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직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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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views1. 도망간 엘리야 2.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3. 엘리야의 한탄 4. 하나님을 기대하다 5. 계시지 않는 하나님 6. 하나님의 일하심의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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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의 도망
엘리야의 도망
엘리야가 도망을 갑니다. 지난 주 강도사님의 말씀처럼 엘리야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었고, 본인도 그 기적을 보았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불 기적 전에 물 24L를 제물 위에 부으면서 제물과 모든 나무들이 물에 젖도록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뭄 속에 있습니다. 오늘 내가 마실 물도 아껴야 하는 그러한 극심한 가뭄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 물을 그대로 부어버렸습니다. 3년이라는 가뭄동안 물이 말랐고, 사람들은 그 물들을 따로 보관하고 살기 위해 아끼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물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면서 생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갈멜산에서의 일을 보기 위해 각자 물을 가져왔는데, 그 물을 엘리야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 물은 제단과 제물 그리고 나무를 적셨고 흘러 내려 도랑에 가득찼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모든 것들을 다 태웠습니다. 기적이죠.
강도사님의 말씀처럼 도무지 소망이 없어보였던 그 곳에 소망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그리고 연달아 또 하나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자신들의 보물이자 생명과도 같았던 물을 내어준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비를 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왔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비를 통해 “생명은 물이 아닌, 나에게 달려 있다는 것”과 “자신과 함께 살아가자"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제2가족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이러한 기적의 중심에 서 있던 엘리야였다면 아니 그것을 경험한 이스라엘 사람이었다면 어떠하셨을 것 같나요?
엄청난 기적을 보았고 하나님이 정말로 지금도 살아 역사하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라는 사람을 통해 그 기적이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면 어떨 것 같으신가요? 만약 제가 엘리야였다면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면 엄청난 자부심을 가졌을 것 같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제사장들이 그렇게 갖은 수를 써도 심지어 몸을 자해 해가면서까지 찾았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던 신과 다르게, 물에 흠뻑 젖은 모든 것들을 한번에 태워버리는 그 신이 나의 신이라면 저는 엄청난 자부심을 느끼고 벅차오르는 감정을 가졌을 것 같습니다. 몸의 모든 털이 서는 듯한 통쾌함까지 느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의 신이 더 능력이 있고 더 위대하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비까지 내려주셨습니다. 그럼 이제 엘리야와 이스라엘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찬양하고 의지하며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기적들을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정말 엄청난 사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건의 중심에 서있던 엘리야의 마음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벅찬 그러한 감정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면요. 우리도 이러한 감정을 가졌던 적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입니다. 혹은 수련회나 부흥회 때 뜨겁게 하나님께 기도하며 은혜가 넘쳤을 때의 그 감정이 바로 엘리야가 느꼈던 감정과 같습니다. 물론 수련회 혹은 부흥회와 같은 특별한 때에만 은혜를 받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그러한 시간을 가질 때 우리의 마음이 더 뜨거워짐을 느끼거든요. 그 불타오르던 마음이 바로 엘리야의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 자신감. 그 마음을 엘리야는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19장 1절입니다. 갈멜산에서 패배를 경험한 아합이 궁으로 돌아가 자신의 아내 이세벨에게 갈멜산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이야기 합니다. 아이가 엄마에게 달려가 고자질 하듯 아합은 이세벨에게 말을 했고, 이세벨은 그 이야기에 격하게 반응합니다.
바로 엘리야에게 사신을 보내 “내일 이 맘 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가져갈 것이다.”라는 협박을 합니다.
엘리야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지금 엘리야는 ‘하나님의 기적을 보았고 자신을 통해 행해지는 것을 경험했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다 죽였습니다.’
지금 그에게는 엄청난 자신감과 높은 자존감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이 있는 상태입니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도망갑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부터 갑니다.
이세벨을 정말로 엘리야를 죽일 생각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성격이 괴팍한 이세벨이라도 앞뒤 가리지 않고 엘리야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정말로 죽일 생각이었다면 사신을 보내 협박부터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장 그를 잡아 죽일 수 있는 병사들을 보냈을 것입니다.
갈멜산과 비가 내리는 기적을 본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만약 그 일을 한 하나님의 선지자가 죽는다면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시적이라 해도 엘리야는 그들의 최고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었거든요. 아무리 이세벨이라도 그를 처형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내일 이 맘 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가져갈 것이다.”라는 이 말의 뜻은 “알아서 이 곳에서 나가라.”라는 협박입니다. 물론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민심을 살폈습니다.
이러한 협박에 엘리야는 도망을 선택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했던 마음으로 버티고 싸워보기보다 자신의 목숨을 생각하며 도망갑니다.
하나님의 찾아오심
하나님의 찾아오심
도망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던 엘리야를 하나님께서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두번이나 물으십니다. 9절과 13절 하반절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첫번째 질문을 받았을 때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준비해주신 음식을 먹고 40일을 달려 호렙산에 도착해 그 곳에 있는 굴에 들어갔을 때 였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는 하나님의 질문에 엘리야는 10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주 퉁명스러운 대답입니다.
“하나님 솔직히 저처럼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어디있나요? 유별나게 제가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잖아요? 그래서 갈멜산에서 850대 1로 싸운거잖아요. 그렇게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하지만 이것 보세요. 저에게 남은게 무엇이 있나요?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나 혼자 남았습니다. 저 혼자 남아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지키고 있어요. 저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유별나게 따른 대가가 이거였군요. 나 혼자 남았네요.”
그는 갈멜산 전투가 끝이라. 마지막 싸움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850대 1의 싸움. 바알과 아세라와 하나님과의 싸움. 그 승자가 하나님었으니 이제 이스라엘의 배교 행위는 끝이 나고, 모두가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죠. 현실은 바뀌지 않고 그대로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자신을 위협하는 사람들만 있었습니다.
엘리야와 나
엘리야와 나
엘리야의 말만 보면 참 비참합니다.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섬긴 댓가가 살해위협 그리고 혼자 남는 것이라면 그 누구도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차라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 기적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을 포기하고 떠나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삶의 어려움과 고난들을 // 이 악물고 버텨내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 길을 함께 걸어가주시며 때에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과, 또 그 길의 끝에 있을 회복을 기대하기 때문 아닌가요?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고 감사해서 또 그것을 통해 하루를 살아갈 수 있기에 어떻게든 버티고 서서 이 길을 걷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그 길의 끝이 엘리야처럼 “혼자 남는 것”. “변하지 않는 현실". “여전한 삶의 위협"이라면, 여러분 계속해서 이 길을 걸어갈 수 있으신가요?
“네가 어찌하여 여기있느냐"라는 하나님의 질문에 엘리야는 어떤 마음으로 대답한 것일까요?
엘리야는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신데로 // 가르쳐주신데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저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났어요. 나만 남았어요.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믿고 성공하고 잘 되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어요.”
“내가 살아온 길이 유일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장 좋은 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삶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 살아왔어요.”
“나와 함께 하는 사람이 없었지만요. 저는 하나님을 위해 묵묵히 이 길을 걸었어요.”
“나만 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나 혼자 그 일을 해왔어요. 나 혼자 외로운 싸움을 했어요.”
“하나님을 위해 살아왔는데.. 남은 것은 살해 위협밖에 없네요.”
엘리야는 하나님을 위해 살았고 일했는데 살해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속마음을 하나님께 다 털어놓고 있습니다.
그의 탄식이. 그의 마음의 소리가 어떻게 들리시나요?
사실 엘리야의 말이 다 맞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떠난 것 같은 그 때였기에 엘리야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기준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두가 무시하고 버린 신을 믿는 사람이었기에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하나님에 대한 평가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고독하게 외롭게 그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혹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지 않을까 조심하며 살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고 유일한 신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살아왔고, 갈멜산에서도 혼자 그 앞에 서 싸웠습니다.
그의 말이 다 맞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는 단 한번도 혼자였던 적이 없었다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는 절대 혼자 였던 적 없습니다. 혼자 그 길을 걸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갈멜산에서 혼자 외롭게 싸우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든 순간 함께 하셨습니다. 하지만 엘리야가 그것을 느끼지 못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제2가족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계심을 정말 믿고 계십니까? //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느끼고 그것에 대해 감사하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여러분도 하나님을 위해 살았는데 엘리야처럼 이런 대접을 받아보신 적 있으십니까? // 하나님을 위해 살기 위해 노력했는데 혼자자 걷고 있고, 광야 위에 나만 버려진 것 같은 외로움과 고독감을 느껴보신 적 있으신가요?
저는 첫 사역지에서 이러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신대원에 합격을 하고 입학하기 전에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첫 사역지였기에 참 많이 긴장도 했고 많은 기도를 하며 준비했습니다.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부장단 선생님들을 만나러 토요일에 교회에 왔습니다.
저를 참 많이 힘들게 했고 또 저를 성장시켜주신 부장님과의 첫 만남이었는데요.
제가 준비한 계획서와 내용들을 보지 않고 치우시고, 제가 맡게 될 부서는 모두가 기피하는 부서이며 문제가 많은 곳이기에 자신의 지시를 따라야 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었고, 결정된 사항들을 제가 정리해서 읽고 그 다음 날 부서에서 나누기로 했습니다. 주일이 되었고 처음 부서 선생님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부장단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부장집사님께서 갑자기 저를 향해 “야! 얌마! 그렇게 하지 말라고 내가 이야기했잖아!”라고 소리를 치셨습니다. 나중에 저에게 소리를 치신 이유가 부서 내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다른 분들을 통해 들었습니다.
당황했지만 웃으면서 넘겼고,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작정했고, 그래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곳에서 사역을 시작했는데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그 곳에서 참 지독히도 괴롭고 외로운 감정을 느꼈습니다. 광야와 같은 곳에 버려진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부터 부장집사님은 제가 설교를 하고 내려오면 바로 올라가셔서 동일한 본문으로 설교를 하고 내려 오셨습니다. 그럴수록 저는 위축되었고 그 곳에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나를 돕는 이 없고, 하나님마져도 저를 그대로 두시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계시지 않고 일하지 않는다 생각했습니다. 이 상황이 반년이상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께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던 것일까요? 엘리야를 혼자 갈멜산에 두고 침묵하시지 않으셨던 것처럼, 그리고 지금 좌절하고 있는 엘리야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처럼 저에게도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셨더라구요.
어느 날 갑자기 부장님이 저를 부르시고 그렇게 하지 않겠다 말씀하시더라구요. 왜 갑자기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막말하는 부장님으로 인해 힘들었지만 그만큼 더 하나님께 나아갔고 매일 무릎을 꿇었거든요. 그리고 그 분으로 인해 맷집도 생겼고 단기간 내 급성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원하는 방법대로 일하시지 않았어요. 결국 저는 하지 않겠다는 말만 들었을 뿐 사과나 다른 이야기는 듣지 못했거든요. 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방식으로 일하셨어요. 그 분을 통해 제가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하고 붙잡고 일어설 수 있도록 내공을 길러주신 것이죠.
하나님의 현현
하나님의 현현
이런 투정을 하고 있는 엘리야 앞에, 왜 자신을 혼자 두느냐 외치던 엘리야 앞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11절을 통해 “나가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아직 굴에 있는 엘리야 앞을 여호와께서 지나가셨습니다. 그 분이 지나가시자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기 시작합니다. 연이어 땅을 뒤흔드는 지진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타오르는 불꽃이 생겨납니다.
엘리야는 지금 하나님 앞에 투정을 부렸습 다. 마치 자신 혼자 남아 그 일을 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도움도 없이 자신만 유일하게 유별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외쳤습니다.
엘리야가 투정하고 외친 이유는 한가지였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오늘. 그 것을 보장해주는 하나님의 말씀'이었거든요. 엘리야는 그것을 위해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살아왔는지를 말하며,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보상을 해주시기를, 말씀 해주시기를 바라며 투정하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한 엘리야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는 듯 지금 강한 바람, 지진, 불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엘리야는 분명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을 위해 일하시겠다는 말씀하실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말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었는데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습니다.
정말 이상합니다. 바람 후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습니다.
다시 찾아봅니다. 지진 후에 불이 있는데 불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습니다.
그가 기대하는 하나님의 반응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의 기대가 실망감으로 바껴가던 그 때, 불이 사그라지던 그 때, 모든 것을 포기하려던 그 때 세밀한 하나님의 음성이 그에게 들렸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강함에만 있지 않습니다. 기적과 이적을 통해서도 역사하고 일하시며 사람들을 압도하는 위대함을 보이기도 하시고, 때론 약함을 보이기도 하십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약함은 우리 사람과 같은 어떠한 약점, 약한 부분이 아닌 섬세한 일하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크고 강함. 화려함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분의 일하심은 1분 1초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 그분의 일하심은 절대 멈추지 않습니다. 매순간 마다 하나님은 다양한 형태로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항상 세상의 권세와 하나님의 원수들을 무력으로 파괴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때론 세상의 권세에 짓밟히는 듯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일하고 계시는 것이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때도 분명 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했습니다. 하나님을 보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낙담하려 했을지 모릅니다 그런 그에게 그 때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찾아가셨습니다. 엘리야는 그 음성을 듣고 다시 일어섭니다.
그가 기대했던 크고 강한 응답과 일하심은 절대 아니었지만 세미하게 들려오는 어떻게 보면 앞선 바람과 지진, 불꽃보다 작아보이는 그 음성을 듣고 그는 다시 힘을 얻고 일어섭니다.
하나님께서 또 물으십니다. 13절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첫번째 질문과 같은 물음입니다. 첫번째 질문에 엘리야는 자신의 답답함과 외로움을 토로했습니다. 하지만 두번째 질문을 받았을 때는 달랐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는 두번째 질문이 엘리야의 마음을 관통합니다. 물론 그는 동일 10절과 동일한 대답을 14절에서 합니다. 하지만 그 대답을 하는 그의 마음에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 스스로 깨닫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어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시며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셨거든요.
“너는 죽지 않는다. 너를 위한 나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너는 절대 혼자가 아니다.”
“너는 혼자였던 적 없다. 지금까지 나는 너를 먹였고 입혔고 여기까지 오게 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그러니 다시 일어나 나를 위해 살라. 적극적으로 다시 섬기라"
나의 마음
나의 마음
엘리야가 받은 새로운 사명은 그에게 힘을 주고 다시 일어서도록 하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 혼자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혼자였다. 유별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나밖에 없다 여겼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엘리야 곁에 서 함께 싸워줄 사람들을 알려주십니다.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으로 삼도록 하셨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라 하셨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엘리야의 자리를 대체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방인에게 기름을 붓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스라엘은 넘어 열방에도 펼쳐짐을 의미합니다.
엘리야는 이것을 통해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방에도 자신과 같이 하나님을 위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는 것은, 패악하고 하나님을 떠나고 우상숭배에 혈안이 되어있는 북왕국을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셨으며 여전히 그들을 다스리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엘리야는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해오셨고 앞으로도 일하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7천명을 남겨 놓으셨다 하십니다.
엘리야가 필요했던 것은 ‘오늘을 살아낼 수 있는 힘. 내일을 살 수 있다는 보장'이었습니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죽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혼자여도 좋으니 살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노력을 기억하고 알아주기만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혼자'를 넘어서 ‘죽지 않는 것을 넘어서' 이방, 이스라엘, 엘리사 그리고 7천명을 준비해두셨다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에게 그 어떤 것보다 더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엘리야는 늘 문제 앞에 도망쳤고 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말씀해주셨음에도, 확실한 그 분의 응답 앞에서도 엘리야는 그 자리를 피했고 도망쳤습니다.
하나님은 그럴 때마다 엘리야를 포기하지 않고 다가가셔서 그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부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제2가족 여러분. 우리도 엘리야처럼 포기하고 외면하고 그 자리를 피할 때가 있습니다. 혼자의 힘으로 버겁다 느껴 그 길을 걷지 않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사명. 사역의 자리에서 나의 나이, 상황 등을 이야기하며 피했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엘리야도 우리도 비슷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은혜 충만했다가 넘어졌다가 쓰러졌다가 부들거리고 다시 일어나고, 또 서서 하나님을 위해 걷다 넘어지는 이 인생을 계속해서 반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삶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편안하고 행복한 길만 걸어가면 참 좋겠는데 왜 이러한 어려움과 고난들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 이유. 해답을 엘리야를 향한 하나님의 질문에서 찾을 수 있다 생각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 곳에 있느냐?”
하나님은 이 질문을 통해 엘리야에게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동일하게 이 것을 요구하십니다.
“반대와 실패를 견딜 수 있는 견고한 신앙을 가지라"
“반대와 실패를 견딜 수 있는 견고한 신앙을 가지라"
우리의 삶은 수많은 반대와 실패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반대는 여러 의미를 포함합니다.
먼저는 내가 나의 행동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선택하고 살고 싶고 편안하게 멋대로 살아가고 싶은 것에 대해 스스로 반대하고 절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야 하기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는 것. 나에게 익숙한 것을 포기하고 불편한 것을 선택하도록 하는, 내가 나의 행동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향한 세상의 반대입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려는 우리는 세상의 권세를 잡은 자들에게 굉장한 위협이 됩니다. 그래서 엘리야를 괴롭히고 협박했던 이세벨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와 위협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 믿음을 신앙을 포기하라 말합니다. 우리의 삶이 미련하다고 잘못되었다고 우리의 모든 생각과 발걸음에 반대를 표할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라 생각하게 만들고, 지독한 괴로움과 외로움 속에 살아가도록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실패했다 말할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가 아닌 보이지 않는 가치를 따르는 것이 미련하다 말할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넘어뜨려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할 것이 분명합니다.
앞으로 이러한 공격은 더 격렬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 엘리야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반대와 실패를 견딜 수 있는 견고한 신앙을 가지라"
하나님은 기꺼이 그분을 의지하고자 나오는 사람들을 돌보십니다. 나를 위한 일하심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혹시 요즘 혼자만 있는 것 같은 외로움 속에 계시진 않습니까?
내 삶에 하나님의 강력한 기적이 일어나기를 원하시고 있진 않았습니까?
내 기도에 하나님께서 언제 응답하실지 답답해하진 않으셨습니까?
이 광야의 끝은 어디인지 아니 끝은 있는지 속상해하진 않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이 질문은 혼자라 오해하며 외로워하는 엘리야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시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는데 왜 괴로워하고 무력감을 느끼고 있느냐.
나는 너와 함께 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함께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단 한순간도 나 혼자였던 적 없습니다. 그것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오늘 이 시간 되기를 소망합니다.
반대와 실패를 견딜 수 있는 견고한 신앙을 갖도록, 우리 곁에서 묵묵히 힘을 주고 계셨던 하나님을 깨닫고 만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기도하며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