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를 잘 드리는 것보다(막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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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2년 6월 5일 주일
제목 : 예배를 잘 드리는 것보다
본문 : 마가복음 4장 1-9절 *신57
[도입]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 자리에 나아오셨습니까? 설렘입니까? 또는 습관입니까?
대부분의 친구들이 예배의 기쁨 때문에 나아오기보단 습관처럼 나아오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특히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나온 친구들이 대다수 일 것입니다.
제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저도 여러분들처럼 교회에 습관처럼 나오던 학생이었습니다. 사실 습관이라기보단 부모님 손에 이끌려 나오던, 그리고 교회에 오면 친구들이 있으니 “끝나고 축구해야지.”라는 생각에 가득차 나오던 학생이었습니다.
일단 교회 오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뭔지 아십니까? 9시에 예배가 있으면 8시50분까지 교회도착해서 주변 오락실로 피신을 갑니다. 그리고 찬양이 끝나는 9시15분 어간에 슬슬 교회로 기어 들어갑니다.
그렇게 2-30분만 ‘버티면' 예배가 끝이나고 그대로 친구들과 공을 차던가 또는 비오는 날에는 오락실 갈 생각을 주로 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나이대의 조광원이라는 사람에게 있어 예배는 그닥 설렘은 아니었습니다. 습관이었고 친구들과 노는 것이 좋아, 마치 “평일에 학교 가기는 싫지만 가면 친구들이 있으니까”와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저는 그랬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 가운데 나아 오셨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핵심은 “들으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핵심인 “들으라”를 통해 “예배”에 있어 스스로 정의해보길 소망합니다.
[들으라]
오늘의 말씀은 마태복음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누가복음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들었던 예수님의 비유 스토리임을 알 수 있는데, 1절과 2절을 보니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 /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 앞에 서 계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들으라”
듣는 것은 생각보다 꽤나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가 정보를 캐치하는 것도 들어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듣지 않는 자에게는 백번 말해봤자 의미가 없습니다.
사실 설교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죄에서 건져냈습니다.”라고 백번, 아니 천번을 외쳐도 여러분들이 핸드폰하며, 오늘 점심 뭐 먹지 고민하며 듣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그저 역사 중 하나의 사건에 불과하게 됩니다.
바라옵기로는, 오늘 우리 가운데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 청소년부 되길 소망합니다.
[씨 뿌리는 자]
예수님께서 사람들 앞에서 “들으라” 말씀하신 후 뒤이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여러분, 농부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땅을 경작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가 됩니다. 씨를 뿌리고 물을 주며 해충을 제거하며 농작물이 잘 자라도록 환경을 조성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농작물을 거두어들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농부라는 단어대신 어떤 말로 표현합니까? “씨 뿌리는 자”라 표현합니다. 그리고 비유 또한 거두는 것에 대한 언급은 없이 오로지 ‘씨 뿌리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어 비유하십니다.
“왜 거두는 것에 대한 언급은 안하셨을까? 열매의 중요성은 의미가 없는 것일까?”라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단지 ‘씨 뿌리는 자’로만 언급하셨지 ‘열매까지 맺어야 하는 자’로 비유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인 즉슨, 우리의 역할은 씨를 뿌리는, 즉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 열매를 맺게함에는 우리가 결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만이 우리가 뿌린 씨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우리의 역할은 씨를 뿌리는 자임을 말입니다. 복음을 전한다 해서 듣지 아니하고 변화가 없고 뜨뜨미지근한 반응이 올지라도 상심하지 마십시오. 아직 그들이 열매 맺을 때가 아니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다리라” 말씀하시는 신호 입니다.
[4가지 땅의 비유]
뒤이어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의 땅에 씨 뿌리는 것을 언급하십니다. 첫 번째로 등장하는 땅은 “길가”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시멘바닥 위에 씨가 뿌려진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씨들이 결코 뿌리를 내려 자리잡기란 도통 어려운 장소일 것입니다. 우리로 보자면 ‘믿지 않는 자’들이라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백번, 천번 복음을 전해도 심겨지지 않는 자들이 ‘길가에 뿌려진 씨’와 같지 않겠습니까?
두 번째로 등장하는 땅은 “흙이 얕은 돌밭”입니다. 흙이 있기에 뿌리를 내릴 수는 있으나, 뿌리 덕에 싹을 낼 수 있으나 흙이 얕기에 건강하지 않습니다. 금방 뜨거운 햇볕에 말라 죽게 됩니다. 우리로 보자면 ‘교회는 나오지만 마음이 딴 곳에 있는 자’ 아닙니까? 마치 학창시절의 제 모습과 같이, 예배의 자리는 나오지만 목적은 ‘친구와 노는 것’에 초점을 두었던 제 모습이 딱 “흙이 얕은 돌밭에 뿌려진 씨” 아닙니까?
세 번째로 등장하는 땅은 어떤 땅입니까? “가시떨기가 있는 땅”입니다. 가시떨기가 있음은 식물이 자랄 수 있는 여건이 된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흙이 충분히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가시떨기가 뭉성하게 있기에 햇빛을 볼 수 없습니다. 그곳에 뿌려진 씨는 서늘한 그늘 밑에서 힘없이 자라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는 곧 “교회를 윤리적으로 선행을 쌓으면, 도덕적으로 선을 행하면 착한 사람 또는 사회적 모범이 되는 곳”으로 받아들이는 자라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를 바라보기 보다는 선한 이미지를 바라보며 자기 스스로의 만족과 유익을 추구하는 자가 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도덕적, 윤리적인 문제를 떠나 신앙적 문제가 우리의 삶에 다가오게 됩니다. 이는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기도로 도움을 구하고 지혜를 구해야 하나 이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가시떨기의 어려움을 못견디어 끝내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때론 교회는 ‘이상한 곳’으로 치부하며 ‘선하지 못한 곳’이라며 여전히 윤리와 도덕에 초점을 맞추어 교회를 바라보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땅을 언급하십니까? “좋은 땅”입니다. 이 땅은 어떤 땅입니까? 씨가 떨어지고 무성하여 결실을 맺는데, 그 결실이 삼십 배나 육십 배, 또는 백 배가 된다 말씀하십니다. 좋은 땅은 그런 땅입니다. 풍성한 결실을 맺게 합니다. 그런데 이 좋은 땅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9절 우리 함께 읽어봅시다.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좋은 땅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땅이라 함은 흙에 영양분이 가득하고 수분이 넘치며 햇빛또한 적절하여 식물이 넉넉히 자랄 수 있는 땅이 좋은 땅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좋은 땅을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있는 자에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즉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된,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이야 말로 좋은 땅이라는 것이지요.
훌륭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여러번 들어도 사실 저는 감흥이 크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게는 오케스트라를 듣는 귀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말씀도 그렇습니다. 들을 귀가 없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도 그들은 복음을 알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분명 매주 이 시간 “예배 잘 드리고 와”라는 부모님의 말씀에 이 자리로 나아 왔지만, 정작 우리는 정말 들을 귀를 가지고 복음을 받아 들이고 있는가 점검해봅시다.
여러분들에게 있어 “예배를 잘 드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째깍째깍 시간 맞춰 예배당에 나아오고, 불평불만 없이 자리 잘 지키고 앉아 있다가, 시간 잘 채워서 오전을 마무리하는 것이, 예배를 잘 드리는 것입니까?
[적용]
사랑하는 청소년부 여러분. 오늘 제가 설교 제목을 정함에 있어 “예배를 잘 드리는 것보다”라고 정함은 단순히 형식적으로 예배를 잘 드리고 왔다는 마음가짐보단, 우리게 “들을 귀”가 있는가를 먼저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들을 귀가 있고, 듣는 마음이 있다면 굳이 예배를 잘 드리고자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요, 놀랍게도 예배의 자세가 자연스레 바뀌게 될 것이고 굳이 시간을 맞춰 나가려 꾸역꾸역 나가기 보단 기뻐서, 즐거워서 시간 맞춰 가려 할 것입니다.
바라옵기로는 예배를 잘 드리려 노력하지 마십시오. 형식적인 틀에서 벗어나시고 그저 바랄 것은 “오늘 우리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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