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 기대어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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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근동에서의 ‘아버지’의 의미는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주로 신(神)에 대해서 사용되어지며, 통치자나 가장(家長) 등에 대해서 지칭되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약 성서에서‘ba; (’ābh)’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그 용례를 구분하자면 다음과 같다. 용어의 활용과 그 쓰임에 따라서 구분하자면, a 할아버지라는 의미29), b 선조 또는 조상이라는 의미30), c 삶의 방식의 착안 자 내지는 창시자를 의미하는 경우31), d 특별히 정직하여서 존경 할 만 한 사람에 대하여32), 선생이나 예언자에 대하여33), 제사장에 대하여34), e 특정한 장소에 있어서의 보호자 또는 돌보는 자를 의미하는 경우35), f 조언자(counsellor)36), g 창조자를 의미하는 경우37) 등이 있다.
이스라엘의 가족공동체에서 ‘아버지’는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다. 그는 가정의 수장이요, 아이들에게 명예와 두려움을 가르치는 자이다.
아비가 그 가족과 자녀에 대해서 갖는 의무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하게 서술하고 있다. 자녀를 구원해야하는 의무53),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자녀에게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줄 의무54), 그의 자녀들을 가르쳐야 할 의무55), 자녀를 올바른 길로 인도할 의무56), 자녀를 지혜롭게 가르치고 그의 아내를 기쁘게 해 줄 의무57), 자녀를 교육함에 있어서 적절한 형벌로 지적을 할 의무58)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지혜문서에서도 아버지의 의무와 함께 자녀들이 그의 아버지의 말에 경청할 것과 그를 존경할 것을 함께 명하고 있으며59), 그의 부모에게 기쁨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60).
결론적으로 구약 성서에서는 그들의 조상이나 왕들, 또는 스승,선지자, 지도자 등에 대해서 ‘아버지’라는 개념을 즐겨 적용하였다. 또한 하나님에 대해서 ‘아버지’라고 지칭하는 것은 소수의 경우에 한정되어있으며,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성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직접적으로 부르는 것은 아주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특별히 개인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한 번도 없었다. => 반론의 여지 있음
첫째, 위의 논의에서 살펴보았듯이, 초기유대문헌에서는 기도 중에 하나님에게‘아 바’를 사용한 예를 찾아볼 수 없다. 둘째, 유대문헌에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 들 중에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일상적으로‘아버지’나 ‘아바’라는 호칭을 사용한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셋째, 유대문헌은 신약에서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 언어 사용 빈도가 급증한 원인을 설명할 수 있는 납득 할만한 역사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넷째, 유대문헌은 초기기독교에서 복 음서가 처음 기록될 때부터 후기 복음서들(마태, 누가복음)이 기록될 때까지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 언어의 사용 빈도가 급증한 원인에 대해 적절한 설명 을 하지 못한다.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인간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인간
인간은 본래 혼자서는 살 수 없고,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어려서는 부모에게 기대어 살아가고, 성장하면서는 친구와 스승에게 기대어 살아가고, 결혼을 해서는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며, 늙어서는 자녀에게 기대어 살아갑니다. 의지하는 대상이 달라질 뿐이지 누구에게나 사람이라면 기댈 곳이 필요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인간이 이러한 존재이기 때문에, 만약 누군가가 그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 큰 문제가 생기게 되지요. 예를 들어볼까요? 어린 시절의 우리에게 부모님이 없었다면 우리는 말 그대로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정말 불행하고 슬픈 일입니다만, 여러가지 이유로 부모를 잃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에게 부모의 역할을 해준 누군가가 있었기에 충분히 보호받으며 충분히 공급받으며 살아온 것이 분명합니다. 부모없이 스스로 밥을 챙겨 먹고, 대소변을 가리고, 씻으며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아기란 없으니까요. 또 학창 시절의 우리에게 친구와 스승이 없었다면 우리는 정상적인 사람으로 자라나지 못했을 겁니다. 친구가 있었기에 사회성을 기를 수 있었고, 스승이 있었기에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 그리고 도덕성 같은 것들을 기를 수 있었습니다. 또래의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서도 스스로 사회성을 기를 수 있는 학생이란 존재하지 않고, 스승의 가르침 없이 스스로 성숙한 인간으로 자신을 발달시킬 수 있는 학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 예를 들며 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인간이라면 의지할 사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전통적인 사회의 질서가 붕괴되고, 중요하게 여겨지던 미덕들이 더이상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게 되면서 점차 우리에게는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줄어들어 갑니다. 예수님께서 말세에 마 24: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라고 말씀하신 것 같이 말이지요. 이전에는 고아원이라 불렀고, 지금은 보육원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습니다. 2020년 통계에 따르면 전국에는 200여 개의 보육원이 있고, 약 2만 명의 보호아동이 있다고 합니다. 한해에 대략 4천명의 신규 보호아동이 보육원에 입소를 하고, 2,500명의 기존 보호아동이 보호기간이 끝나 보육원에서 퇴소를 한다고 하니, 소위 고아들은 해가 갈수록 더욱 늘어만 가는 것이지요. 충격적인 것은 어쩔 수 없이 보육원에 입소하게 된 케이스 즉, 부모의 사망 혹은 질병 혹은 실직의 이유로 돌볼 사람이 없거나, 미아가 된 경우를 다 합쳐봐야 전체의 15%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85%의 경우에는 학대로 인한 부모와의 격리, 미혼부모의 자녀 혹은 혼외자녀, 부모의 이혼, 자녀 유기 등으로 인해 보육원에 맡겨진 것이지요. 물론 보육원이 있고, 보호아동을 자기 자녀같이 돌보시는 훌륭한 분들이 있어 참 다행입니다만, 이 아이들이 안고 살아가는 정서적, 경제적, 사회적 상처와 아픔을 그 누가 다 헤아리며, 달래줄 수 있겠습니까?
따돌림의 문제도 더욱 심각해져 갑니다. 2019년 통계를 기준으로 초-중-고등학교 전체의 학생 중 1.6퍼센트가 심각한 수준의 집단 따돌림이나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는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해마다 0.3퍼센트 정도, 그중에서도 초등학생의 경우에는 0.8퍼센트씩 피해 규모가 증가한다고 하네요. 0.3퍼센트라고 하니 숫자가 되게 작아보일 수 있는데요, 0.3퍼센트는 곧 만 명입니다. 한 해에 만 명씩 왕따가 늘어난다는 거예요. 따돌림을 당하는 이유도 충격적입니다. 외모, 성격, 가난, 장애를 이유로 따돌림을 당한다고 하니 생각만 해도 마음이 참담합니다. 물론 모든 아이들이 이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이 아이들이 안고 살아가는 상처와 아픔을 또 누가 다 헤아리며, 달래줄 수 있겠습니까?
점차 부모라는 기댈 곳, 친구라는 기댈 곳이 사라져가는 이 시대의 아픔과 상처를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이 해결할 수 있을까요? 여전히 이 시대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겠습니까?
조금 더 우리에게 와닿는 이야기로 화제를 바꾸어 봅시다. 몇 년 전부터 우리 사회를 정확하게 분석한 일명 수저론이라는 것이 많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계급이 구분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은 다 청년들이고, 청년이 성인의 삶을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사실 돈에 직결되어 있습니다. 대학생같은 경우에는 대학 등록금부터 시작해서 생활비에 이르기까지 대학 생활 동안 들어가는 돈이 정말 만만치 않은데요, 여기 있는 대학생 중에 4년 동안 필요한 자금을 모아서 학교를 등록한 사람이 있나요? 아마 아무도 없을 겁니다. 국가에서 일부 보조해주는 돈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자금은 부모님께서 대신 해결해 주는 경우가 대부분일 겁니다. 자, 어찌저찌 부모님께서 도와주셔서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도 무난하게 잘 되었다고 가정해봅시다. 사회생활을 위해 그에게 이제 차가 필요해지는데요, 이제 막 취업한 그에게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할부의 노예가 되거나 부모님께서 해결해주시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자, 또 어찌저찌 부모님께서 도와주셔서 차를 끌면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이제 결혼을 준비한다고 해봅시다. 결혼생활을 위해 그에게 이제 집이 필요해지는데요, 직장인 월급으로 어떻게 바로 집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또 다시 할부의 노예가 되거나 부모님께서 해결해주시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지극히 일반적인 청년들의 경우, 내가 바라고 원하는 대로 필요한 것들을 갖출 수 있을만큼의 지원을 받는게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청년들은 쓰린 가슴을 안고 많은 것들을 포기하죠. 연애, 결혼, 출산, 꿈, 희망 같은 것들 말입니다. 갈수록 경제력의 격차가 벌어지는만큼 높아지는 현실의 벽 앞에에서 기대고 의지할 대상 없이 쓰러져 가는 것이 이 땅의 청년들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암울한 시대에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소망이라 고백할 수 있을까요?
기도를 가르쳐주심
기도를 가르쳐주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기도라는 것은 신앙의 액기스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요, 당시 유대교에서 랍비라 불리는 스승들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어서 신앙에 대해서 교육하곤 했습니다. 눅 11: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세례 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구요, 또 당시 회당에서 어느정도 정형화된 기도문이 흔히 가르쳐지고 고백되곤 했는데, 이를 카디쉬 기도라고 합니다.
“그분의 이름이 높여지고 거룩히 여겨지이다
그분이 그분의 뜻에 따라 지으신 세상 안에서.
그분의 자신의 나라/ 다스리심이 다스리게 하시길
너희들의 생애에 그리고 너희들의 날들에 그리고
이스라엘 집안 전체의 생애에, 신속히 그리고 조만간.
그분의 위대한 이름이 영원에서 영원까지 찬양되소서.
이에 대해 말하라. 아멘."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에 따라 지으신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신 이름이 높여지고 거룩히 여겨지게 하소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우리의 생애와 날들에, 이스라엘 집안 전체에 세워지게 하소서. 속히 그리고 조만간. 하나님의 위대하신 이름이 영원에서 영원까지 찬양을 받으소서. 아멘.”
당시 유대인들이 드리던 기도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는데요, 지금부터 그 차이를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우리가 첫번째로 만나는 단어는 아람어 ‘아바’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르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직역하면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빠”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아빠(아버지)’는 아람어 ‘아바’로 당시 어른들이 그들의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했던 표현입니다. 한국인들의 일상 표현대로라면 ‘아빠’보다는 ‘아버지’가 더 어울리는 표현이었을수도 있겠습니다. 어찌되었든 어른이 된 자녀가 자신의 아버지를 친근하게 불렀던 표현법이며 사람과 사람사이에 사용하던 호칭입니다.
하지만, 이 ‘아바 하나님’은 신구약 성경에서는 흔하지 않은 아주 독특한 표현법입니다. 당시 유대인의 사고 방식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용되던 ‘아바’를 하나님을 향한 호칭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당시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는데요, 아들이 아버지께 친근하게 부를때 썼던 표현법을 하나님께 사용한다는 것은 신성모독과 같기 때문입니다. 성경이나 다른 문헌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곳이 몇구절 등장하긴 하지만,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는데는 사용하지 않았으며,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 혹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왕 사이의 관계에서만 사용되었습니다(신 32:6; 사 63:16; 사 64:8; 렘 31:9; 시 89:26; 말 2:10). 이런 경향을 보면 구약의 저자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호칭하는 것을 얼마나 조심스러워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지요. 이런 점을 고려하면 당시의 일상어인 아람어로 ‘아바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예수님의 발언은 이스라엘에게서 혁명적인 표현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우리가 호칭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절대자, 제 1 원인, 전능자, 창조주, 자비를 베푸시는 분, 영원하신 분, 신… 등등 우리는 무수한 말로 하나님을 부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말들에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의 일부가 담겨 있으며 하나님에 대한 풍요로운 경험, 깊은 이해와 이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오직 이 ‘아버지’라는 말이 담고 있는 것이 있지요. 다른 개념은 담아내지 못하는 친밀감, 사랑이 이 말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 기도를 배우는 자들은 얼마나 복된 자들인지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왕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렸고, 심지어 그들도 하나님을 자기 육신의 아버지를 부르는 것 같이 부를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기도를 배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큰 선물이며, 모든 위로, 기쁨, 능력의 원천입니다.
세상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능력과 부와 지혜가 끝이 없으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신다면 우리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께 기댈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어떤 상처보다 더 깊고, 하나님의 지혜는 어떤 문제보다 더 뛰어나며, 하나님의 부요함은 어떠한 부족함보다 더 풍성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고백하며 아버지께 기도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아낌없이 베풀어주시지요. 그러니 절망적인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소망이 되십니다. 예수님께 기도를 배워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를 나눌 때에 우리는 어떤 현실의 벽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기댈 곳 없어 상처입은 모든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은 여전히 소망이 되십니다. 예수님께 기도를 배워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를 나눈다면 그 누구라도 다 회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혹 나는 지금의 삶이 너무 충분하고 만족해서 다른 기댈 곳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인간에게는 반드시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모든 것이 사라져버리고 마는 때가 오게 됩니다. 늙거나 병들거나 사고가 나서 이제 그의 삶이 꺼져갈 때 그가 그동안 의지하고 기대왔던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 순간 그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은 부모, 친구, 배우자, 돈과 같은 것들 중에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그런 순간에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기대고 의지할 만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죽음 이후의 삶도 다스리시는 산 자와 죽은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이 기도를 제대로 배우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귀하고 복된 일임에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기도를 시작하는 말일 뿐 아니라 기도가 놓인 바탕 그 자체입니다. 이 말은 다른 모든 간구를 가능하게 하며 그 모든 간구에 의미를 불어 넣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이 첫 번째 말에 우리 신앙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이 호칭에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그럼으로서 우리 모든 기도가 하늘로 들어 올려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로 우리에게 이 말을 주셨습니다. 주의 기도를 여는 이 말은 하나님의 자녀됨에 대한 기쁨에 찬 확신이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