, 하나님과 가까워지지 못하도록 하는 사람들은요. 예수님식 표현으로. 양 도둑들이에요.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지 않는다거나, 말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들을 임의로 해석해서 말하는 것을 조심해야 해요.
말씀은 우리를 위로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기도 해요. 깨달음을 통해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도록 만들어요. 그것이 말씀의 역할이고,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에요.
중동 지방에는요. 지금도 목자와 양들이 들판에서 야숙을 해요. 야숙지가 결정되면 양들이 무사히 밤을 지낼 수 있도록 울타리를 만들어요. 여전히 출입구에 문을 달지 않아요. 목자 자신이 누워 문이 되고 있어요.
그러다 입구로 온 도둑과 싸워 죽기도 하고, 들짐승들에 먹힐 수도 있어요. 그런 모든 것들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신들이 출입구가 되기를 스스로 자원해요.
자신들의 생명조차 아끼지 않고 양들을 보호하는 목자가 되는 것이죠. 그들이 양이 통과하는 문이 되기 때문에 양들은 평화를 누려요. 양들은 절대 평온함을 만들 수 없어요. 하지만 그 목자를 통해 양들은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이죠.
혹시 여러분의 마음이 평온하지 않나요? 사실 제 마음은 평온함보다 불안할 때가 더 많아요. 그래서 기도해요.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어요. 매달릴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나의 마음도 다스릴 수 없어요. 내 마음을 마음대로 바꿀 수 없어요. 아무리 음악을 듣고, 걷고 생각하고 잔다고 해도 나의 마음을 평온하게 유지시킬 수 없어요. 그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에요.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밖에 없어요.
혹 임직자 선거로 인해, 아니면 사회적 경제적 문제들로 인해, 나의 개인적인 그리고 건강의 문제로 인해 마음에 어려움이 있으신가요? 불쑥 불쑥 올라오는 불안한 마음으로 불편한 삶을 살고 계신가요?
이 시간 예수님께서, 그 분만이 주실 수 있는 평온함을 위해 기도하면 좋겠어요. 양의 문이 되어주시는 예수님께서 우리 앞에 영원히 서 계실 거에요. 그 앞에 서서 우리에게 든든한 등을 보여주시며 평온함을 반드시 전해 주실거에요.
예수님이라는 문을 통해 들어가 새로운 생명을 얻고, 지금보다 더 나은 내일, 미래의 꿈을 꾸는 제2가족들이 되길 기도해요. 우리 같이 하나님만 바라보아요.
외출 했다가 집에 도착해서 문을 열고 들어가면 ‘편안하다. 내 집이다.’라는 마음 가지신 적 있으실거라 봐요. 그것처럼 문 자체이신 그 분에게로 들어가기만 하면 돼요. 그럼 정말 엄청난 평온함이 보장될거에요.
예수님이라는 문은 닫혀 있지 않아요. 문을 열어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 문 안에 들어갈 용기만 내고 들어가면요.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평안과 복, 은혜 다 여러분의 것이에요. 이미 우리에겐 그 문이 열려있어요. 그 문으로 들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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