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하고 싶은 광야라는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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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피하고 싶은 광야라는 선물/광야는 하나님의 일꾼에게 피하고 싶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서론]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도종환 시인의 시가 있습니다.
아내가 최근에 이 곡을 노래했었죠.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이 시는 우리의 인생이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한 송이 꽃도 수많은 비, 바람을 견뎌내며 피어나는데 우리의 인생인들 그렇지 않겠습니까?
2017년 ‘대통령의 서재’에 선택받은 책 중에 ‘광야를 읽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젊었을 때 사람들은 인생을 ‘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꼭대기에 오르려고 기를 씁니다.
그런데 중년이 되면 인생이 ‘산’이 아니라 ‘광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합니다.
인생이 무엇을 성취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사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저도 너무나 공감했던 말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나 인생에서 크고 작은 광야들을 만나게 됩니다.
광야는 고난의 장소입니다.
광야는 외로운 기다림의 장소입니다.
나의 무능력함을 뼈저리게 느끼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광야를 싫어합니다.
그렇지만 광야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탄생합니다.
광야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법을 배우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랬고, 모세도 그랬고, 요셉도 그랬습니다.
그럼 우리는 앞으로 만날 광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본론]
오늘 우리가 만날 다윗은 믿음의 사람이었고, 전쟁에서 수많은 승리를 거둔 누구보다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앞 날에는 많은 시련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된다고 했을 때만해도 다윗은 기뻐했습니다.
골리앗을 돌맹이 하나로 잡아냈을 때만해도 세상을 다 가진 것같은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전쟁에 나갈 때마다 승리를 했고, 백성들도 자신을 모두 좋아했기 때문에 한껏 마음이 들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많은 것을 성취한 그때 그를 곧바로 왕으로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또다시 사울과 같은 왕을 만들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어려움없이 왕이 되었는데 결국 교만해져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하나님은 다윗을 고단한 광야학교로 보내셨습니다.
그가 겸손할 수 있게 그를 낮추신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왕의 위협에 광야로 광야로 도망다녀야만 했습니다.
그 기간이 무려 14년입니다.
다윗이 첫번째 광야로 도망친 곳이 바로 아둘람 굴입니다.
‘아둘람’ 이라는 단어는 ‘피난처’라는 의미입니다.
이곳이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이 곳에 오자 그를 따라 모여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다윗의 가족들입니다.
다윗의 가족들은 사울의 첫번째 타겟이 될 게 분명했기 때문에 이곳으로 옮겨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가족들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빚쟁이가 된 사람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 핍박을 받은 사람들이 다윗에게 모여들었습니다.
사울왕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올바른 판결을 내리고, 백성들을 잘 다스렸다면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나라의 통치를 잘못하면 제일 먼저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이런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힘도 없고, 백도 없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가장 크게 어려움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는 것은 그만큼 사울의 통치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다윗에게 모여들었다는 것입니다.
다윗도 도망다니는 처지에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오합지졸에다가 다윗에게 짐이 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도망다니는 처지에 사람들이 많으면 더욱 들키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런 군사들 가지고 다윗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인 시각에 불과합니다.
다윗은 이런 사람들을 통해 그들의 어려운 처지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도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하게 되자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공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궁에만 있었다면 어떻게 백성들의 삶을 제대로 볼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은 다윗를 광야로 보내 백성들의 삶을 보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앞으로 어떤 왕이 되어야 하는 지 보여주신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백성들의 삶을 보듬어 안을 수 있는 목자와 같은 왕이 되길 바라신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에게 광야는 섬기는 리더십을 배우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왕이 되시는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에게도 몰려온 자들이 힘없는 자들, 억눌린 자들, 소외된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연약한 인간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그들의 고통을 공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아둘람 굴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을 회복시켜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는 교회가 이런 아둘람 굴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낙오된 사람들, 핍박받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인생이 바뀌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분은 젊은 적부터 오랜세월 조직폭력배 행동대장 생활을 하시다가 자신이 대장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만 두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후 불법 오락실, 도박장 이런 것들을 하셨는데 그걸 다 망했습니다.
재정적으로 파산하니까 부인과도 이혼위기에 처했고, 매일 술만 마시니까 입에서는 피를 토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느니 죽을까 하고 한강도 가봤는데 그래도 유일한 형 한번만 만나고 죽자하고는 필리핀에 있는 형을 만나러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작은 한 교회에서 예수님을 극적으로 만나셨습니다.
과거 자신의 삶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때부터 그 분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새사람, 말 그대로 Born again하신 것입니다.
비록 온 몸에 문신은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마음의 더러움을 다 씻겨내고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교회도 열심히 다니게 되셨고, 예수님만 생각하면 눈물을 흘리는 분이 되셨습니다.
한동안 지하철에서 매번 자신의 간증을 적은 편지를 나눠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 증인이 누구냐면 바로 접니다.
필리핀의 작은 교회 목회자가 바로 접니다.
그 분이 그렇게 변화되는 것을 보며 제일 놀란 사람이 바로 접니다.
이렇듯 교회는 망가지고 깨진 사람들이 모여드는 아둘람 굴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를 통해 세상가운데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교회오신다면 여러분들 감당하실 수 있으신가요?
저는 우리 교회가 그들을 감당할 수 있는 실력있는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이처럼 광야는 다윗에게 왕이 갖추어야 할 자세를 가르쳐주는 훌륭한 학교였습니다.
다윗이 훌륭한 왕이 되기 위해서는 이 광야라는 학교를 잘 졸업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이 광야학교는 옵션이 아닌 필수였습니다.
3절에 보면 다윗이 모압왕에게 가족들을 맡기고 난 후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도 그 모압에 거주합니다.
모압은 이스라엘과 적대관계라서 사울왕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았습니다.
적의 적은 동지라고 다윗 역시 모압에서는 좀 더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5절에 보면 갓이라는 예언자가 나타나 다윗에게 모압산성에 머물러 있지 말고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말합니다.
모압산성에 있으면 다윗은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데 굳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이 있는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가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입장에서는 이해가 안됐을 것입니다.
모압에 있으면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데 굳이 불길 속으로 들어가라고 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훌륭한 점은 지금 당장 이해가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랐다는 것입니다.
뭔가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하고 그는 다시 유다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고난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사울의 모습을 보십시오.
사울은 나라를 어떻게 잘 다스릴 지, 백성들을 어떻게 돌볼지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그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다윗을 죽일 수 있을까 입니다.
무엇인가 반드시 지켜야할 게 있는 사람은 불안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는 유다땅에 다윗이 부하들과 함께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신하들을 탓하기 시작합니다.
사울은 자신의 신하들이 알면서도 도와주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자기 아들 요나단도 자신을 죽이려 했는데 신하들이 말해주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모든 신하들 심지어 자기 자식도 자신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다고 의심합니다.
사울은 음모론에 빠진 망상장애 환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났는데도 자기 욕심으로 왕위를 어떻게든 지키려다보니 모두 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고난을 겪고 있지만 왕으로서 준비되고 있는 것이고, 사울은 왕이지만 왕의 자리에서 내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다윗은 낮아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높이지고 있는 것이고, 사울은 높아진 것처럼 보이지만, 낮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높이시고, 교만한 자를 낮추시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런 망해가는 사울에게는 기회주의자들이 많이 생겨난다는 점입니다.
9절에 보면 도엑이라는 똥파리같은 자가 나타나 다윗에 대해 고자질합니다.
다윗이 아히멜렉 제사장과 나눈 대화를 사울에게 일러 바칩니다.
도엑은 에돔 사람으로서 목자들의 우두머리로 알려진 자입니다.
그는 에돔사람이라서 이스라엘에서 높은 자리까지 출세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윗과 아히멜렉의 대화를 사울에게 일러바쳐 출세 한번 해보려고 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울이 듣고자 하는 말을 전해줍니다.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와서 하나님의 뜻도 알려주고, 빵도 주고 칼도 줬다는 것입니다.
이것만 들으면 마치 다윗과 함께 아히멜렉이 반역을 주도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도엑이 사울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이야기를 왜곡시킨 아부성 발언입니다.
다윗이 반역을 꾸민적도 없지만 아히멜렉도 그런 다윗을 도와준 게 아닙니다.
그런데도 도엑은 사울의 신하들중 아무도 사울에게 도움을 주지 않자 자기가 도움을 줘서 사울의 눈에 띄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 입장에서는 이런 도엑의 모습은 누가 진실한 사람인지 알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에게 광야는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과 통찰력을 배우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삶도 그렇습니다.
광야를 거쳐봐야 누가 진짜 나를 생각하는 진실한 사람인지 발견하게 됩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고 말합니다.
내게 얻을 것이 있어 붙어있는 사람은 내가 광야를 지날 때 다 떨어져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친구는 어려울 때 더욱 빛나는 법입니다.
이제 도엑의 말을 듣고 사울은 다윗을 도와줬다는 아히멜렉과 그의 제사장들을 모두 불러모았습니다.
사울은 그들이 다윗과 공모해 자신을 죽이려 했다며 윽박질렀습니다.
이에 아히멜렉의 대답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들어보면 다윗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잘 드러납니다.
반면, 사울의 잘못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아히멜렉은 다윗이 사울의 사위이며, 경호대장일 정도로 믿을만하고 존귀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묻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사울왕에게 반역을 할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본 것이기 때문에 이때라도 사울은 멈췄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자기 편을 들지 않고 다윗 편을 드는 아히멜렉을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아히멜렉을 비롯한 제사장들 모두를 죽이려 합니다.
그래서 사울의 병사들에게 제사장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는데 병사들은 차마 제사장들을 죽일 수 없어 망설입니다.
제사장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께 큰 죄를 짓는 일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의 대리자여야할 사울왕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있습니다.
백성들만도 못한 왕이 된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군사들이 말을 듣지 않자 도엑을 시켜 제사장들 85명을 죽이고, 그 동네에 있는 남자, 여자, 어린이와 젖먹이, 모든 짐승들을 다 죽여버립니다.
도엑은 에돔사람이라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보니 그는 망설임없이 다 죽인 것입니다.
사울이 왕으로서 해야 할일은 블레셋과 싸워 이스라엘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왕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가 하는 일은 오히려 자기 백성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거룩하게 세운 제사장들이 살고 있던 동네를 완전히 초토화 시켜버렸습니다.
15장에 보면 사울이 아말렉과 전쟁을 할 때 모든 것들을 진멸하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그는 하나님께 제사드린다는 핑계로 몇몇 좋은 짐승들을 살려놨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화를 내며 제사보다 순종이 낫다며 사울왕을 크게 책망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진멸하라고 했을 때는 순종하지 않더니 이제와서 자기 백성을 진멸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것은 완전히 하나님을 떠난 사울왕의 추악해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는 사울이 하나님의 적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컬 하게도 이 비극으로 인해 다윗은 귀한 사람 한명을 얻게 됩니다.
제사장들이 다 죽었는데 단 한 사람, 아비아달이 살아남아 도망쳐 다윗에게 옵니다.
이 제사장이 앞으로 다윗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다윗은 광야시절 자신에게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 한명을 이 사건을 통해 얻은 것입니다.
한편, 제사장 아비아달이 찾아오자 다윗은 자신때문에 이런 비극이 일어난 것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다윗이 얼마나 겸손하고 정직한 사람인지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사울은 자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지만, 다윗은 자기가 책임을 짊어지려 합니다.
자신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자가 왕으로서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우리 나라에도 미국대통령이 왔을 때 우리나라 대통령에게 선물로 주었던 명패가 있었는데 그곳에 이렇게 적혀있다고 합니다.
The buck stops here.
결국 대통령이 모든 책임을 진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자신에게 모든 책임을 지울 수 있는 사람이 지도자입니다.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을 주목하신 것입니다.
파도를 많이 겪은 진주가 더 단단하고 빛깔이 아름답듯이 다윗은 고난의 광야를 통해 더욱 단단하고 빛이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고난을 피할 수 있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성장시키시기 위해 고난이 있는 광야학교로 보내십니다.
그렇다면 그 고난을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다루느냐가 중요합니다.
다윗은 고난의 광야를 통해 진정한 리더십과 통찰력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책임지는 지도자의 무게를 배울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왕으로 세우시려는 주님의 뜻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궁궐에서는 멀어졌지만 하나님과는 오히려 가까워졌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 법을 배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 한편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대추 한 알(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 없다
저 안에 태풍 몇개
저 안에 천둥 몇개
저 안에 벼락 몇개
저 안에 번개 몇개가 들어서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달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대추같은 우리 다카포 식구들이 되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