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0:2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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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합시다. 22절
#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합시다. 22절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이 다윗에 대한 살의를 품음 것을 확인하게 될 경우에는 다윗에게 네 길을 가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요나단은 다윗에게 이렇게 말해요. 22절에서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셨기 때문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겠다’는데 사람이 어떻게 막겠냐는 거예요. 요나단의 눈에는 이게 보였습니다. 다윗이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사울을 피해 도망하는 상황까지도 하나님께서 준비하셨다는 것을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 새벽 설교를 통해서 요나단은 이 모든 일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확신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주 자연의 섭리와 개인의 생활 그리고 세상 역사에서 나타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사는 모든 영역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는 영적인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섭리 속에 역사하신 대로 우리는 순종하기 위하여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바꿔 말하면 섭리를 발견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뜻을 먼저 분별하는 자가 됩시다. 30-31절
# 하나님의 뜻을 먼저 분별하는 자가 됩시다. 30-31절
하지만 사울에게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볼 영적인 눈도 없었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마음도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30절에 보면, 사울이 요나단에게 격하게 화를 냅니다. 그리고 한다는 말이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하면서, 아들 요나단마저 다윗을 새로운 왕으로 인정한 것에 대해서 “이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라면서 극도의 증오심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어미의 나체를 언급하는 것은 오늘날까지도 중동 지역에서는 최악의 욕설로 취급할 정도입니다. 사울의 이런 행동은 다윗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 때문인데, 이제는 도를 넘어서 자신의 아들마저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 정도의 비정상적인 상태를 보여주고 있어요. 여러분 하나님이 그 사람을 포기하시고, 사단에게 넘겨졌을 때,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품을 수 있는 사악함에는 끝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완전히 자기중심적이 되고, 이기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서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분별할 의지가 없게 되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다윗을 죽이고, 자기의 왕권을 견고히 하려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목표지향적이 되는 것이죠. 목표지향적 신앙은 절대로 건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루고자하는 뜻에 조금만이라도 사람의 뜻이 희석되는 순간 그 목표와 목적은 순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 건축이요. 교회를 새롭게 세운다는 미명 아래, 사람의 영광을 추구하고, 업적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으로 뒤엉켜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누구를 돕는 것도요. 정말 선한 의도로 시작했던 것들이 어느 순간 목표와 목적을 이루려고 정말 고려되어야 하는 ‘그 사람’은 온간데 없이 일만 남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재정도 쓰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잘 쓰는게 중요한 겁니다. 어떻게 쓰는게 잘 쓰는 건지 고민해야 하는 거예요. 어떻게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요.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서 하나님 자녀로서 먼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이 다면 단호히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걸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나의 욕구로 인하여 하나님 마음 뜻을 외면해 버리면 우리도 얼마든지 사울과 같은 모습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지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보다 자기 손에 들어온 왕으로서의 왕권과 모든 누려온 것들을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마저도 방해물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 옳고 그름을 확실히 합시다. 32절
# 옳고 그름을 확실히 합시다. 32절
요나단이 보여준 모습 속에서 분별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이 격노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하면서 항변하고 있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을 아꼈던 아들이었어요. 하지만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분위기 속에서도 옳고 그른 것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했고, 그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잘못된 것에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할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뒤에서 불평이나 하는 비겁한 사람들을 봅니다. 앞에서 말하면 봉변이라도 당할까봐 뒤에 숨어있는 거예요. 앞에 나설 용기라도 있으면 비겁하다는 말이라도 안 듣겠죠. 하나님의 뜻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별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NO!”라고 할 수 있는 영적인 용기조차 없어서 앞에서는 슬그머니 빼다가 뒤에서 불평합니다. 우리에게 언제라도 옳고 그름을 확실히 분별해야 할 때가 옵니다. 그것이 도덕적이든, 윤리적이든 말이죠. 무엇보다도 단호하게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진정한 우정을 나눕시다. 41-42절
# 진정한 우정을 나눕시다. 41-42절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이길 각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이제 다윗을 도망가라는 표시로, 약속한 들에 나가서 화살을 쏩니다. 이 표시를 확인하고 다윗은 요나단에게 다가와 땅에 엎드려 세 번 절을 합니다. 일반적으로 땅에 엎드려 얼굴을 숙이는 자세는 왕이나 왕자에게 경의와 예우를 갖추어 하는 절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절은 그런 형식적인 경의나 예우의 표시가 아니라,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목숨을 구해 준 생명의 은인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습니다. 그리고 요나단도 다윗에게 평안의 인사를 전합니다.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라고 인사하면서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사람 사이에 하나님을 향하는 뜨거운 믿음이 있었기에 서로를 존경하고, 서로를 위해서 희생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헤어져야 했지만 요나단은 두 사람 사이에 여호와께서 영원히 함께 계시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교제가 이런 것입니다. 그저 한 번 만나 희희덕거리다 헤어지는 일시적인 교제는 세상 어디에서라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의 교제는 하나님을 믿는 같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뜻을 서로 분별하고, 그 분의 뜻에 순종함으로 하나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오늘 아침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이렇게 기도합시다. 오늘 하루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이뤄지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를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볼 영적인 눈도 없었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마음도 없었던 사울의 모습이 이 세상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우리도 그 길에 서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요나단이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하고, 그 뜻에 순종하려고 생명의 위협마저도 불사했던 모습을 배웁시다. 잘못된 것에 말할 수 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