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나라

킹덤스토리 해설 시리즈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18 views
Notes
Transcript
서론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오늘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합니다. 성경에 하나님과 함께 해서 어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형통의 길을 걸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요셉입니다. 오늘은 이 요셉의 삶을 통해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나누고자합니다.
1-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우리가 어려운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 형통이다. 라는 것입니다.. 39장의 전체 주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형통하다라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요셉이 하나님으로 인해 형통하다는 진술해서 시작해서 형통하다는 이야기로 끝납니다. 처음과 끝이 형통에서 시작해서 형통에서 끝내면서 의도적으로 요셉이 형통한 사람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 보시면 형통한 상황이 아닙니다. 창세기 37장에 요셉의 배다른 형제들이 요셉을 외국의 노예상들에게 팔아넘깁니다. 얼마나 악질적인 행위인지 모릅니다. 고대사회에서 자기 집안 식구가 아무리 미워도 죽였으면 죽였지 노예로 파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자기 집안 식구를 노예로 파는 경우는 집에 빚이 많아서 탕감을 위해 노예로 팔고 그 집에서라도 밥 굶지 말라고 할 수는 있지만 단순히 동생이 질투가 나서 노예로 팔아버리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얼마나 악질적인 행동인지 모릅니다. 지금으로 치면 불신자도 안할 행동입니다. 이렇게 노예로 팔리고 나서 39장 2절에 놀라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라고 합니다. 형님들의 악질적인 범죄로 타국에 노예로 팔려왔는데 이게 무슨 형통입니까? 우리가 보기엔 인생 엄청 꼬인 것입니다.
만약에 제가 배를 타고 어디로 놀러가다가 소말리아 해적선을 만나가지고 납치 되서 어디 근처 무인도에 노예로 팔렸는데 거기서 일 잘한다고 칭찬 받고 인정받아서 노예 중에 대장이 됐다고 칩시다. 이 사실을 성도님들이 아시면 저한테 뭐라 말씀하시겠습니까? “아이고 김 목사님 형통하셨네요. 어딜 가나 중요한 직분을 맡아 일하시고 참 리더쉽이 있습니다. 역시 우리 김 목사님 대단합니다.” 이렇게 말씀 하실 분 있습니까? 우리가 성경 이야기를 다 잘 알고 있으니까 여호와, 형통 이 두 단어만 보고 요셉이 형통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상황이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절대 형통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 말씀은 요셉이 형통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왜 형통합니까? 잘 아시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요셉의 상황이 어렵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형통하다고 합니다. 우리의 형통의 기준은 주로 상황입니다. 복지가 좋고 연봉이 높은 직장에 우리 자녀가 취업하고 부모님께서 건강검진을 했는데 결과가 너무 좋고 이런 것들을 형통의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형통의 기준은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 곁에 하나님이 계시느냐 안 계시느냐가 형통의 기준이 됩니다. 믿음이 있지 않으면 이것을 형통의 기준이라 생각하기가 힘듭니다.
요셉이 형통하다고 한 이유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이야기합니다. 3절에 그의 주인이, 그러니까 노예인 요셉을 사들인 보디발이라는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을 가정총무로 삼고 자기 소유를 다 위탁했는데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쳤다고 말씀합니다. 창세기 12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기억납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땅의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 했는데 애굽이란 낯선 땅에서 요셉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알려지고 하나님의 복이 내려지고 있습니다. 요셉 자신은 어려운 상황에 있지만 그 요셉을 통해 하나님의 복이 열방을 항해 전진하고 있습니다.
(적용)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때로는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때가 있습니다. 가정사가 문제가 없고 직장 생활이 늘 안정적이고 평안하고 좋은 일이 가득하고 그랬으면 좋겠지만 어려움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형통하지 못하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형통의 기준이 상황이 되면 안 됩니다. 가정상황이나 직장상황이 형통의 기준이 되면 우리는 불행한 사람이 됩니다. 부디 우리 형통의 기준이 하나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려운 상황 속에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 있지만 나를 통해 나의 삶의 현장에 복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어야 합니다. 내 상황이 어려워도 나를 통해 복을 얻는 사람들을 보며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 신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나는 어렵지만 나의 섬김을 통해서 이웃이 위로 받고 내가 있기 때문에 이곳이 더 나은 곳이 된다면 그곳이 바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2- 믿음과 순종으로 반응
(설명) 그 다음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으로 인해 형통한 사람은 하나님께 믿음과 순종으로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에 하나님과 함께 하는 형통을 누리는 사람은 그 이유가 다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주인인 보디발의 호의 덕분에 요셉은 가정총무로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합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7절에 눈짓을 했다고 나와 있는데, 원어 그대로의 표현은 ‘그녀의 눈을 들었다’입니다. 이것은 요셉에게 자꾸 시선을 주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표현이 함무라비 법전에 등장하는데 그냥 관심 있게 쳐다보는 정도가 아니라 성적인 욕망을 품고 쳐다보는 것을 말합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눈짓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동침을 하자고 노골적으로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함께 눕자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8절에 보시면 요셉이 여기에 대해 거절했다고 말합니다. 이 거절하는 것은 강한 거절, 단호한 거절을 할 때는 표현입니다. 요셉이 거절한 이유는 보디발이 요셉에게 준 신뢰를 깰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하나님입니다. “어떻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라고 말합니다. 형통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을 생각하지만 형통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요셉이 형통한 이유는 어떤 유혹과 압박에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려는 씨름이 있었습니다. 주목할 점은 이 상황이 굉장히 은밀한 상황입니다. 9절에 보시면 이 집에는 나보다 더 큰 이가 없다고 요셉이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보디발의 집안 상황을 어느정도 통제할 수 있는 입장입니다. 죄를 짓더라도 은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에게 잘 보이면 요셉이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된다거나 하는 일을 꾸밀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요셉은 노예였기 때문에 여주인의 명령을 거절하는 일에 있어서 큰 부담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달콤한 유혹과 무거운 압박을 묵묵히 견뎠습니다.
이런 상황을 견딜 수 있던 비결은 바로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입니다. 세상의 형통한 기준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처세술을 접목해서 장밋빛 미래를 개척하는 것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형통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유혹과 어려움 가운데 있어도 나와 함께 하시고 복 주시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반응하고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형통입니다. 본문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그가 아버지 야곱과 함께 살 때 전수받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형통한 사람이 되도록 지키고 보호 했을 것입니다. 시편 105편 17절에서 19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나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요셉은 말씀으로 단련되었고 단련되는 중입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말씀을 배우진 않았을 것입니다. 요셉은 그의 부모로부터 말씀을 전수받았고 이 말씀의 그를 단련시키고 요셉이 유혹을 당할 때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은 노골적이었고 집착이 끝도 없었습니다. 매일 유혹을 했고 요셉은 매일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결국 이 유혹이 절정에 달합니다. 12절에 보시면 보디발의 아내가 아예 요셉의 옷을 잡고 늘어집니다. 요셉이 여주인을 때릴 수도 없고 밀쳐낼 수도 없고 결국 그냥 옷을 포기하고 도망을 쳤습니다. 이렇게 여주인이 옷까지 붙잡으며 유혹했는데 넘어오지를 않으니까 자존심도 상하고 분했던 모양입니다. 여주인이 집안에 있는 종을 부릅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가짜뉴스를 전달합니다. 14절과 15절에 보시면 주인이 히브리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 그가 나와 동침하고자 내게로 들어오므로 내가 크게 소리질렀더니 그가 나의 소리질러 부름을 듣고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라고 이야기합니다. 굳이 종들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말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보디발이 종들을 심문할 때 똑같은 이야기를 해서 요셉이 실제로 여주인을 범하려고 한 것처럼 이야기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을 이 주인이 요셉을 히브리 사람이라고 이야기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봅시다. 보디발의 종들이 많을텐데 그중에 요셉만 히브리 사람이고 대다수는 애굽민족이라고 한다면 히브리 사람인 요셉이 많은 인정을 받고 가정총무가 되는 것을 다른 종들이 달가워했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보디발의 여주인은 자신의 욕망을 해결하는 일이 좌절되니까 민족주의를 부추기고 가짜뉴스를 퍼뜨려서 가짜 증인을 만들어 요셉의 삶을 파괴하려고 합니다. 우리 생각에는 요셉이 이렇게 집요한 죄의 유혹을 잘 견뎠는데 그렇게 했으면 보디발이 갑자기 등장해가지고 이런 모습을 보고 요셉에게 더 큰상을 내리고 그의 아내를 벌해야 하는데 오히려 요셉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았다는 이유로 가짜뉴스의 희생양이 되어서 누명을 뒤집어 쓰게 되었습니다. 순종하고 믿음으로 반응했다고 바로 좋은 결과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적용)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어려운 상황에 내가 편하게 사는 길을 발견했는데 그 길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선택했을 때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했을 뿐인데 이전 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다. 후회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려워졌다고 해서 그게 틀린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상황이 어려워지더라도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게 형통한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 이면에는 하나님께서 하실 놀라운 일이 잠들어 있습니다.
3-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여심
(설명) 마지막으로 분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여신다는 것입니다. 39장 본문을 보면서 형통은 어려운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복을 흘려보내는 것이라 했습니다. 형통한 사람은 믿음과 순종으로 반응하는 것이며 순종했기 때문에 더 어려워 질 수 있다는 것을 나눴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끊임없이 어렵나 하는 질문에 도착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데 하나님은 충분히 우리의 어려움을 해결하시고 복주실 수 있는 분인데 왜이렇게 우리를 어려운 길로 인도하시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보디발은 그의 아내가 하는 말을 듣게 되고 심히 노했습니다. 보디발은 요셉을 옥에 가둡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요셉이 사형을 당하지 않고 감옥에 들어갔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고대사회에서 노예가 여주인에게 나쁜 짓을 한 것이 드러난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아마 보디발은 요셉이 그의 아내를 범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걸 그냥 무혐의로 처벌하면 그의 권위나 집안의 질서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요셉을 감옥에 가두는 정도로 이 사안을 처리한 것 같습니다. 감옥에 들어간 요셉은 옥에 갇혔지만 21절에 보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셨습니다. 요셉은 죄수임에도 불구하고 간수 업무를 하게 됩니다. 갇힌 자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과 함께 계시니 사실은 갇힌 자가 아니라는 것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요셉이 비록 어려운 상황에 계속 처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작은 사건들을 통해 여전히 요셉과 함께 하심을 믿게 하시고 확신을 시키십니다. 39장의 마지막 절인 23절은 또 요셉이 형통하다고 하며 39장이 마무리됩니다.
요셉이 감옥에 들어온 것은 노예로 팔린 것에 이어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뤄진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이 감옥에서 빵 굽는 관원장과 술 맡은 관원장을 만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술 맡은 관원장을 통해 요셉을 애굽의 왕 앞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애굽의 왕 앞에 선 요셉은 그가 해결할 수 없는 것을 해결하고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애굽의 총리가 된 야곱은 가뭄으로 고통당하는 자신의 가족을 구원하게 됩니다. 그 가족은 어떻게 됩니까? 70명의 야곱의 가정이 장차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이루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장차 이 나라에 누가 오십니까?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십니다. 그분이 오셔서 구원자가 되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들이 요셉이 갇혀있는 조그만 감옥에서 일어납니다. 여주인의 유혹을 이겨내서 감옥에 갇힌 일이 굉장히 억울한 일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형통한 길이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여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고난당하고 억울할 때 세워집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바로 보상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더 어려운 일이 생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억울한 일, 어려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십니다. 왜 하필 하나님 나라는 이런 방식으로 세워집니까? 왜냐면 하나님 나라는 아무나 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무리 힘들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나님과 함께 할 사람이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세우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도 말씀 붙들고 그분을 믿고 따를 사람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안락함을 추구하는 사람이 열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 태동합니다. 말씀으로 연단되고 고난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여는 나라입니다.
본문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 형통은 원어로 짜라흐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거침없이 나아간다. 돌파한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번영한다 성공한다라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우리가 잘 나간다라고 할 때 성공한다는 것을 상상하지 않습니까? 지금 저는 이 단어를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형통은 눈 앞에 어려움이 있고 고난이 있을 때 요리 조리 피해서 안락함을 쫓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형통은 고난을 돌파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길을 뚫어낼 때 그곳엔 하나님의 나라를 여는 길이 있습니다. 우리의 형통은 이래야 합니다.
(적용) 혹시 어려운 일 가운데 있으십니까? 아무리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말씀대로 사는데 어려운 일이 계속 찾아옵니까? 얼마나 억울하고 힘들겠습니까?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 어려움은 과정입니다. 좋을 때나 힘들 때나 어떤 순간이든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증명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열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될 것입니다.
결론
설교를 맺겠습니다. 진정한 형통은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런 형통한 사람은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함께 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그 순간을 이겨낼 때 형통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질 줄을 믿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남은 한주간도 하나님과 함께 진정으로 형통한 길을 걸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여는 한 주 보내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