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615수요] 하나님 앞에서 뜻을 정하는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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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356[주 예수 이름 소리 높여]
기도
본문 단1:8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을 에워쌌다. 이 사건은 유다를 향한 제 1차 바벨론 침공인데, 주전 605년경에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이다. 유다는 이번 사건을 포함하여 총 세 번에 걸친 침공으로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나라가 패망하기 시작한 첫 신호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미 북이스라엘은 주전722년에 패망한 이후였고, 이제는 남유다 왕국도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그들이 왜 몰락하고 있나?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제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변 이방민족의 관습과 우상숭배를 멀리하며 거룩하게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들보다 더욱 타락하여 하나님 앞에서 온갖 악행을 서슴치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 대해 오래 참으시다가 결국 특단의 조치를 취하신다. 함께 읽진 않았지만, 단1:2 에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
누가 바벨론 왕에게 넘기셨다고 말씀하는가? 놀랍게도 유다 왕국의 주 여호와 이시다. 유대민족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방 나라의 왕에게 넘겨주셨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언약백성을 넘기시는 주체가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들이 멸망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주권아래에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유다가 정치적으로 완전히 망한 것 처럼 보여도, 실상은 하나님의 통치를 계속해서 받게 되는 것이다. 다니엘서 전체를 살펴보면 알겠지만, 실제로 다니엘과 세 친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방나라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계속 이어가신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넘기시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사용되는 바벨론 왕은 다만 유다를 위한 징계의 도구이다. 물론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힘과 권세로 유다를 침공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에 그가 잠시 사용되었을 뿐이다. 오히려 바벨론 왕 조차 다니엘의 꿈 해석을 듣고 유다 나라의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지 않던가. 유다가 완전히 망한 것이 아니라 잠시 징계를 받는다는 점은 70년의 황폐함 후에 포로 귀환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로 우리는 바벨론의 1차 침공 때부터 이 일이 느부갓네살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요, 유다가 약해졌기 때문도 아니며,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기억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을 향한 잔인한 박해 마저도 그분의 주권 아래에서 허용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고 우상과 탐욕에 찌들어 살다보면 본문의 유다처럼 무서운 징계에 놓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해야 한다. 물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그분께로 돌이키길 원하신다. 그래서 바벨론의 1차 침공으로 완전히 멸망하게 하지 않으시고, 세 차례에 걸쳐 침공하도록 하심으로 그들에게 수 차례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이러한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끝내 주전 586년 패망하고야 말았다.
3절을 보라. 느부갓네살 왕은 여호야김 제3년에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유다의 왕족과 귀족들을 포로로 잡아간다. 느부갓네살 왕은 환관장에게 말해서 이들 중에서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이 익숙하여 왕궁에 설 만한 소년”을 뽑아, 그들에게 바벨론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다. 이는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의 지배 계층을 바벨론 제국민으로 교화시켜서 남은 유다인들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확고하게 하려는 조치였다.
포로로 끌려온 왕족과 귀족들 중에서도 여러 면에서 탁월한 유다 청년들이 선발되었다. 그들은 3년간 왕실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동료 포로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그들은 바벨론 제국의 최고학문을 배울 수 있었거, 왕이 즐겨 먹던 진미와 포도주를 먹으며 포로민들 가운데 가장 큰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이제 3년의 왕실 교육이 마치면, 당시에 ‘신'처럼 여겨지던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앞에 서게 되는 영예의 자리가 허락될 것이다.
이 탁월한 유다 청년들 중에는 우리가 잘 아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가 있었다. 이 네 명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으로 볼 때, 다른 탁월한 청년들 중에서도 이 네 명이 가장 뛰어났던 것 같다. 환관장은 그들의 이름을 바벨론식으로 바꿔주었다. 왕족 포로민들 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이들을 이제는 아예 바벨론화 시켜버릴 작정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 일본이 한국 사람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강제로 바꾸게 하였던 사건, 바로 창씨개명이다. 당시 일본은 우리에게 사람의 이름은 물론이고, 심지어 평소 사용하던 말까지 일본어로 쓸 것을 강요하여 한국 사람을 아예 일본인으로 개조시키기 위해 별 짓을 다 하였다. 마찬가지로 본문의 바벨론이 유다 왕족과 귀족들을 바벨론 제국민으로 개조시키기 위해, 그들의 이름과 언어까지 바꾸며 서서히 유다 백성의 정체성을 말살하려 했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을 바꿔버린다.
다니엘의 이름은 “벨드사살”로 바꾸는데, 이 이름의 의미는 “오! 벨 신의 아내여! 왕을 보호하소서" 라는 의미이고, 하나냐는 “사드락" 으로 불리는데, 이는 “나는 달 신 아쿠의 명령을 두려워하는 자이다" 라는 의미이다. 미사엘은 “메삭"으로 불리는데, “누가 아쿠 신과 같은가" 라는 의미이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로 불리는데, “빛나는 자 느보의 종" 이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환관장은 그들의 이름을 바벨론화하여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자신의 이름을 생각할 때마다 바벨론 신들을 떠올리며 유다 백성의 여호와 하나님을 그들의 기억에서 지우려 했던 것이다.
이방 왕의 총애를 받던 탁월한 유다 청년들은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도 다니엘과 세 친구는 자신들을 바벨론화 시키려는 그 정책에 저항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사용했던 저항 방식은 어떠했는가? 무력으로 폭동을 일으키는 식이었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최대한 마찰 없이 신앙을 지키려는 결단을 내세우며, 나머지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는 방식이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다니엘의 신앙적 저항방식을 소개하고 있다.
그들의 신앙적 저항은 그들의 원래의 이름이 계속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은연중에 드러난다. 환관장은 그들의 이름을 바벨론식으로 고쳐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이 성경을 기록하면서 자신의 본래 이름을 끝까지 유지하였다. 또 그 세친구의 이름 역시도 바벨론 왕이나 제국민들이 부를 때를 제외하고는 원래 이름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 다니엘의 이름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이다. 하나냐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는 것이고, 미사엘은 “누가 하나님과 같은가!” 라는 의미이며, 아사랴는 “여호와는 도우시는 분" 이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다니엘은 자신들의 이름을 계속 표현하면서 바벨론 제국에서도 자신들을 지키시고 다스리시며 통치하시는 분은 저 보좌에 앉아있는 느부갓네살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고 있다.
마침내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신앙적인 결단을 구체적으로 내리게 된다. 8절을 보라.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이 구절의 핵심은 그가 먹지 않은 음식의 종류에 있지 않다. 당시 왕의 음식과 포도주는 주로 우상에 바쳐진 것이 사실이지만, 먹을 때마다 항상 우상에게 바쳐진 것이었다고 단정하긴 어렵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단지 우상의 제사에 사용된 음식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왕의 식탁에서 나오는 호화스러운 음식을 의도적으로 피함으로서, 바벨론의 음란하고도 타락한 문화 자체에 최대한 빠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동족들은 포로로 잡혀와서 고생하고 있는데, 자신들만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특권을 누린다는 것 자체가 벌써 하나님 앞에서 신앙을 더럽힌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서 뜻을 정했다.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겠다고 결단하며 하나님과 자기 동족들 앞에서 순전한 신앙을 지키려 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조심스럽게 환관장에게도 말하였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정한 뜻을 두고 환관장에게 말하기 이전에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했을 것이다. “하나님, 우리 민족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바벨론으로 끌려왔습니다. 지금 이곳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우리의 신앙적 뿌리를 말살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 곳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제가 뜻을 정하여 저의 몸과 저의 영을 더럽히지 않는 것 외에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부디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해 주십시요"
놀랍게도 단1:9 는 하나님께서 그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셔서 실제로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셨다. 물론 환관장은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 왕의 음식을 먹이지 않았다가 혹 그들의 얼굴이 동료들에 비해 초췌해진다면 자신은 왕의 명령을 어긴 죄로 사형에 처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니엘은 자신들을 감독하는 자에게 한 가지를 제안한다. 자신들에게 10일간 채식과 물만 먹게 해서 왕의 음식을 먹는 자들과 비교해 보라는 것이다. 그 결과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10일 후 그들의 얼굴은 왕의 진미를 먹는 자들보다 훨씬 더 보기 좋고 윤기가 넘쳐 흘렀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에게 나타난 결과이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기도와 신앙적 결단이 바로 이렇게 되어야 한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모르는 제국의 음란한 문화에 동화되지 않으려고 거룩한 뜻을 정하였다. 마찬가지로 악하고 음란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들도 주님을 모르는 이 땅의 문화에 동화되지 않기 위하여 신앙적으로 거룩한 뜻을 정하여야 한다. 지금도 세상은 온갖 비성경적 가치들로 여러분들을 공격하고 있다. 외모지상주의, 성적지상주의, 황금만능주의와 같은 말도 안되는 가치를 가지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을 공격한다.
“외모지상주의" 곧 “아름다운 외모"에 환장하는 자들의 추태를 보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형을 미용으로 둔갑시키는가. 방송에 출연하는 연예인들이 얼마나 돈을 쏟아 부으며 얼굴을 뜯어 고치고 있던가. 강남 한복판에 가면 얼굴들이 다 비슷비슷하다는 우스갯소리가 들려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들 생각하는 미의 기준이 비슷하다보니 인기 아이돌 여자 가수들의 외모도 다들 비슷해져간다. 이와 같이 개조된 얼굴들이 아름다움의 상징처럼 숭배되다보니, 청소년들도 멀쩡한 자기 얼굴을 그와 같이 뜯어고치려 한다. 심지어 수능 이후 부모가 딸아이에게 그간 고생했다며 성형수술권을 선물로 주기까지 한단다.
“성적지상주의", 곧 학업성적이 마치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떠드는 한심한 부모들의 추태를 보라. 자기 자녀들의 성적이 조금 뒤쳐지는 것을 노심초사하면서 한국말도 제대로 못할 때에 영어부터 가르친다. 수능에서 고득점을 받도록 고액 과외를 시키고, 대학에 진학한 자녀라 할지라도 졸업할 때까지 자녀의 모든 학업 일정과 수업시간표, 출석상황까지 치밀하게 관리해준다고 한다. 어떤 학생은 일류 대학에 진학했는데도 몸이 아프니 엄마가 대리출석을 해주었다고 한다. 얼마나 가관인가.
“황금만능주의", 곧 돈이 인생의 최고 목표라 부르짖는 자들을 보라. 그들에게 있어 돈은 인생의 목표요, 살아가는 이유이다. 돈을 끌어모으기 위해서는 친구도, 이웃도, 심지어 부모자식도 다 팔아넘긴다. 보험금을 노리고 존속살인을 저지르는 자들,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쉽게 몸을 파는 여학생들이 얼마나 많이 늘어나고 있는가. 한 설문조사에 돈 10억을 준다면 기꺼이 1년간 대신 감옥에 가겠다는 학생들이 늘어가고 있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런 세상 분위기 속에서 여러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로서, 우리는 어떠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가? 본문의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하나님 앞에서 뜻을 정하여” 거룩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여러분, 이는 결코 막연한 결단이 아니다. 자기희생과 헌신이 요구되는, 구체적이고도 뼈 아픈 결단이다. 왕의 기름진 음식을 포기한 다니엘처럼, 어쩌면 지금 나에게 있어 가장 달콤한 것, 가장 재미있는 것, 가장 좋은 것을 포기해야 할런지도 모른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나의 신앙에 해를 끼친다면 기꺼이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앞에 선 저는 여러분에게 그것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자신은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것이다. 나의 신앙을 끊임없이 넘어뜨리려 하는 “왕의 진미” 가 어떤 것인지를 말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미 천국 백성 된 자로서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두고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이 세상은 성도들을 그냥 곧이 곧대로 예수 믿게 내버려 두질 않는다. 매 순간 여러분을 세상의 법에 굴복시키려고 아주 혈안이 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상을 살아가고 싶은데 그렇지 못해서 괴로워하던 나 자신은 언제였던가. 매주 선포되는 말씀을 붙들고 한 주를 살아가고 싶은데 세상 친구들과 주변 상황이 나의 신앙을 넘어뜨리려는 것을 느끼며 살아가는가. 물론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완벽한 수준의 신앙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죄의 지배를 받는 이 세상을 살면서도 이를 거부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기 원하는 우리의 가난한 심령을 원하신다. 여러분, 떠올려 보라. 말씀대로 살길 원하면서도 그것이 뜻처럼 되지 않아서 아무도 모르게 하나님 앞에서 눈물 흘려본 때가 언제였던가.
하나님, 주님을 알지 못하는 이 세상에서 제가 어떻게 해야 성도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제가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데도 사탄은 끊임없이 세상의 법으로 나를 짓누릅니다. 주일을 제대로 지키고 싶은데 직장이나 환경이 허락하질 않습니다. 말씀대로 살려니 세상의 문턱이 너무나도 높습니다. 주님, 이런 상황에서 저는 어찌하면 좋습니까. 말씀대로 살아갈 능력을 주옵소서. 타락한 이 세상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로서 구별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저에게도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한 상황에서도 다니엘과 세 친구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뜻을 정하였다. 이처럼 제국의 통치를 거부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원하는 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단1:17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그들은 바벨론 제국에 살면서도 제국의 통치를 거부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기 원했다. 다른 모든 유다 청년들이 제국의 지배에 굴복했지만, 그들만은 하나님의 통치에 변함없이 순종하였다. 이런 그들의 중심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놀라운 은혜를 베푸셨다. 그들에게 탁월한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독파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으며, 특별히 다니엘에게는 모든 환상과 꿈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까지 더하셨다.
죄많은 우리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갖게 된 능력과 정치적 역량에만 솔깃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내 자녀가 다니엘과 같이 쓰임받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라. 8절에서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서 뜻을 정하여 신앙의 순결을 지키려 결단 한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17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학문적 능력을 주신 것은 나중 일이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이 순서를 뒤바꾸려 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능력을 먼저 주시고 하나님 앞에서 뜻을 정하는 신앙은 나중에 주셔도 된다고 생각한다. 학업중에 있는 자녀에게 지혜를 주시기를 간구하며 좋은 성적 받길 기도하지만, 그 자녀의 주일성수, 그 자녀의 신앙생활, 그 자녀의 믿음과 예배는 나중에 대학가서, 나중에 결혼해서, 나중에 나중에 나중에… 라고 가르친다. 나중이 어디 있는가. 그 자녀에게 영원한 나중이 있을 것 같은가. 지금이 없다면 나중도 없다.
우리가 이미 경험하고 있는 것 처럼, 세상은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말도 안되는 비성경적 가치들로 우리의 신앙을 무너뜨리려 한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가? 우리의 신앙의 후배들에게, 또한 우리의 자녀들에게 무엇을 전수해야 하는가? “하나님 앞에서 뜻을 정하는 신앙"이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삼일 간 세상 가운데서 성도로서 믿음을 지켜오시느라 고생많으셨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믿음을 지켜가야 할 것인데, 어김없이 사탄은 세상의 법으로 우리의 신앙을 무너뜨리려 달려들 것이다. 우리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지 못하도록 온갖 수단과 상황들을 동원하여 우리의 신앙을 공격할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에 불만을 갖게 만들고,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미혹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켜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뜻을 정하여 거룩하게 신앙을 지켜가는 복된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찬송 35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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