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의 복음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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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칭의의 복음 두 번째 시간입니다. 두 번째 시간을 갖기에 앞서서 지난 시간의 내용을 다시 한 번 기억해볼까요? 우리는 지난 시간 칭의가 가진 법정적인 개념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바울은 먼저 “모든 인간은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선언하며 인간의 비참하고 끔찍한 상황에 대해 설명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은혜로 구원의 방도를 마련해 주셨는데,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모든 인간을 대신하고 대표하여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 버리도록 하셨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고 하며 아무 기대도 소망도 가질 수 없는 인간들에게 구원의 길을 밝히 보였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법정에서 우리에게 무죄를 선고하시는 것과 같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련하신 합당한 근거에 의해 하나님은 모든 믿는 자에게 무죄를 선고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 우리가 살핀 칭의가 가진 첫 번째 개념 즉, 법정적 개념인데요, 이것이 정말 칭의가 가진 개념 중에 너무나도 중요하고 대표적인 개념이긴 하지만, 오직 이것 한가지만 고집하고 붙든다면 우리는 신앙의 오류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오직 법정적인 개념의 칭의만을 고집할 때 더 이상 그리스도인에게서 거룩한 삶, 순종의 삶을 찾아볼 수 없게 되는데, 이런 모습을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기독교 신앙이 오해를 받곤 합니다.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하곤 하지요. “아무렇게나 막 살아도, 예수만 믿으면 죄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건가? 일주일 내내 온갖 더럽고 추악한 일을 벌이다가 일요일에 교회를 가서 예수 이름만 부르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니, 이게 말이 되는건가? 사람을 더 사람답게 만들어야 할 신앙이 오히려 죄를 더 조장하고 있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구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무런 거룩도 순종도 찾아볼 수 없는 삶의 모습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삶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 신앙은 오히려 죄를 조장하는 것일까요? 아니지요. 그런 것은 제대로 된 기독교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참된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오늘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확실하게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본격적으로 칭의가 가진 또 다른 개념을 살펴보기에 앞서 이 ‘의’라는 단어를 좀 설명해야하겠습니다.
성경에서 사용하는 ‘의’라는 단어는 근본적으로 관계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의’는 근본적으로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다함, 관계에 신실함’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관계(부모—자식, 의사—환자, 고용주—노동자, 왕—백성 등)는 이 관계에 참여하고 있는 참여자들 양쪽 모두에게 의무를 지웁니다. 예를 들어, 부자 관계 속에서 부모에게는 자식을 잘 양육할 의무를 지우고, 자식에게는 아비를 공경하고 순종할 의무를 지웁니다. 이때 부자가 함께 그 관계에서 나오는 자기 쪽의 의무를 다하면, 그때 그들을 의롭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의로운 부모와 자식이 가지고 있는 관계는 원만하고 평화로운 상태를 갖는데요, 이것이 바로 ‘샬롬’입니다. 그러니까 ‘의’가 ‘샬롬’을 낳습니다. 반면에 이 관계에 참여하고 있는 참여자들이, 관계에서 나오는 상대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그들은 ‘불의’하며, 그 관계는 갈등, 불화를 겪게 됩니다. 이렇듯 ‘의’라는 단어는 오직 관계 속에서만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의로운 사람들이 맺고 있는 관계에서는 샬롬의 열매가, 불의한 사람들이 맺고 있는 관계에서는 갈등과 불화의 열매가 나타나게 되지요. 즉, 의로운 사람이란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해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이를 언약이라 부르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이 언약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 왕과 백성, 목자와 양 떼, 신랑과 신부, 농부와 포도원의 관계 등으로 그려냅니다. 이 언약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복 주시고, 그들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의무를 스스로 지신 것이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순종하는 의무를 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하나님과 온 인류의 관계의 한 특수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언약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온 인류와 세상을 창조하실 때 그 피조물들을 보살피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물론 심지어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인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순종해야 하는 의무를 다하지 못하여,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 신실하지 못하여 ‘불의’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죄요, 인류의 죄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사탄의 죄와 죽음의 통치 아래 떨어지게 한 것입니다.
인간의 부모는 자식 도리를 못하는 불의한 자식을 내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자신도 부모 노릇 해 주어야 하는 도리를 다하지 못하여 ‘불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배신한 피조물인 우리를 인간의 부모와 같이 내치시면 인간에게는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또 만약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면 하나님 역시 그와 피조물 간의 관계에서 나오는 자기 쪽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신 것이니, 하나님도 ‘불의’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고 계시하셨습니까? 인간이 자신을 배신하고 죄에 빠졌어도, 인간이 불의하다고 하여도,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끝까지 아버지 노릇 해 주시는 분이라고,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창세기의 아담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근본 문제와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한 ‘탕자의 비유’(눅 15:11-32)를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이 이곳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가 바로 하나님의 끝까지 아버지 노릇 해주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당신이 인간들을 향해 끝까지 아버지 노릇을 하시는 분이시라고,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라고 분명히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관계적 개념

‘의’라는 단어를 성경을 통해 다시 한 번 정의해보니, 칭의에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지난 시간 살펴본 법정적인 개념보다 훨씬 깊은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관계적인 개념에서 칭의를 바라보지 않고서는 칭의가 담고 있는 풍성한 의미를 다 담아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셨다고 하시는 이 칭의의 복음을 관계적인 개념 안에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롬 3:21-26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김세윤 박사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는데요, 그대로 한 번 인용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 죄를 씻어 버리는 제사가 되게 하심은 창조주로서 또는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돌보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심이요 우리에 대해 스스로 짊어진 의무를 다하심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에 대한 선포, 곧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된다. 즉,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하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노릇 해 주심 곧 은혜가 드러난다. 이 복음을 믿으면(받아들이면) 그것이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역사적 속죄 제사가 우리에게 효력을 발생하여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우리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불의 죄가 씻어지고, 그 죄가 초래한 하나님과의 갈등이 해소되어, 우리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된다. 곧 ‘의인’,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자’가 된다. 이것이 칭의, 의인 됨, 의인의 신분을 얻음이다.”
이렇듯 칭의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셨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칭의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등을 돌린 죄인들을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키셨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칭의를 바라볼 때 우리는 믿음 안에서 더욱 바라고 누릴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은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 해 주심을 힘 입어 살 수 있게 하였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 해심을 힘입어서서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축복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곧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지요.
칭의는 우리가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 해 주심에 의지하고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해 사는 관계에로 회복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를 통해 설명하자면 다시 아버지 품에 안긴 것입니다. 자기 멋대로 살겠다고 아버지께 등 돌리고 멀리 가 버린 아들이 곧 자신의 한계성에 빠져 죽음에 이르니까 아버지에게 돌아왔는데, 아버지가 어떻게 하였습니까? 그에게 반지를 끼우고 예복을 입혔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아버지는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떠난 아들, 불의한 아들을 자신의 상속자로 회복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을 배신한 아들에게 다시 자신의 부요함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도 못 먹어 죽어가던 아들은 이제 다시 아버지가 베푼 잔칫상에서 살찐 송아지 고기를 먹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칭의가 가진 관계적인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롬 5:10-11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바울이 우리에게 전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제물이 되어 우리 죄를 위하여 드리신 속죄의 제사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기 위한 제사였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자들에게 하나님과의 이 샬롬의 관계를 누리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를 통해 설명하자면 아버지의 환대를 받아 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끼워주신 반지와 우리에게 입혀주신 예복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아버지께서 베푸신 잔칫상에서 맘껏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된 모든 자들에게 환대하시며, 끝없는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자들에게 언제나 하늘의 잔칫상이 허락됩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믿음으로 받아 누리십시오.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고,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십시오.

의무의 회복

이 하늘의 잔칫상, 은혜의 식탁 앞에 우리가 다 함께 둘러 앉아 마음껏 먹고 마시며 기뻐하고 즐거워할 때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된 모든 자들에게는 이 은혜와 축복에 참여해서 영생을 누리는 특권이 주어짐과 동시에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이어가기 위한 의무와 책임이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은혜와 축복을 누리지만 의무와 책임은 지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취사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들은 본래 아버지의 부요함을 누리며 살던 자였습니다. 그가 아버지와 올바른 관계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아들이 아버지의 권위와 뜻에 순종하기를 저버리고 아버지와의 관계가 깨어지니 그가 머물게 된 곳은 어디였습니까? 아버지의 은혜와 축복을 기대할 수 없는 머나먼 곳, 주리고 목마른 영혼을 채울 조금의 양식도 구할 수 없는 곳입니다. 오직 그가 회개하여 아버지 앞에 돌아가 다시금 아버지의 권위와 뜻 아래에 순복했을 때에 다시 아버지의 부요함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아버지의 권위와 뜻에 순종하기를 저버림으로 아버지와의 관계를 깨뜨리고 아버지의 집을 박차고 나아가는 자들에게는 은혜와 축복의 식탁이 멀고도 멉니다. 오직 아버지의 권위와 뜻에 순종하며 아버지 앞에 머무는 자들에게만 이 은혜와 축복의 식탁이 가깝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우리 하늘 아버지의 자녀로 살아가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 앞을 떠나 고생하고 방황하는 우리를 찾아 하나님께로 데려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당신과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스스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그저 죄의 용서만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희생 덕분에 우리가 하나님께 무죄 판결을 받고 죄를 용서받은 것이 맞습니다만, 그것은 더 큰 목적을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이 모두 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잔칫상에 둘러 앉아 마음껏 먹고 마시며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도록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무죄 판결을 받고, 죄를 용서받은 곳에서 더 나아가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잔칫상에 이르지 않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죄를 용서받아 관계를 회복할 길이 열렸는데, 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품을 향해 달려나아가지 않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희생을 의지하여 나아가는 자마다 하나님은 더 이상 판사가 아니라 아버지가 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돌아온 자녀들을 위해 당신의 모든 부요함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십니다. 모든 은혜와 축복을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도록 잔칫상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곳에 참된 기쁨과 즐거움이 넘쳐 흐릅니다. 소진되거나 변하는 일이 없이 영원토록 넘쳐납니다.
왜 세상의 헛된 것들을 탐하며 이 하늘의 잔칫상 앞을 떠나려고 합니까? 왜 아버지의 권위와 뜻에 순종하기를 저버리고 아버지를 떠나 스스로 고생길을 택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그토록 미우십니까? 아니면 죄악이 그토록 달콤해 보이십니까? 우리는 한 번 하나님을 떠나 본 사람들 아닙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서 멀어져 우리의영혼을 채울 조금의 양식도 구하지 못한채 주리고 목말라보지 않았습니까? 어떻게든 세상의 것들로 채워보려 했지만 결국에는 더욱 공허해지고야 마는 그런 삶을 살아보지 않았습니까? 온갖 추악한 것들로 때묻고 더럽혀져 어둠 속에서 비참하게 살아보지 않았습니까? 그런 말로 다 표현 못할 밑바닥의 삶을 살다 다시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순간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습니까? 아버지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와 축복이 얼마나 감사했습니까?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다시 하나님 앞을 떠나려고 온갖 죄악과 다시 한 번 손을 잡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도무지 하나님과의 관계는 생각하지 않고 그저 죄의 용서만 반복해서 구하는 사람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없습니다. 그는 그저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용해먹는 사람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칭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된 자, 칭의된 자에게는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이 특권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한다는 의무와 책임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오직 오직 아버지의 권위와 뜻에 순종하며 아버지 앞에 머무십시오. 그래야만 은혜의 식탁에서 영원토록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날마다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십시오. 오직 그런 자들에게만 영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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