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기억하라!

사사기 강해 시리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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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 인류와 기억력 전쟁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중국의 4대 발명품 들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중국과 세계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발명품을 말하는 것입니다. 종이, 화약, 나침반, 인쇄술입니다. 이 네 가지 발명품을 생각해보면 재밌는 사실이 있습니다. 이 중 세 가지가 기억에 대한 것입니다. 종이, 나침반, 인쇄술을 보십시오. 기억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의 기억력으로 한계가 있으니까 돌이나 동굴 벽이나 동물의 뼈 같은 것에 그림을 그리다가 발전한 것이 종이 아닙니까? 종이라는 발명품은 인간의 제한된 기억력을 오래 보존하기 위한 투쟁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나침반도 기억에 대한 것입니다. 배를 타거나 길을 가다보면 자기가 가야할 방향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원래 가던 거리를 다시 기억나게 하기 위해서 개발한 것이 나침반입니다. 지구 자체가 자기장이 있기 때문에 나침반에 있는 자석이 북쪽을 계속 향합니다. 인쇄술도 종이와 같은 맥락이지만 종이보다 더 강력한 기억수단입니다. 종이는 기록해두면 똑같은 원본 하나지만 인쇄술은 똑같은 것을 재료만 있으면 거의 무제한으로 뽑아냅니다. 한 가지 기억을 다른 사람과 동시에 공유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류 발명품의 대부분은 인간의 제한된 기억력을 보조하고 강화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인류는 오랜 세월동안 자신의 기억력을 뛰어넘기 위해 투쟁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이제 다 컴퓨터에 넣고 저장하는 시대가 된지 오래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디스켓에다가 파일 넣고 빼는 것을 수업시간에 연습했습니다. 디스켓 용량이 그 때 1.44 메가바이트입니다. 감이 잘 오실 수 있는데, 여기 계신 권사님들 며느리가 손자 손녀 재롱부리는 동영상 10초짜리 하나만 보내도 2메가바이트는 넘습니다. 디스켓 하나로 어림도 없습니다. 그런데 CD롬이 만들어지고 USB가 만들어졌습니다. USB는 요즘 기본이 20기가바이트 30기가바이트입니다. 놀랍습니다. 이런 복잡하고 어려운거는 사실 언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요즘은 뭐 카톡으로 받아서 핸드폰으로 다 저장해버립니다. 핸드폰이 64기가 128기가입니다. 엄청납니다. 인터넷에 저장하면 더 많이 저장합니다. 굉장한 시대입니다. 인류가 인간의 제한된 기억력을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알 수 있습니다. 좀 과장해서 말씀드리면 인류문화의 역사는 기억력의 역사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보편적으로 인류는 기억력을 극복하기 위해 투쟁했지만 하나님의 백성 또한 자신의 기억력과 투쟁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기억력은 좀 더 영적인 기억력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잊지 않고 하나님을 기억하는 기억력입니다. 말로 하면 간단하지만 실제로는 힘듭니다. 일단 하나님은 눈에 탁 드러나게 보이지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우상들이랑 다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억하기에 사람이라는 존재는 너무나 타락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해 애를 쓴 사람도 있고 하나님을 잊고 어려움을 당한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기억력은 성도의 삶을 좌우합니다. 우리 성도가 가져야할 기억력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기억할 때는 안식을 얻고 하나님을 잊을 때는 덩달아 안식도 잃어버렸습니다.
(전환문장) 오늘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잊을 때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본론1-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는 비극
(설명)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와주시니까 군사적으로 가나안을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나서는 이제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가나안을 점령해야 합니다. 가나안 땅을 인간이 통치하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통치하는 땅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강자가 약자를 착취해서 부를 축적하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통해 주시는 산물을 감사함으로 받고 나누는 땅이 되어야 합니다. 풍요와 쾌락을 추구하는 가나안 종교를 섬기는 대신에 구원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을 섬기는 땅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부르신 목적입니다. 이 목적대로 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에서 안식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신학적인 용어로는 샬롬을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시면 이스라엘이 샬롬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쫓아내라고 했지만 그렇게 못했던, 가나안 민족들의 신을 섬겼습니다. 우리나라 성경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했다고 번역했는데 원문에 있는 것을 그대로 옮기면 여호와의 시야에서 악을 행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뻔히 보시는데 악을 행했다는 것이죠. 악을 행한 내용이 뭐냐면 여호와를 잊은 것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난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으니까 하나님을 대체할 다른 뭔가를 섬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었다고 할 때 여호와를 잊었다고 말합니다. 여호와를 잊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이름의 뜻을 좀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하나님이 떨기나무에서 모세를 부르실 때 밝히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우리말 성경으로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문에서 에흐예 아쉐르 예흐예 라고 적혀 있는데, 영어로 번역하면 그 유명한 문구 “I AM WHO I AM” 입니다. 이게 히브리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가 까다로운 문구입니다. 히브리어와 영어와 한국말이 시간을 나타내는 방법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에흐예 아쉐르 예흐예를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나는 나다.’라고 번역이 됩니다. 보통 성경책 보면 밑에 박스 만들어 놓고 어려운거 설명 해주잖아요? 거기서도 대부분 ‘나는 나다.’ 이렇게 말할 겁니다. 근데 나는 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보통 현대 보수적인 성경학자들은 이 부분을 ‘나는 있을 그 자이다.’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항상 함께 있을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리고 그분의 백성들에게 “나는 너희와 계속 함께할 하나님이야”라고 말합니다. 이 이름이 이사야에서는 임마누엘로 나타나고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이 임마누엘이 되십니다. 예수님을 여호와 예수라고 말해도 되겠습니다.
어쨌든 이스라엘 백성이 잊은 것은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과 항상 함께하실 하나님을 잊은 것입니다. 이름은 인격을 반영합니다. 이름을 잊었다는 것은 관계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그분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분의 백성들과 교제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니까 다른 관계를 찾습니다. 우상과의 관계를 맺습니다. 우상숭배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비극을 맞이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비극은 바로 하나님을 잊는 것입니다. 우리 머리에 성경지식이 있어도 우리는 하나님을 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눈앞에서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건 하나님을 잊은 것입니다.
(증명) 하나님을 잊은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사울입니다. 사무엘상 15장을 보시면 왕이 된 사울이 아말렉과의 전쟁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전쟁을 하기 전에 사무엘은 사울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왕으로 세우셨으니 왕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하시길 아말렉 족속이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 했을 때 이스라엘을 괴롭혔기 때문에 그들을 벌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남녀노소를 막론하여 다 멸하고 그들의 모든 소유도 남기지 말고 다 멸해야 합니다.”
사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남녀노소 사람은 다 멸했습니다. 그런데 가축 중에서 품질이 좋다고 생각 하는 건 남겨뒀습니다. 사울이 왜 이렇게 행동했습니까? 사울이 하나님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겉으로는, 말로는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좋은 제물을 남겨두고 이걸로 제사 지낼 겁니다.’ 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사울의 행동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22절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하고 23절에 보면 하나님 말씀에 거역하는 것이 점치는 것과 같고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사무엘은 사울의 행동을 우상숭배로 묘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고 사울은 그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데 사울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잊어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자기 자신이 전쟁을 해서 이런 전리품을 남겼다고 과시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중요한 거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왕인지 드러내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이 안중에도 없었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잊을 때 사울의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의 왕좌를 빼앗아 다른 이에게 준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잊으니까 하나님 나라를 섬길 직분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잊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큰 비극입니다. 이때부터 사울 인생이 꼬여버립니다.
(적용) 우리는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최근 젊은 세대에서 깜빡 깜빡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른바 영츠 하이머를 겪고 있는 젊은 세대가 늘어났다고 합니다. 치매를 알츠 하이머라고 하잖아요. 젊은 사람이 겪고 있는 치매를 영츠 하이머라고 합니다. 디지털 치매라는 말로도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디지털 치매의 원인은 너무 많은 정보에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같은 sns나 유튜브를 보면 엄청난 정보들이 뇌로 막 쏟아져 들어옵니다. 하지만 뇌는 그걸 차분히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뇌가 무리를 해서 그 정보들을 대충 대충 섭취합니다. 그래서 하나를 보더라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기억력이 점점 감퇴합니다. 이런 식으로 디지털 치매를 겪게 됩니다.
영적인 세계에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정보들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정보들 너무나 많은 지식들이 우리 머릿속으로 파고 듭니다. 너무나 매혹적인 세상의 이야기들 정보들이 쏟아져 드러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인 기억력 감퇴를 겪는 것 같습니다. 영적인 일을 잊고 하나님을 잊고 세상적인 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대신에 세상에서 들려오는 재밌고 시끄러운 잡음에 더 집중하게 됩니다. 언젠가부터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 밋밋하고 무미건조합니다. 세상에 자극적이고 재밌는 정보들이 너무 많습니다. 가끔은 세상에서 우리에게 밀려오는 정보와 소리들을 잠시 차단하고 하나님께 집중하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이번에 우리 교사선생님들이 바이블 키즈라는 주제로 성경학교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 세상에서 유통되는 지식에만 마음을 뺴앗기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번 여름성경학교는 여기에 힘쓰는 성경학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3- 하나님을 기억하고 찾게 하시는 하나님
(설명)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리가 말씀에서 멀어질 때 하나님께서는 “여기 내가 있어”라고 하시며 하나님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찾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구산 리사다임에게 8년간 시달렸습니다. 너무 힘드니까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그제서야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렸지만 하나님이 허용하신 고난을 통해서 다시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8년만에 회개하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옷니엘을 부르셨습니다. 최초의 사사입니다. 사사란 이스라엘에 왕정제도가 생기기 전에 임시적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군사적인 지도자입니다. 성경에 보면 여호와의 영이 옷니엘에게 임했더니 옷니엘이 사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산 리사다임을 옷니엘에게 넘겨 주셨다고 본문이 말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다시 자유를 찾게 됩니다.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의 진정한 사사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허용하셨지만 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셔서 싸우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을 다시 기억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다시 기억하게 됩니다. 그리고 11절을 보시면 이스라엘이 40년 동안의 평안을 얻게 됩니다. 이것을 보면 성경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과 안식을 얻는 일은 상호간에 연동되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찾을 때 안식이 주어집니다. 반면에 우리가 하나님을 잊으면 안식을 잃어버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다시금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시고 안식을 회복시켜주십니다.
(증명)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기억나게 하시고 죄를 멈추시고 안식을 베푸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씀드리길 남들이 다 예수님 버려도 저는 아닙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닭 울음소리가 세 번 들릴 때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그 때 베드로가 막 흥분을 하면서 이야기를 했을 것 같은데, “제가 주님과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는 일은 없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이후에 예수님께서 공회에서 추궁당하고 고문당하실 때 바깥뜰에서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어떤 여자가 “당신 예수랑 같이 다니던 사람 아니예요?”라고 할 때 베드로가 적극적으로 부인했습니다. 다른 여자가 또 질문 할 때 나는 그 사람 몰라요라고 대답합니다. 마지막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물을 때는 예수님을 저주까지 합니다. 이 때 갑자기 닭이 꼬끼오하고 웁니다. 이 때 베드로가 예수님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네가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이 베드로가 죄인인 것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닭 울음 소리를 듣고 통곡하며 예수님을 모독하는 죄를 더 이상 짓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주님께서 부활하셨을 때는 제자들이 있는 공적인 자리에서 베드로를 양무리를 돌볼 사도로 세워주고 인정해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자리에서 살아남으려고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 말하며 발버둥쳤지만 예수님은 닭 울음소리를 통해 베드로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기억나게 하시고 다시 사도의 자리에 세워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자신을 기억나게 하시고 안식과 회복을 주셨습니다.
(적용) 하나님은 그분 스스로를 우리에게 드러내시고 기억나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 하나님을 잊고 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교회를 통하여, 예배를 통하여 강렬하게 하나님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실한 동역자를 통하여 하나님을 드러내십니다. 일상 속에서 문득 떠오르는 성경 구절 하나로, 입에 붙어 흥얼거리는 찬송 한 소절로, 티비 채널을 돌리다가 잠깐 스쳐지나가는 기독교 방송 한 토막으로도 하나님은 스스로를 드러내십니다. 우리의 타락한 죄성은 하나님을 잊으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위해 그분의 말씀을 여러 가지 통로로 주입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위해 노력하십니다. “나를 기억해봐 나는 너에게 안식을 베푸는 하나님이이야!” 하나님이 이렇게 노력하실 때 그 노력에 반응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하나님을 기억하면 우리의 일상 가운데 휴식보다 더 달콤한 참된 안식이 찾아올 것입니다.
(전환문장)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결론 – 요약적 결론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큰 비극은 하나님을 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잊을 때 안식을 잃어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분을 기억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안식 베푸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고 기억할 때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남은 한 주간 하나님을 기억하며 안식을 누리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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