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없었다(New Ver.) / (요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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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2년 6월 12일 주일
제목 : 예수는 없었다(New Ver.)
본문 : 요한복음 2장 1-11절 *신144
[도입]
본문을 들어감에 있어 질문 하나를 해보고자 합니다. 이 질문을 들이시고 동의하시면, 아멘이라 화답하시고, 아니라면 응답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예수님이 여러분들과 늘 함께 하심을 믿으십니까?”
이 질문에, 또 이 자리에 “아멘”이라 화답하지 않을 자가 얼마나 있을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들이 앉아 계신 이 곳이 교회기 때문입니다. 만약 동일한 질문을, 대학교 신입생 OT에서 했다고 생각해봅시다. 총장님 환영사에 “친애하는 신입생 여러분. 이 학교는 과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기반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렇기에 이 곳에서 말씀 붙들고, 학업에 최선을 다해, 하나님과 늘 동행하는 삶 되길 소망합니다. 아멘이십니까?” 라고 물었다면, 과연 그 자리에서 당차게 “아멘”이라 대답할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예수를 알고는 있지만, 우리의 삶이 예수와 함께 하는 삶이 맞는가 의문이 들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조금만 힘들어져도 불평과 불만이 차고 넘칩니다. “주님 도대체 왜 저에게 이런 일들을 행하십니까?”
태어난 지 6주가 되어 고열로 인해 시력을 잃었고, 95년간 맹인으로써 삶을 살아온 자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육신을 가지고 95년을 살았다 생각해보십시오. 감사와 짜증, 무엇이 더 입을 통해 나오겠습니까? 장담컨데, 감사가 더 많이 나올 것이라 대답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평생을 시각장애로 살아온 ‘패니 크로스비’는 그녀가 여덟살이 되었을 때에 이러한 고백을 했다 합니다. “저는 비록 앞을 볼 수 없지만 얼마나 행복한 아이인지 모릅니다. 저는 많은 복을 받았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저는 제가 시각 장애인이기 때문에 울거나 한숨 쉬는 일은 할 수도 없거니와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녀의 고백은 상상을 초월한 고백이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도 고통 속에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힘든 와중에도 하나님을 찾으며 행복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백을 한 그녀의 나이를 다시 보십시오. 8살입니다. 저는 8살에 패니 크로스비와 같은 고백을 결코 못할 것만 같습니다.
저는 야맹증이 있는건지, 잘 알수는 없지만 밤이 되어 방에 불을 끄면 한 걸음을 떼는 것 조차 어려워 합니다. 그래서 항상 불을 끌때면 핸드폰을 손에 쥐고 방불을 끈 후 제 동선을 살핍니다. 두 눈이 멀쩡함에도 불구하고 어두워졌을 때 한 걸음 떼는 것도 이렇게 두렵고 어려운데, 그녀는 무려 95년을 시각장애인으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 그녀가 53세가 되었을 때, 이러한 찬양의 가사를 작사했습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주 안에 기쁨 누림으로 /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그녀의 삶을 감히 제가 한 단어로 표현해 본다면, “암흑” 또는 “절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빛 되시는 주”께서 패니 크로스비를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암흑과 절망 속에서 빛을 비추사 주를 보게 하셨습니다. 빛을 본 그녀의 고백은 “주를 만나 거듭났으니, 세상의 어려움 속에서 주 안에서의 기쁨을 누리겠습니다.” 였습니다.
그녀의 삶을 보면 불평과 불만이 많아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 도대체 저한테 왜 그러십니까?”라고 묻고 또 묻고 또 물어도 우리는 그녀를 향해 “너가 잘못한 거자나”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불평과 불만이 아닌, 모든 상황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았고, 만약 제가 앞서 여러분들에게 했던 질문을 그녀가 신입생 OT의 자리에서 들었다 하여도, 그녀의 대답은 당연 “아멘”일 것입니다.
[본문의 전반적인 스토리]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중 처음으로 이적을 보이셨던 사건으로, 많은 이들에게 잘 알려진 너무나 유명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연회장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사건이지요. 갈릴리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고, 그곳에 많은 하객들이 모였습니다. 그 중 예수님도 초대를 받았던 모양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어머니도 초대를 받은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 이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지역 특성상 물 속에 석회가 많아 주로 포도주를 대신하여 목을 축이고 마실 것을 대체했는데, 아주 중요한 자리인 연회장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얼마나 위급한 상황이 펼쳐진 것입니까? 저도 결혼식을 준비하며 많은 인원이 올 것을 예상해 식사를 준비함에 충분히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참으로 많이 했습니다. 나름 철저한 준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분들이 꽤나 많았고, 이 점은 지금까지도 그 분들에게 미안함으로 남아있습니다.
동일하게, 연회장에 주인공인 신랑과 신부는 얼마나 애탈까요? 걱정이 태산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이상한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먼저, 연회장의 주인공인 신랑, 신부에게 초점이 잡혀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어머니의 행동이 매우 뜬금없어 보이며, 예수님의 대답마저도 계연성이 상당히 떨어져 보입니다.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입니다. 왜 포도주가 떨어짐을 예수님께 말해야 했을까요? 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 대답합니다. 아직 이적을, 기적을 행할 때가 이르지 않았다 대답합니다.
이후 일어난 이적들을 보게되면 실제로 예수님은 이적 후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자랑을 좋아해서가 아닙니다. 들어나기를 좋아해 우위에 있기를 원해서가 아닙니다. 그저 예수님이 이적 후 자신을 드러냄은, 자신을 통해 복음이 선포되기를 소망했을 뿐입니다. 목이 마른 자에게 물을 주시면서도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려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으며, 서른여덟 해 된 앉은뱅이를 일으키시면서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도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유명한 오병이어 사건에서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고 말씀하시며, 만인 앞에 자신을 드러내며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제자들은 메시야를 보았다]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예수님의 대답에 어머니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상식적으로 그런 말을 들었다면 모든 것을 멈추고 포기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연회장 안 하인들을 향해 “예수가 하라는 대로 그대로 따르라”고 전달합니다. 지금 이 본문에서 일어나는 모든 과정 과정, 하나 하나가 도통 매끄럽게 이어져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본문에서 펼쳐진 아리송한 상황보다 이 본문에 등장하는 세 가지 유형의 인물들을 보며 우리의 삶의 적용점을 발견해 나가고자 합니다.
먼저 연회장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새로 채워진 포도주를 맛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준비되었던 포도주보다 더 좋은 포도주를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디로부터 이 포도주가 왔는가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자들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하인들로 이들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지시에 움직였고 실천했습니다. 그래서 이 포도주가 누구로부터 행하여져 왔는가 압니다. 하지만 그걸로 끝입니다.
마지막은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적을 두 눈으로 보았고, 이렇게 기록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11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이 가나안 혼인 잔치 사건은 요한복음에서만 다루고 있으며, 특별히 이적 후 예수님을 드러내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요한복음에 기록이 되었어야 함은, 이 사건을 통해 제자들은 “메시야”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 내가 장차 오실 메시야이니라”고 말씀하셔서 “그래 메시야 이시겠지.”라 생각은 해왔겠지만, 막상 이적을 보거나 능력이 자기들 나름대로 입증이 되지 않아, 어쩌면 의심 가운데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가나안 혼인잔치 사건은 그러한 제자들을 향해 “믿게”하셨습니다.
[MZ세대]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세요. 백 번을 말해도, 천 번을 말해도 복음이 들어가기란 쉽지 않은 것이 지금의 세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앞으로의 세대 가운데 그 복음이 들어가기란 더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한동안 “라떼” 또 “꼰데”라는 단어가, 물론 지금도 핫하지만, 수면 위로 크게 드러났을 때가 있었습니다. “도대체 재네는 뭔데 저렇게 싸가지 없이 행동할까?” “나 때는 말이야, 위에서 하라고 하면 토달지 않고 그대로 행했어. 너희는 왜이리 불평이고 불만이 많아?”
흔히 MZ세대라 불리우는 자들과 라떼들 사이의 소통에 있어서 참으로 큰 벽이 떡하니 놓여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출산률이 줄어듭니다. 이에 따라 인구수도 줄어듭니다. 그럼 자연스럽게 기독교 인구의 수도 줄어듭니다. 그럼 세상은 몇 안되는 기독교인들을 향해, 사역자들과 교사들을 향해 말합니다. “다음세대가 너무 약해진거 아니야? 다음세대가 부흥 해야 한국 교회가 살지 않겠어?” 다음세대의 부흥이요? 인구수가 줄어져가는데, 다음세대의 수가 줄어져 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 아니겠습니까?
세상 속에서도, 그리고 교회 속에서도 MZ와 라떼는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맘에 들지 않으면 곧 잘 떠납니다. 회사를 다니다가도 조금만 입맛에 맞지 않더라도 퇴사합니다. 사회만 그럴까요? 교회도 그렇습니다. 매주 교회를 다니다 조금 강한 메세지가 나오면 “이건 아니지”라 판단하며 떠나기도 합니다. 사회도 교회도 지금은 입맛에 따라 골라 먹는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코시국 가운데 유튜브로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많다보니 어떻습니까? 예배를 통해 전국 각지로 여행을 다닐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마북에 있는 교회의 예배, 다음주는 부산에 있는 교회의 예배, 그 다음주는 하와이로 가기도 하구요.
그런 모습들을 보면, 지금 이 시대의 청년들이 원하는 것, 또 은연 중에 마음 가운데 기준이 된 것이 있는데, 바로 “합리주의적”이라는 것이지요.
이는 우리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어렸을 적부터 학교로부터 배워온 것이 그런거라 그렇습니다. 생각해보면, 학교에서 예수를 배워본 기억이 없는 것 같습니다. 분명 기성세대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만에 다시 사셨어.”라고 뜨겁게 믿고 또 기독교의 복음의 붐이 일어 충분히 배웠으나, 지금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야 야 애들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데.” 라고 말하면 “뭐래. 또라이 아니야? 야 그게 실질적으로 가능하겠냐? 그게 맞아? 정신차려 임마”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기독교의 진리가 아닙니다. 과학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이고 인문주의적입니다. 결코 기독교의 복음이 이들에게 들어갈 수 없는 환경입니다.
그런 상황 속 기성세대는 우리를 향해, 자녀인 우리를 향해 말합니다. “광원아.. 예수 잘 믿어야지. 예수 잘 믿어야 구원받고 행복하고 만사형통하지.” 글쎄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보다, 우리가 “엄마 교회 행사하는데, 내가 섬기고 올게!”라고 말하는 것보다, “엄마, 나 삼성 붙었어!” “아빠, 나 현대 들어갔어!”라고 말하는 것을 더 좋아하지 않을까요? 그게 현실아닙니까? “아이고 내새끼 고생 많았네. 거기서 너의 꿈을 펼치렴.”
그러다 “엄마.. 나 이제 못다니겠어. 나랑 안맞는거같아. 그냥 작은 회사 다시 지원해서 들어가볼까봐.” “아니 얘 정신머리 좀 봐. 남들은 다 들어가고싶어서 안달난 회산데, 얘가 왜그럴까? 조금만 더 버텨봐. 좀만 더 버티면 직급 좀 오르면 살만할꺼야. 다른데 가면 지금처럼 월급주는 곳 없어. 너 어떡하려고 그러니.”
이미 우리는 예수를 잘 믿는 것보다, 돈을 잘 벌어들이는 것이 중요한 그런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니 MZ세대는, 지금 이 시대를 청년으로 살아가는 우리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이 자리잡게 됩니까? “구원? 필요없지. 어차피 엄마 아빠도 내가 구원받았다 말하는 것보다, 돈을 더 벌어오는 것에 기뻐하는데.”
지금 세상이 그렇습니다. 기독교에서 진리라 말하는 것. 사랑이라 말하는 것을 세상은 “혐오”라 말합니다. 부정한 것이라 말하고, 잘못된 교리라 말합니다. 우리는 동성애를 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동성애를 이해하고 인정해줘야 하며, 죄라 말하는 기독교를 향해, “아니 너희는 왜이리 사랑이 없어? 예수는 사랑이라매? 근데 정작 너희는 왜 이들을 사랑하지 않고 죄인취급하는거야? 너네 참 배려도 없구나?”
과거나 지금이나 또 앞으로 절대 변하지 않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이 유일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계속해서 변해갑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앞으로 또 달라집니다. 매일이 달라진 세상을 우리는 마주하게 됩니다. 오늘 맞았던 사실이, 내일이 되면 아닌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진리를 지켜 나가는 우리를 향해 세상은 우리를 “쓰레기”취급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말씀이 내 삶의 기준이고 왕이 되기 보다는, 내 경험과 지식이 지팡이가 되고 기준이고 왕이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에서의 삶과 외부에서의 삶을 구분하여 살아가는 모습이 지금 우리의 모습아닙니까?
[기쁨을 잃은 개신교]
이 모습이 오늘 본문 속 하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예수가 행함을 보았고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가 없는, 믿음이 없는 그런 모습이 오늘 날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신의 저서, “짜라투스트라”에서 예화 하나를 소개합니다. 밤에 혼자 산 길을 내려오던 사람이 갑자기 낭떨어지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이 사람은 겨우 나뭇가지 하나를 붙들고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때 하늘에서 ‘기도하라 그리하면 구원될 것이다.’라는 음성을 듣고 밤새 기도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날이 밝았고 아침이 되었습니다. 이미 사지에는 힘이 없습니다. 땀은 땀대로 지나가는 이 하나 없이 버틸만큼 버텼습니다. “하.. 이제 나는 죽었구나..” 하고 발 아래를 보자 그 발밑은 낭떠러지가 아니라 평평한 평지였음을 보게 됩니다. 그가 만약 살기 위해서 발 한 번을 뻗어보았더라면 평지에 쉽게 발이 닿았을 것인데, 쓸데 없이 공허한 하늘에만 의존했던 자기 자신이 창피해 보였습니다. 자신이 충분히 타개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절대 해결사로 생각했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신은 죽었다.”
이 시대는 신은 죽었다 말하는 시대 아닙니까? 아니 신이 있음을 믿음에도 물구하고, 신이 필요 없는 시대, 예수가 없어도 크게 내게 달라질 것은 없는 시대가 지금 이 시대 아닙니까?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연회장 안 사람들처럼 예수께 관심 조차 없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하인들처럼 보았음에도, 믿었음에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입니까?
신학과 교수이자 미국 예일대학교 신학대학원 학장이었던 “리앤더 켁”은 “오늘 날 개신교가 왜 기쁨을 잃은 종교가 되어가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하나님의 능력보다는 세상의 문제들에 더 영향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고, 우리가 매우 세속화되어 우리 스스로 마치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대신에 우리 종교에 의해 만들어진 아주 지루한 하나님에 식상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자극적인 인물들이라 반복되는 것에는 쉽게 질려합니다. 재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더 새롭고 흥미가 있어야 하고 자극적이어야 합니다. 스릴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배는, 매주 반복되고 큰 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니 재미가 없습니다.
그럼 우리는 이를 어떻게 돌파할 것입니까? 물이 포도주로 변한 이 사건은 예수님의 단순 이적을 기록한 사건이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어요. 예수님께서 드디어 이적을 베푸셨어요.”로 끝날 본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자들을 주목해 봐야 합니다.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믿었는가”를 봐야 합니다. 여러분. 물이 포도주로 변한 이 사건은 마법이, 마술이 아닙니다. 주님이 잔칫날 제공한 것은 포도주가 아닙니다. 주님은 자기 자신을 제공한 것입니다. 즉 우리가 돌파할 길은 “본질의 회복”입니다.
같은 공간, 같은 사건 속에서 연회장 안 사람들은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고, 하인들은 보았으나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 처음으로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적용]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신은 죽었어. 예수를 믿으라고? 너 미쳤구나?”라고 말하는 이 시대 속에서 우리의 본질을 한 번 바라보십시오. 우리는 과연 내게 주어진 본질을 잘 지켜 나가고 있는가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한 번 점검 해봅시다. 나는 이 세상을 살며 무엇을 두려워 하고 있는가? 승급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 합니까? 성적이 잘 나오지 않을 것을 두려워 합니까?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 합니까? 그러나 우리가 정말 두려워 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쁨이 메말라 가는 것을 우리는 두려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점점 작아지고 소멸되어져 가는 것이 정말 큰 두려움 아닙니까?
고난과 고통 속 예수를 바라보는 것은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때로는 성공과 탄탄대로를 걸어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성공과 형통을 바라보기보다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예수를 기쁘게 하십시오.
그렇게 우리 청년 공동체 모두가 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여, 또 바라봄으로 본질을 회복하여 믿음으로 건강히 세워져 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제목]
본질의 회복 : 예수를, 예수만 바라보라
청년 공동체가 예수로 하나되고 예수로 세워져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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