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614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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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540[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본문 삼상 13:8-14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이 혼탁한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 교회 공동체가 되길 소망합니다. 세상이 찾는 그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세상이 기뻐하는 그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한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늘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시며,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도록 은혜 베풀어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블레셋 수비대를 공격했는데, 이에 블레셋이 발끈하여 온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처들어올 준비를 한다. 5절을 보면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이며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이 몰려들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전쟁에 익숙하지도 못했고, 탁월한 무기를 구비한 상황도 아니었는데다가 병력 역시도 비교가 안될 정도였으니 그들의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은 당연했다. 구약성경에서 전쟁에 앞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것은 전쟁의 승패를 하나님께 둔다는 믿음의 표현이었다. 사울은 임박한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사무엘에게 7일 안에 길갈로 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인도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약속한 7일이 거의 다 되었다. 지금 제사를 드리기 위해 길갈에 모여있다. 점점 더 몰려드는 블레셋의 병력에 이스라엘의 사기는 떨어지고 있고, 7일간 모여있는데도 제사가 드려지지 않자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한다. 기다리다가 사울은 직접 그 제사를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여러 선한 이유가 있었더라도, 이것은 분명 사울의 허물이요 사울의 죄였다. 왜인가? 사울에게는 희생 제사를 드릴 권한이 없었다는 것이다.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사울은 애초부터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던 사람이었음을 보게 된다. 그랬던 그가 왜 전쟁에 앞서 하나님께 드릴 희생제사를 준비했는가? 그것은 백성들의 신앙을 이용하여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입지를 굳게 세우려는 것이다. 만약 그에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그는 끝까지 사무엘 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왜냐하면 당시의 제사는 사사이자 제사장이던 사무엘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안중에 없는데, 하나님께서 정하신 직분의 질서 역시 안중에 없다. 그래서 사울은 직접 제사를 진행한다. 그에게는 제사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드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사울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었다. 그러나 백성들의 신임과 더불어 군사들의 사기를 생각하니 전쟁 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반드시 필요했다.
본문 말씀 10절을 보니 사울이 하나님께 번제 드리기를 마쳤을 때에, 즉 아직 약속 기일이였던 7일이 다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사무엘이 길갈에 도착하였다. 성경은 사무엘이 사울과 정한 시간보다 늦게 왔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울은 그를 기다리다 못해 직접 번제를 드렸고,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마자 사무엘이 도착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서, 아직 약속했던 7일이 완전히 저물지 않았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무엘이 늦게 도착한 이유에 대해 성경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기 때문에 사무엘이 약속한 시간이 끝나기 전에 도착하였고, 사무엘에게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늦게 도착한 사무엘에게 사울은 뭐라고 대답을 하는가? 11절 말씀을 보라. 군대가 흩어지려 하고, 전쟁을 시작하기에 앞서 종교적 행위가 반드시 있어야 했고, 사무엘 당신이 늦게까지 도착하지 않다 보니 자신의 판단에 근거하여 어쩔 수 없이, 부득이 하게 그리 할 수 밖에 없었노라고 대답하며,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울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례들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뜻과 의도들을 거스른 행위이자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이용하여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이용하려 했던 악한 모습이었다.
왕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다. 따라서 왕이 죄에 대한 댓가를 치루게 되는 내용도 사람으로서 책망과 버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왕으로서의 책망과 버림을 받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무엘이 아주 중요한 한마디를 던지고 간다. 14절을 보라.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여기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이 누구인가? 방금 읽은 14절은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을 찾으신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무엘은 사람들의 이목과 인기만을 살폈고, 또한 그 스스로의 판단기준에 의하여 제사를 진행하였던 사울을 하나님께서 버리시고, 이제 사람의 판단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 기준에 맞추어 이스라엘을 통치할 새로운 왕을 세우실 것을 선언하신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히 행하며, 왕으로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규례들을 순종함으로 따를 수 있는, 오직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를 왕으로 예비하신다.
여러분,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은 누구인가? 어떠한 모습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인가? 오늘 사울의 모습을 반면교사 삼아 3가지를 말씀드리려 한다.
첫째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이다. 사울의 제사를 직접 드리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백성들의 인기와 신뢰를 얻기 위해서였다. 여러분, 이것은 매우 심각한 죄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도 쉽게 범할 수 있는 죄이기도 하다. 마음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시선과 안목을 신경 써서 예배의 자리에 나와 있거나, 율법주의자처럼 율법조항에는 스스로 얽매여 있지만, 진정한 율법에 담긴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려는 것 등, 사실 이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 적용하려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자들을 일컬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자들이라 말한다. 매번 예배의 자리, 경건의 자리에는 나와서 자리를 지키지만은 실상 그 마음 가운데 진정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고, 그저 다른 사람들의 안목을 신경 쓰고 명예 얻기를 좋아하다보니, 경건의 모양은 있어도 능력이 없는 자들이라 한다.
그리고 어쩌면, 저를 비롯하여 교회의 중직자분들은 이러한 자리에 많이 노출될 것이다. 많이 맡은 자일수록 이런 유혹에 쉽게 노출이 될 것이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득을 취하려 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나의 뜻을 관철시키려 하는 것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팔아서 자신의 인지도와 백성의 사기를 얻고자 했던 사울, 예수 팔아서 자기 이득을 챙기려 했던 가룟유다가 바로 제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아니다. 말씀을 내 마음대로 해석하여 나에게는 관대하게 적용하고 남에게는 까탈스럽게 적용하여 비판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찾지 않으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사람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온전하게 순종하는 자들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끝까지 인내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사무엘은 늦지 않았다. 사무엘은 잘못한 것이 없다. 문제는 사울에게 있었다. 그는 조급했고, 인내하지 못했다. 약속을 신뢰하지 못했고, 사무엘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다. 이 모든 것들이 오늘 본문의 결과를 만들어낸 것 아닌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때로 성도들에게 인내를 요구하신다.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하나님의 일하심이 더딘 것처럼 보이고, 왜 당장 나의 간구를 들어주시지 않는지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어려움을 당하게 하실 때가 있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에 속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결코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면서 또한 신실하신 아버지이시기에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한다.
믿지 않는 자들은 인간의 연약함을 경험할 때 좌절하고 낙심하고 쉽게 포기한다. 그러나 성도는 그러한 순간에 오히려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당장 내 눈앞에 일어나지 않고, 나의 부르짖음에 아무런 응답이 없다 할지라도, 내 부르짖는 기도가 그냥 메아리쳐서 다시 돌아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할지라도 결코 낙심하지 마시길 바란다. 인자하시고 자비하신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상황들을 자세하게 알고 계시며, 또한 항상 지켜보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모든 상황과 형편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 하나님께서 나타나 도우실 그 때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끝까지 인내하며 하나님의 도우실 그 때를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다리는 사람임을 기억하라.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사울의 큰 죄는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정말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였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직분 고유의 사역을 침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 살아계심을 믿고 그분을 경외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항상 지켜보고 계심에 대해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와 동행하신다고 우리는 고백한다. 우리가 설령 고백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상에는 하나님 곧 신에 대해서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어진다. 하나님은 있다고 믿는 유신론자, 그리고 하나님은 없다고 믿는 무신론자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이들 중에서도 실천적인 무신론자들이 있다. 저들은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든 안계시든 아무런 상관없이 살아간다. ‘하나님이 계신 것과 지금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나는 내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살거야’ 라고 살아가는 자들이 바로 실천적 무신론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인지하고 있든, 때로 인지하지 못하든 언제나 성도들과 함께 하신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우리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내 삶 가운데 언제나 하나님 동행하고 계심을 깨닫고, 더욱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며, 성도로서의 거룩을 유지하고 지켜 가야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삶 가운데 이러한 것들을 실패한다면 우리는 무신론자보다 더욱 완악하고 무서운 실천적 무신론자들이 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으면서도, 내 삶은 하나님과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악한 자들이 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날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시고, 삶 가운데 구별되어가고 거룩해져가는, 더 나아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자를 찾으신다.
말씀을 맺는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찾으시는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 끝까지 인내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이 자리의 저와 여러분이 바로 그 사람이 되어, 혼탁한 시대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기쁨이 되며, 하나님이 찾으시는 바로 그 예배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