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른다

사도신경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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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무도 알 수 없는 재림의 때 2. 목적은 무엇인가 3. 어떻게 아는가? 4.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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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도신경 8번째 시간입니다. 여러분 가온누리 유튜브가 아주 조금 리뉴얼 되었어요. 일단 예배가 더 이상 실시간으로 송출되지 않아요. 하지만 예배 후 주일 저녁 혹은 다음 날 설교영상만 따로 올라가요. 그리고 1분 묵상도 올라가고 있구요.
이것 저것을 시도하는 이유는 여러분 때문이에요. 작년 11월에 저 왔을 때 구독자 90명정도 였는데 지금은 거의 150명이 다되어 가더라구요. 여러분이 그만큼 말씀 등에 관심을 갖는 것이라 생각해요.
주중에 유튜브에 올라간 설교를 다시 듣는 것은 쉽지 않지만 그 관심만큼 듣기 위해 노력했으면 좋겠어요. 설교가 너무 길면 2배속으로 들어보세요. 꽤 들을만 하더라구요? 2배속도 힘들다. 그러면 1분 묵상을 통해 들었던 말씀을 다시 리마인드하면서 하루를 살아가세요.
삶에서 말씀을 기억하고 새기고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 가온누리가 되기를 바라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 흠뻑 젖어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해요.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오늘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고백을 함께 살펴보려 해요. 이 고백을 이해하려면 우리 3주 전에 나눴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을 떠올려야 해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곁으로 돌아가셔서 ‘우편에 앉으셨어요.’
어떻게 보면 구원 사역을 이루어 내셨기에 그냥 쉬셔도 되는데 우리를 위해 성령님을 보내시고 또 우리를 위해 그 자리에서 기도하고 계신다. 나눴었어요. 예수님의 평생의 기도제목이 바로 나. 여러분이기에 쉬지 않고 끊임없이 말할 수 없는 탄식함으로 기도하고 계셔요.
그리고 이스라엘의 혼인에 대해 나누었었어요.
이스라엘의 혼인이 어떻게 이루어진다 했었죠? 신부 집에서 결혼 승낙을 받으면 신랑은 집으로 돌아가 신부와 함께 살 신방을 준비하죠. 신방이 다 준비되어도 신랑은 신부를 데리러 갈 수 없어요. 아버지께서 허락을 하셔야,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 판단되었을 때 신부를 데리고 오도록 허락하시죠.
아버지가 허락하는 그 때는 아무도 알 수 없어요. 오로지 아버지 마음이에요. 아버지 마음에 달려 있어요.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이 고백이 바로 결혼할 준비가 된 신부를 신랑이 불시에 데리러 오는 것을 이야기 해요.
‘저리로서'라는 이 표현 좀 어색하지 않나요? 우리는 이런 표현을 잘 쓰지 않잖아요. 이것도 번역이 되면서 이렇게 표현이 된건데요. 저리로서는 거기로부터 라는 표현과 같아요.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거기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라는 것이죠.
여기에서 말하는 거기에서하나님 보좌 우편이에요.
세상을 다스리고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고 우리와 함께 살 거처를 준비하고 계시던 그 곳. 그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향해 말할 수 없는 탄식함으로 눈물을 흘리며 우리에게 눈을 고정하고 기도하시던 그 분께서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바로 일어나셔서 우리에게 내려 오실거에요.
여러분이 매주하고 있었던 이 고백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예수님이 다시 오는 그 때 “재림”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표현하고 있었던거에요.
사실 성경에 ‘재림'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아요. 하지만 다르게 표현이 되는데요. 신약성경을 보면요. 강림. 나타나심. 드러나심. 오심이라고 표현이 되어있는데, 이러한 표현이 318번이나 등장해요.
‘주님은 다시 오신다.’라는 표현27권 신약 성경에서 25절마다 한번씩 등장하는거죠. 그러니까 신약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그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었다는 것이죠.

오시는 목적과 이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 재림하신다. 왜 오실까요?
에수님께서 이 땅에 처음 오셨던 이유가 무엇이었죠? 엄청난 스캔들을 감수하고 이 땅에 오셔야 했던 이유가 있었죠. 맞아요. 바로 죄 용서 때문이죠. 죄 용서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오셨어요.
신인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는요. 분명한 이유와 목적을 갖고 오시는거에요. 초림. 처음 오셨을 때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기 위해 오셨어요. 그리고 그 분이 다시 오신다 말씀하셨어요. 처음 오실 때처럼 분명한 목적을 갖고 다시 오겠다! 라고 하셨어요.
그 분이 다시 오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을 위해 다시 이 땅에 오시겠다고 하셨을까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오셔요.
처음 오셨던 목적이 용서와 구원이었다면 두 번째 목적은 심판하기 위해 오시는 것이죠.
정말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구세주로 모신 사람들은요. 그 심판의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무죄를 선고 받아요. 완전한 자유. 처음 지어졌던 아담처럼 원래 모습의 회복을 경험하게 되어요. 그리고 우리도 하나님 우편에 서게 되어요.
하지만 믿지 않는 자들은 심판자들은? 영원한 심판의 자리에 가게 되죠.
여러분 ‘신과 함께' 라는 영화봤나요? 거기 보면 지옥을 여러가지로 표현하고 있죠? 살인, 나태, 거짓, 불의, 배신, 폭력, 천륜 지옥. 이렇게 7개의 이름이 붙어 있어요. 그리고 그 곳에서 끝없는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영화에서 표현했어요.
이 지옥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상상력을 동원하여 만들어낸 장소에요. 하지만 소름돋게도 성경에서 말하는 지옥과 유사해요.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그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해 사람들은 지옥이라는 장소를 상상하고 만들어 냈어요.
성경에서 말하는 지옥은 이렇게 세세하지 않아요. 그리고 환생이나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하지 않아요. 하지만 같은 것이 하나 있어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분리되어 영원한 끊임없는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는 거에요.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의 역사관은요. 직선 사관이에요. 창조와 타락. 타락한 우리를 위한 구속과 예수님의 다시 오심. 우리들의 역사관은 직선이에요. 끝이 있는 그 날을 향해 달려가요. 그래서 전생이 없어요. 윤회. 다시 태어나지 않아요. 우리는 끝이 있어요. 종말론적 역사관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요.
하지만 세상은 다르죠. 순환사관이에요. 계속 돌고 도는거에요. 윤회 사상을 이야기 해요.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순환적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야 해요. 그래서 그들 스스로 열반의 경지에 오르려고 고행의 길을 걸어요. 스스로를 구원하기 온갖 수를 다 동원해요. 그래서 귀인이라는 표현을 만들어 지옥에 가야 하지만 기회를 부여해 다시 살아나 다른 인생을 살다 극락왕생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요.
윤회 그리고 극락왕생의 기회. 이것은요.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상의 시나리오에요.
그런데요. 여러분 정말 자력구원이 가능할까요? 정말 신과 함께의 내용처럼 귀인이 되면, 지옥에서 기회를 얻고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될까요?
저는요. 신과 함께의 내용처럼 그렇게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는 것이 진짜라면 전 믿지 않을거에요.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죽을만큼 힘들고 지치는데 죽어서 저승에 가서 귀인이라고 하면서 또 시험을 주고 그 시험을 통과하면 다시 살아나게 해준다는 것은 진짜 너무 한거 아닌가요?
살 때도 고통스러웠는데 죽어서도 고통스러워야 하면, 그 과정을 겪고 다시 태어난다해도, 세상은 여전히 고통스럽잖아요.
인생 자체가 희망 고문이에요.
살아도 고통 죽어도 고통 다시 살아나도 고통 죽어서 또 고통. 이 삶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말하는 윤회 사상의 약점이에요.
인도에 있었을 때요. 브라만 계급의 친구들이 많았는데요. 그 중에 진짜 초초초초초초 브라만 친구가 있었어요. 제가 인도에 처음 도착했을 때가 6월이었는데요.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45도였어요. 진짜 더워요. 그리고 땀도 많이 나요. 그리고 모기도 많아요.
모기 많으면 잘 수 있어요 없어요? 지금 사는 사택에도 3-12월까지 모기가 나오는데요. 저 작년에 11월에 이사왔을 때요. 눈이 왔어요. 근데요. 모기 때문에 잠을 못잤어요. 목사님들이 사택에 모기가 있다고 말 안해줘서, 무방비 상태로 물어 뜯기느라 잠도 못잤어요. 오자마자 모기 어택 당해서 정신이 없었는데요.
인도는 더 심했어요. 그냥 기숙사 제 방 전체가 모기 집 같았어요. 모기가 떼를 지어 다녀요. 그래서 제가 참다 참다 나가서 초강력 모스키토 킬러를 사왔어요. 그리고 모기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나타날때마다 에프킬라에 모기가 절여서 죽을 때까지 분사했어요.
여러분도 모기 나타나면 때려잡죠?
근데 이 초초초초초초초초 브라만 친구가요. 수업시간에 모기가 물어 뜯는데 허허 하고 웃고 있는거에요. 팔뚝에 모기가 우아하게 착지를 하고 착 입을 벌려서 팔뚝에 꽂고 피를 쭈욱 빨아드려서, 그 몸땡이가 빨갛게 변하고 있는데 그것을 보면서 허허 웃는거에요.
무슨 헌혈하는 사람마냥 평온하게 앉아서 모기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는거에요. 그래서 제가 “U must be crazy” 라고 하면서 왜 모기를 잡지 않냐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그 친구가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이 모기는 누군가 죽어서 모기로 태어난 것일꺼야. 사람이 모기로 태어났어. 얼마나 불쌍해. 그래서 잡지 않았어. 내가 이 모기를 죽이면 나도 모기로 태어날지 몰라. 나는 잡지 않을거야.”
제가 어떻게 했을까요? 피를 먹은 모기는 좀 둔해지거든요? 날아가는 모기를 때려 잡았어요. 그 모습을 보고 친구가 경악을 하며 소리를 지르면서 축복해줬어요. 이게 축복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 친구가 저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너는 반드시 모기로 다시 태어날거야.”
윤회 그리고 극락왕생의 기회. 이것은요.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상의 시나리오에요. 하지만 모기로 태어나는 것이 무서워서 모기를 죽이지 않는다면 저는 그 신을 믿지 않을거에요.
신이 되서 진짜 치사하잖아요. 모기를 그렇게 아끼면 사람인 나도 아껴줘야지. 난 물려서 간지럽고 고통스러운데, 그거 못하게 모기 잡았다고 모기로 태어나게 하면 진짜 쪼잔한 신이잖아요.
반면 우리의 진짜 신. 유일한 구세주 예수님은 어떠신가요? 모기가 대수인가요.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지금 이 순간에도 기도하고 계시죠. 그리고 때가 되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불러주실거에요.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러 오세요.심판의 근거는 오직 믿음이에요. 그리고 이 심판의 결과는 천국과 지옥 두 곳밖에 없어요.
예수님의 부르심. 그 초대에 응한 사람들은 천국에 가요. 그 초대에 응하지 않은 사람은 지옥에 가요. 아주 간단해요.
그리고 그 분의 심판은 단순하지 않아요. “너 천국" “너 지옥" 이런게 아니에요. 악과 선이 혼재한 이 혼탁한 세상에 악을 완전 섬멸. 흔적도 없이 날려버리실거에요.
심판의 중요한 목적은요. 악으로 인해 상처 입고 괴로워 하는 자들의 회복이에요. 하나님을 배신 한 피조물들에 대한 복수를 위한 무차별적이고 잔혹한 심판이 아니라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온전히 드러나는 그 심판이 목적이에요.
악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그 악 때문에 힘들어 했던 저와 여러분을 완전히 회복시키는 것 그것이 다시 오시는 이유이자 목적이에요.

어떻게 준비하는가?

하지만 언제 예수님이 오시는지 그리고 완전한 회복의 때가 언제인지 우리는 알 수 없어요. 그 시기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아셔요. 오늘 본문 24장 36절의 말씀처럼 오직 아버지만 알고 계셔요.
그래서일까요? 우리는 전혀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아가요.
오늘 본문들이 바로 우리와 같은 일반 사람의 모습을 정말 제대로 보여주는 내용이에요.
37-39절을 볼까요? 예수님께서 노아 시대를 예로 들며 우리에게 말씀하세요. 재림이 바로 노아의 방주사건 때와 같다.
노아는 120년동안 방주를 만들었죠. 노아가 120년동안이나 방주를 만들 것을 알았을까요? 120년 동안 물이라곤 보이지도 않는 산 위에서 방주를 만들던 노아와 그 가족들을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었을까요?
‘가족도 몇명 없으면서 왜 이렇게 큰 배를 만드냐? 배의 모양의 왜 이렇게 생겼어? 홍수 온데매? 근데 100년이나 지났어. 뭐야 오는거 맞아?” 등의 비난과 조롱이 분명 있었을거에요.
그런데 노아는 그 가족은 버텼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면서 계속해서 만들었어요. 방주가 완성이 되고 홍수가 터지기 전 하나님께서 그에게 짐승들을 태우라 하셨어요.
상상해볼래요? 갑자기 동물들이 산 위로 몰려 올라가요. 그리고 방주에 타요. 충격적이지 않나요? 영화와 같은 이야기 아닌가요? 말도 안되는, 줄을 서서 오와 열을 맞춰 들어가는 이 동물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웃기는 그 모습을 사람들이 봤단 말이에요. 알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들은요. 전혀 개의치 않았어요. 온각 동물들이 방주에 타는 이상하고도 기이한 장면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어요. 개의치 않았어요.
평소랑 똑같이 먹고 마시며 노아 가족들을 입에 오르내리며 조롱했을거에요. 38절의 말씀처럼 일상적인 삶을 살아갔어요.
노아의 가족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며, 언제 올지 모르는 홍수를 대비하고 기대하며 기다렸어요. 그렇게 그들은 하나님의 방향으로 걸어갔어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노아와 정반대의 길을 걸어갔어요.
노아와 같은 길을 걸아갈 수 있었어요. 120년간 한결같았던 노아의 모습 그리고 짐승들이 방주에 타는 것들을 비롯하여 사람들이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여러번 있었을거에요.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스스로 죽을 길을 향해 달려 갔어요. 하나님과 반대편으로 열심히 달려 갔어요.
제가 필리핀에서 선교사님 댁에서 지낼 때요. 밤마다 산책을 나갔어요. 그 곳에 산지 6-7개월이 지났을 때였고, 또 마을 사람들과 어느 정도 안면이 있을때라서 위험하지는 않았어요.
밤에 산책을 하는 중에 철문이 덜컹 덜컹 하는 소리가 나는거에요. 왜 덜컹 거리나 궁금한거에요. 그래서 그 집을 향해 걸어가는데요. 갑자기 철문이 열리면서 진짜 3-40kg 정도 되어보이는 세퍼트가 튀어나오는거에요.
세퍼트를 보니까요 눈이 이상해요. 근데 그 눈이 저를 향해 있어요. 그리고 저를 향해 미친듯이 뛰는거에요. 그거보고 저도 반대쪽으로 달리기 시작했어요. 근데 선교사님이 살았던 타운이 골목이 진짜 많았거든요?
물리지 않으려고 자동차들 사이 사이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나름 교란 작전을 펼치면서 진짜 최선을 다해 뛰었어요. 정신없이 뛰는데 알던 동네 사람들이 저보고 왜 뛰냐고 묻는거에요. 제가 말도 안하고 뛰니까 그들이 자연스럽게 뒤를 봤겠죠? 그리고 세퍼트가 달려오는 것을 그들이 봤어요.
마을 사람들이 달려들어서 세퍼트를 막아줬어요. 저는 살기 위해서 무작정 큰 길로 뛰었어요. 큰 길로 가야 제가 살 것 같았거든요. 만약 제가 뛰다가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갔다면? 아니 세퍼트가 달려오는 방향으로 뛰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 날로 개밥이 됐겠죠.
노아 시대 때 사람들이 이랬어요. 세퍼트가 나를 죽이러 달려오는데 그곳으로 같이 뛰어들었어요. 막다른 골목으로 스스로 들어갔어요. 아무런 생각도 없었고 분별력도 없었어요. 그래서 그들은 결국 홍수에 쓸려 내려갔어요.
예수님의 재림. 다시오심이 이와 같을거에요.
우리에게 분명 여러 징조를 보여주실거에요. 우리와 영원히 살기 위해 다시 오시는 것이 목적이기에, 우리에게 분명하고도 명확한 신호를 보여주실거에요. 하지만 우리가 정신 차리지 않고 산다면 그 신호를 절대 알아차리지 못할거에요.
오늘 본문 40-41절을 좀 더 보면요. 재림 때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세요.
밭에서 일하는 두 사람 중 하나만 구원을 받는데요. 맷돌질 하는 두 여인은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있는데요. 같은 어처구니를 잡고 돌리는데요. 한 사람은 구원을 받고 한 사람은 구원을 받지못한데요.
이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지는 말씀이에요. 미안하지만 우리가 깨어있지 못하다면, 깨어있으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면요. 우리는 밭을 갈고 맷돌을 돌리던 사람들 중 하나님 곁으로 가지 못한 그 사람이 되어버릴지도 몰라요. 우리 중에 그런 사람이 정말 있다면 얼마나 슬프고 속상한 일일까요? 어쩌면 여러분 전부는 하나님께 가고 제가 남는 사람이 될지도 모르죠.
이 말씀은요. 우리에게 정신차려라. 경각심을 가져라. 그렇지 않으면 너 구원 받지 못한다. 이런 협박을 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에요.
이 말씀은요. 분명한 목적을 갖고 살라고 말하는거에요. 분명한 삶의 목적을 갖고 살라는거에요.
실패해도 좋다. 넘어져도 좋다.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살아도 괜찮다.
하지만 하지만 포기만 하지 말아라. 힘을 내고 포기하지 마라. 감당할 수 있다.
나 때문에 힘들어하는 너의 그 마음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용기를 가져라.
포기만 하지 말아라. 내 손을 놓지 마라.
그것을 말하는거에요.

우리의 자세

하나님의 요청대로 포기하지 않는 삶을 살려면요. 우리는 3가지의 자세를 가져야 해요.
첫째. 지금 반응하는 것이에요. 더 이상 늦출 때가 아니에요. 혹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지속적으로 주시는 말씀. 혹은 어떠한 마음이 있나요? 있다면요. 지금부터 기도하세요.
그러한 마음을 주시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지금 이 시기. 이 때에 고민하게 하시지 않을거에요. 또한 그 고민이 몇년동안 지속되어왔다면 더 이상 지체하지 마세요.
기도하고 단판을 지으세요. 하나님께 주신 이 마음이 나의 욕심인지 아닌지 분별하게 해달라 요청하세요. 매달리세요. 그리고 그 결론을 내리세요.
노아 시대 때 사람들은 “홍수가 설마 일어나겠어? 그게 오늘이겠어? 비가 오는데 설마 저게 홍수겠어? 와봤자 얼마나 오겠어?”라 생각하다 홍수에 쓸려 내려 갔어요. 그게 오늘인지 모르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것을 하루 이틀 미루다 그대로 끝났어요.
밭을 매던 자. 맷돌을 돌리던 자들도 똑같아요. 예수님이 오실 날이 오늘일거라 예상하지 않았어요. 기대하지 않았어요. 아무런 목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반응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곁에 가지 못했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는 반응 할 때에요. 매달릴 때에요. 주시는 그 마음에 대한 고민과 해답을 달라고 강하게 하나님께 요청해야 할 때에요. 그리고 주시는 마음에 따라 움직이세요.
하나님은 한 가지의 길만 제시하지 않으세요. 우리의 삶에 다양한 선택지를 주셨어요. 기도하고 반응해서 선택지를 잡았다면 멈추지 마세요. 걸어가세요. 걸어가다 보면 잘못된 선택 같은 생각이 들거에요. 그럼 잘 가고 있는거에요.
기도하고 선택한 그 삶을 뒤흔드는 사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안이 끊기는 일들이 생긴다면 잘가고 있는거에요. 그 속에 하나님이 주실 은혜를 더 구하세요.
둘째. 매일 매일 여러분의 마음을 확인하세요.
여러분 미안한데요. 그렇게 계속 살아도 괜찮겠어요? 흔들리지 않고 버틸 자신 있어요? 하나님을 붙들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말씀도 읽지 않고 버틸 자신 있어요? 스스로를 위해 시간을 보내고 투자하는 것만큼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고 있었나요?
여러분의 마음을 확인하고 점검하기 위한 시간을 쏟고 있었나요? 저와 여러분의 믿음은 매일 흔들려요. 지금 이 순간에도 흔들리고 있을지 모르죠.
No turnings back. 돌아서지 않으리. 우리가 잘 아는 이 찬양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요.
인도에 어느 마을에서 일어났던 실제 이야기에요.
그 마을의 한 가족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어요. 이 일로 인해 마을 사람들이 화가 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그 가정을 마을 광장으로 거칠게 끌고 왔어요.
그리고 마을의 지도자가 가장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만약 당신과 당신의 가족이 믿음을 부인하지 않으면 너희는 오늘 모두 죽을 것이다.”
뭐라고 해야 할지,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던 그 때 한 노래의 가사가 떠올랐어요.
그가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삶을 드리기로 처음 결심했을 때 작사한 곡이었어요.
“예수님 따라 살기로 했네. 뒤돌아 서지 않겠네. No turning back”
그리고 그의 자녀들은 끔찍하게 살해 당했어요.
마을의 리더는 그에게 또 똑같은 질문을 했어요. 그 질문에 또 이렇게 대답했어요.
“아무도 나와 함께 가지 않아도 나는 따르리, 뒤돌아 서지 않겠네"
아내가 무참히 살해 당했어요. 그리고 또 같은 질문을 받았어요. 그의 대답이에요.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뒤돌아 서지 않겠네"
여러분의 마음은 어떤가요?
사실 우리는 이러한 눈에 보이는 위협을 직접적으로 당하고 있지는 않아요. 하지만 여러분의 마음은 매일 매일 이러한 위협과 위험 속에 있어요. 세상의 문화와 가치가 여러분의 마음을 계속 두드리고 있거든요.
여러분. 예수님 없이 흔들리지 않고 버틸 수 있겠어요?
여러분의 삶. 그 마음을 매일 확인하세요.
마지막. 당장이라도 주님 곁에 갈 마음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세요. 저는 9살 때부터 선교사가 꿈이었고 지금도 저의 꿈과 기도는 선교지에 나가는거에요. 그리고 제가 기도하는 믿음의 종착지. 제가 하나님 앞에 이루기를 원하며 기도하는 것은요. “순교"에요. 순교의 영광을 하나님께서 저에게 허락하실지 모르지만 그 삶을 꼭 살고 싶어요.
여러분 선교지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의 그 마음이 바로 선교지에요.
선교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가서 그 분을 전하는 거잖아요.
여러분이 마음을 돌아볼 때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삶의 주인이 되지 않는 것 같다면요. 그 마음을 선교지라 생각하고 성령님께서 여러분 마음 속에 있도록 기도해야 해요.
여러분 지금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세요.
“내 믿음은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당장이라도 주님 곁에 갈 수 있는가?”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에요. 이 질문이 그리고 치열한 여러분의 고민이 노아 시대 홍수에 쓸려갔던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할거에요. 밭을 갈다 맷돌을 갈다 남은 사람이 되지 않도록 만들어 줄거에요.
이 세가지를 꼭 기억하고 생각하며 하나님께 매달리며 답을 찾아가는 한 주의 삶이 되기를 바래요. 더 이상 미루지 마세요.
첫째, 미루지 말고 지금 반응하여 기도하세요. 물으세요.
둘째, 내 마음. 내 믿음을 말씀 앞에 확인하세요. 이 과정이 없으면 우리는 버텨낼 수 없어요.
마지막, 당장이라도 주님 곁에 갈 수 있는가? 내 믿음은 어디를 향해 달려가는가 스스로에게 질문하세요.
우리 함께 찬양할까요? No turnings back. 돌아서지 않으리.
그날 그 가족은 다 죽었어요. 하지만 그 이후 그 마을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마을 리더의 마음에 씨앗이 심겨졌고 그 것이 자라났어요. 그는 어느날 마을 사람들을 광장으로 불러 모은 후 자신은 이제부터 우상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심했다고 선포했어요.
그 가정의 죽음이 뿌린 복음이 퍼지면서 마을 리더에게 그리고 모든 마을 사람들에게 인접한 지역에 퍼졌어요.
그들은 오늘 나눈 이 세가지를 위한 삶을 살았어요.
즉각 반응했고, 그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고 버텨냈고 결국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삶을 선택했어요.
이 찬양을 통해 그러한 삶의 고백을 하는 그리고 주시는 은혜와 위로가 가득하기를. 포기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그 간절한 마음을 느끼는 시간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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