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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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16-18 성령의 두 가지 이름
-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이다. 성령강림절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 50일 되던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부활절, 성탄절에 비해 성령강림절은 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성령강림절은 교회적으로 중요하다. 바로 오순절 성령의 임하심으로 교회가 탄생되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오순절에 성령이 120명의 제자들에게 강력하게 임하신다. 그리고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설교할 때 무려 3000명이 회심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 42절에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교회는 성령 공동체이다. 성령이 오셔야 비로소 교회가 형성이 된다. 그리고 성령으로 태어난 교회는 가르침을 받는 말씀의 공동체이고, 교제의 공동체이고 기도의 공동체다. 예전에 돌아가신 하용조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온누리 교회를 시작한 후에 성령을 강조하셨는데,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하니까 사역은 자연스럽게 생기더라는 것이다. 많은 목사들이 교회를 시작할 때 무슨 사역을 할까 고민한다. 무슨 행사, 프로그램 이런 것에 신경을 쓴다. 그런데 순서가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사역이 먼저가 아니라 성령이 먼저다. 우리 교회에도 성령이 임하시길 간절히 원한다. 그러면 사역이 자연스럽게 생겨날 것이고 활성화될 것이다. 기도회가 생기고, 말씀을 배우려는 모임이 생길 것이고, 교제하는 모임이 생겨날 것이다.
- 또 성령의 임재는 우리 개인의 삶에도 중요하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삶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었지만, 항상 두려움이 많고 믿음이 없고 의심이 많은 자들이었다. 급기야 예수님이 잡히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우리가 잘 아는 베드로만 봐도 알 수 있다. 자신은 죽을지언정 절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다고 장담했던 그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게 된다. 그런 베드로가 얼마 되지 않아서 엄청난 믿음과 능력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 사도행전 4장에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을 심문하던 바로 그 공회에 잡혀가게 된다. 19-20절에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그들은 전혀 새로운 사람들이 되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 성령은 어떤 분인가?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성령을 이해하기 위해서 삼위일체라는 교리를 이해해야 한다. 성경을 보면 분명히 하나님은 유일한 분, 한 분이시라고 말한다. 그런데 같은 성경에서 하나님은 아버지로, 아들로, 성령으로 부를 때가 많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마태복음 28:19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하나님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각기 다른 위격인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신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삼위일체 교리이다. 우리의 머리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 교리다. 웨스트민스터 소교리 문답에 보면 삼위일체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하나님의 신격 안에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계시며, 이 세 분은 한 하나님이시며, 본질이 같고, 능력과 영광이 동등하시다.”
- 성령은 또한 인격적인 분이시다. 우리가 보통 성령하면 어떤 힘이나 에너지로 생각하기 쉽다. 성경에서 성령을 묘사할 때 비인격적인 것을 가지고 설명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불과 같고 바람과 같은 성령이라고 말하고, 생수와 같은 성령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이 어떤 물질인가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 않다. 성령은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성령은 탄식하시기도 하고 기뻐하시기도 한다. 또한 하나님의 깊은 것도 통달하시기도 하고 우리에게 진리로 가르치시기도 한다.
-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령도 바로 인격적인 분으로 묘사한다. 성령을 가리키는 두 가지 이름이 나오는데, 하나가 보혜사이고 또 하나는 진리의 영이다. 16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이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인데 그 배경을 알 필요가 있다. 요한복음 14장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무려 17장까지 이어지는 긴 말씀으로 보통 다락방 강화라고 부른다. 지금 제자들의 상태가 어떠한가? 굉장히 두렵고 근심에 싸여있는 상태다. 그들은 예수님과 3년을 함께 했다. 예수님이 그들의 보호자였고 인도자였다. 이제 예수님 없는 그들의 삶은 상상할 수 없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꾸만 자기들을 떠나신다는 말씀한다. 요한복음 14:1에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 그런 가운데 주님께서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로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한다. 원래 보혜사는 주님 자신인데 이제 주님이 가시면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는 말이다. 보혜사는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인데, 문자적으로 ‘도움을 베풀기 위해 곁으로 부름을 받은 자’란 의미다. 성경에서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위로하는 자, 중보자, 돕는 자, 상담자, 변호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쉽게 말하면 보호자라는 말이다.
- 우리의 인생에서 보호자가 있느냐 없느냐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사실 병원에 갈 때도 보호자 없이 혼자 가는 것이 두렵다. 저도 요즘 병원에 가서 뭔 검사를 받으려고 하면 혼자 가기가 무섭다. 하물며 우리 인생 가운데 보호자가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불쌍한 인생은 보호자가 없는 인생, 그래서 보호자의 사랑과 돌봄을 받지 못하는 인생이다. 시편 23:1에서 다윗이 고백하는 것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양에게 있어서 목자는 절대적인 보호자다. 양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어떤 수단도 없다. 또한 양은 방향감각도 없다. 그래서 양은 목자가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다. 양에게 목자가 필요하듯이, 우리도 보호자 되시는 성령이 필요하다. 18절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예수님이 그들을 홀로 내버려두지 않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주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성령이 오시지 않는 것은 영적인 고아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 우리는 보호자 되시는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가? 내가 정말 외롭고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어깨가 되시는 성령님이 계시는가? 요즘 현대인들이 힘든 이유가 무엇인가? 정말 외롭고 괴로울 때 진정한 위로를 만나지 못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항상 내면이 연약하고 상처를 잘 받고 상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아닌가? 오늘 저와 여러분이 진정한 위로자 되시는 성령님을 모시고 살 수 있기를 바란다.
- 그렇다면 성령에 대한 두 번째 이름은 바로 진리의 영이다. 17절을 같이 읽어보자.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왜 성령이 진리의 영이신가? 먼저는 길이고 진리 되신 예수님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4:6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성령은 바로 진리 되신 예수님에게로 우리를 인도하는 영이시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높이게 한다. 그래서 성령을 가리켜 예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참된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방법이 이것이다. 정말 예수님을 드러내고 예수님을 높이고 있는가? 아니면 사이비 교주를 높이고 있는가? 사이비 종교에서 아무리 신기한 능력이 나타나더라도 예수님을 높이지 않으면 그건 진짜가 아니다.
- 또한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시다. 요한복음 14:26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카슨 교수는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한다. “성령님의 사역은 질적으로 새로운 계시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제시한 계시를 완성하고 채우는 것이다.” 성령이 하시는 중요한 사역 중에 하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고 가르쳐 주시는 사역이다. 이것은 어려운 말로 성령의 조명이라고 한다. 우리가 말씀을 읽다가 우리가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갑자기 어떤 구절의 말씀이 크게 와 닿을 때가 있다. 이게 성령께서 조명해 주시는 은혜다.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성령을 의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찬송가 453장에 2절이 이렇다. “성령이 스승 되셔서 진리를 가르치시고 거룩한 뜻을 깨달아 예수를 알게 하소서. 내 평생의 소원 내 평생의 소원.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3절에서는 “성령의 감화 받아서 하나님 말씀 배우니 그 말씀 한 절 한 절이 내 맘에 교훈 되도다.” 오늘 말씀과 딱 맞는 찬송이 아닌가 생각한다.
-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이 무엇인가? 바로 성령의 내주하심이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실 것이라고 약속한다. 구약시대에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한시적으로 성령이 임하셨다. 왕이나 사사, 제사장, 선지자와 같이 하나님이 특별하게 구별한 사람들에게만 하나님의 영이 임했다. 그래서 그들과 영원히 함께 하신 것이 아니라 사역이 끝나면 하나님의 영도 떠나셨다. 그러나 신약을 사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는 은혜를 주신다. 구약 에스겔 36:26-27에 이렇게 예언한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마지막 때에 하나님은 성령을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하신다.
- 그러나 약속은 약속이다. 아직 현실이 된 것은 아니다. 약속이 현실이 되기 위해 우리는 실제적으로 성령을 구해야 한다. 누가복음 11:13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시다. 그분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바로 성령이다. 왜 그런가? 성령은 하나님 자신이다. 성령을 주신다는 말은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말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성령은 또한 인격이시다. 그분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찾아오지 않으신다. 요한계시록 3:20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 에베소서 5:18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우리 자신을 세상적인 것으로 채우지 않기를 원한다. 여기서 말하는 술은 알코올을 말하지만 더 넓게 보면 세상적인 욕망, 쾌락, 중독과 같은 것들이다. 어느 목사님 교회에 성도가 교회를 떠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저는 아직 세상이 너무 좋습니다. 너무 재미있습니다. 골프도 재미있고 술 마시고 노는 것도 너무 좋습니다. 아무래도 좀 더 즐기다 와야겠습니다.” 기가 막히지만 한편 솔직하기도 하다. 우리 성도님 중에도 혹시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교회는 별로 재미가 없고 세상은 너무 좋아 보인다. 세상이 너무 좋고 즐거우면 죄송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하기는 어렵다. 하나님의 사람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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