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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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 성경 배경 설명

유대인의 왕을 질투하는 헤롯 3v.

왜 세상은 예수님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는가? 세상은 예수님의 탄생을 싫어한다. 그래서 온갖 소동을 일으켜 안티 크리스챤들을 세운다. 예수님이 싫어하는것들을 앞 세운다. 죄, 동성애 와 같은 죄들을 합법화 시킨다. 그리고 사람들을 내세워 동조하도록 하는것을 의미 한다. 왜 세상은 이처럼 예수님의 탄생을 소동하는것일까? 소동하다라는 뜻의 헬라어 로는 흔들다, 떨다, 괴로워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마치 배가 심한 파도에 흔들리는것을 말한다. 이처럼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리는것을 의미 한다.
Lexham 성경사전 망상과 폭정

헤롯은 10 명의 여자와 결혼하여 15 명의 자녀를 낳았다. 아내들의 이름은 도리스, 마리암네 1세, 마리암네 2세, 말다게, 클레오파트라, 팔라스, 페드라, 엘피스였다(나머지 두 아내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는다; Packer, Nelson의 Illustrated Encyclopedia, 635).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롯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아내 마리암네 1세에 대해 매우 방어적이어서, 그가 여행 중에 어떤 일이 생기면 그녀를 죽이라고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젊은 하스모니아 유대인과 결혼한 헤롯의 동기는 부분적으로는 유대인들의 인정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아름다웠던 마리암네 1세는 분을 참지 못하는 성질에, 터놓고 말하는 기질이었다고 한다.

헤롯이 마리암네 1세의 부모를 모두 죽인 후, 그녀의 반박과 그의 누이의 바람으로, 그는 그녀를 재판 받고 처형당하게 했다. 그녀가 죽은 후 헤롯은 완전히 정신이 나갔고, 병에 걸렸다. 나중에 헤롯은 왕국 통치자인 자신의 지위를 놓고 다툰다는 의심을 받은 마리암네 1세와 낳은 두 아들,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블루스를 처형하도록 명했다

헤롯은 왕국을 잃을까 염려하는 망상적인 폭군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를 싫어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이끌 유대인의 왕이 태어난다는 소식은, 마치 타는 불길에 기름을 던진 듯한 꼴이 되어 버린것이었을것이다. 그리고 헤롯왕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왕위 자리를 위협하는자로 느껴졌을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로마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반기를 드는 수장으로 생각할수도 있다.
그렇다면 정치적인 헤롯왕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이 소동 즉, 백성들의 흔들림을 막기 위해서는 그 태어난 아기 예수를 찾아서 죽임으로 인해서, 소동을 잠재워야만 했다.
Lexham 성경사전 신약 성서에 미치는 영향

헤롯의 영향력과 그의 질투를 반영한다. 라이벌 "유대인의 왕"을 찾으려는 그의 시도는 베들레헴 지역의 무고한 아이들을 살해하는 결과를 낳았다.

무엇때문에 이렇게 해야만 했을까?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였고, 현재 위태로운 로마의 신임을 계속 받기 위해서는 유대인의 왕의 탄생에서 시작된 소동을 바로 잡아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육신적인 우리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우리는 왜 언제 소동을 일으킬까? 언제 우리의 마음이 흔들릴까? 우리가 무엇인가에 미쳐있을때, 우리는 질투하기 시작한다. 우리 역시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친구도, 사랑도, 우정도 버린다. 헤롯왕 역시 그랬다. 우리는 헤롯처럼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것이라고, 말하지만, 권력 앞에서 개가 되면, 우리 역시 헤롯처럼 행동하게 될것이다.
왜 우리는 이토록 누군가를 질투하고, 미워해야하는 삶을 반복하게 되는것일까?
내가 가지지 못한것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마치 교회에서 어떤 여자 아이가 한 남자를 혼자 좋아하는데, 어느날 그 남자는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 그러면 첫째 여자는 둘째 여자와 남자가 함께 있는 꼴을 못보기 때문에, 결국 상처를 받아 교회를 떠나간다. 왜 그럴까? 바로 질투 때문에 그렇다. 자신에게 없는것을 다른 사람이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가지 이야기가 있다. 바로 백설공주 이야기이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공주님 이십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다시 한번 묻습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그랬더니 거울이 대답하는 말이, 백설 공주가 제일 예쁘십니다. 라는 대답에 독이 든 사과로 죽이려고 했다.
이처럼 어떤 사람은 내가 가지지 못한 다른것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의 물건을 도둑질하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모든것이 질투로 부터 시작된다. 성경에서 죄의 시작 역시 질투로 시작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하셨던, 선악과를 먹게 된것 그 시작은 뱀의 말이 하나님을 질투하도록 만드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창세기 3:4–5 NKSV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가지지 못한것에 대한 서러움이 나를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릴때 먹고 싶은것을 못먹었던 아이는, 다 자란 성인이 되어서도 먹는것에 대한 탐심이 크다. 내것을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방법을 모른다. 또 어떤 사람은 어릴때 오토바이를 타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위험하다고, 반대해서 타지 못했는데, 성인이 되어서, 그 욕망을 풀기위해 돈을 벌어서 오토바이를 산다.
모든것의 시작이 질투로부터 시작된것이다. 어쩌면 질투라는것을 잘 사용하면, 경쟁심을 일으켜서 우리를 유익하게 만들수도 있다. 하지만, 이익보다는 손해가 더 큰것이 바로 질투라는것을 기억 해야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질투하는 또 다른 이유는 다름의 차이점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서로가 좋아서 결혼한 사람들이 질투를 하고, 싸우고, 헤어지는걸까?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살아왔어, 그러니까 너는 내 삶에 맞춰야되 라고 말한다.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이 강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만한 마음의 여유가 자신 속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싸우고, 사랑했던 사람이 원수로 변하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서 말한 유대인의 왕이라는 단어가 사람들을 혼돈스럽게하고, 소동이 일어날만한 것이라는것을 확실하다.
세상의 왕은 하나 이여만 해… 라는 생각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유일신 하나님을 섬긴다. 한분이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과 성령님 역시 같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게 되었다. 마치 우리의 몸이 하나이지만, 각 부위의 명칭이 다른것과 같다. 그렇지만 부르는것이 다르다고 해서, 우리 몸이 아닌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도 마찬가지로 한분 하나님이시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교회가 우리의 몸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그 몸의 머리는 예수님이시고, 우리들은 각 지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혈통과 살아온 배경은 다르지만, 우리는 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로가 다른지만, 다른것이 틀린것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는것이다. 서로를 인정하면 기적과 같은 역사가 되지만,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면, 소동이 된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면, 만나기만하면 싸움이 일어나고, 만날때마다 마치 서로를 죽일듯이, 물어뜯어 공격 한다.
너 나하고 생김새가 달라, 너는 태국 사람이 아니야 라고 말한다. 하지만, 엄연하게 산 사람들도 태국 사람에 속한다고 태국 정부에서 인정했다. 왜 그럴까? 사실 온전한 태국 사람은 아니지만, 차이점을 받아들여서 태국 국민으로 인정해 준것이다.
나도 하나님의 자녀, 너도 하나님의 자녀, 하지만, 하나님은 나만 사랑하셔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것과 같다. 성경에서 유대인들도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성경은 부부를 가리켜서, 서로를 돕는 배필이라고 말한다. 나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 또는 내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도구가 아니라, 내가 가지지 않는 부분을 서로 채워서 나를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것이 바로 부부이다.
이처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할때, 우리는 서로 하나가 될수 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때 우리의 생각은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것을 깨닫고, 배우게 된다. 이런것은 아무리 옆에서 누가 가르쳐주고, 말해줘도 절대로 깨닫지 못한다.
이처럼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갈때, 서로의 다른 차이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은다면, 우리는 결코 사회 생활을 할수 없게 된다.
적응하지 못하고, 세상의 낙오자가 된다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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