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산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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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 시간 성경 봉독하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베드로전서 1장 3절 - 12절까지입니다. 제가 가진 성경으로 신약 성경 377페이지입니다.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설교 제목 : 우리의 산 소망
서론
베드로전서는 사도 베드로가 고난을 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그 전에 즐기던 술 취함과 성적 부도덕함을 자제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동료 시민들과 사회들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거절 당하며, 박해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물리적인 핍박과 징역, 처형과 같은 공식적인 박해가 아니었을지라도 그 시대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더 사회적으로 배격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사도 베드로는 고난을 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위로하고 격려하고자 펜을 들어 베드로전서를 썼던 것이죠. 여기서 베드로는 그들이 겪오 있는 고통과 아픔에 대해서 막연하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고통을 없애실 것이니 괜찮다고 얘기하지 않죠.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과 그로 인해 성도가 얻게 된 정체성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우리는 비록 땅에 속하여 세상 속에서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누리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죠.
이렇게 얘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니, 우리 삶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하곤 합니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것을 없애실 것이라 막연하게 희망을 품곤합니다. 조금만 지나면, 이번만 넘기면, 이번에만 끝나면 우리는 행복할 것이야, 우리에게 복 주실거야.
그런데 오히려 우리가 가진 막연한 희망으로 인해, 우리는 무너지게 됩니다. 그 막연한 희망이 무너져버렸을 때, 우리는 절망하게 되죠. 차라리 우리에게 막연한 희망이 없었더라면, 오히려 상황을 냉정하게 살펴보았다면, 그러한 절망을 경험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 말은 무엇이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데, 하나님의 기적을 바라지 말자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한 소망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야만 하죠. 우리에게 참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만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는 참 소망이 아니라, 막연한 소망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로써 그리스도인에게 이제 더 이상 핍박과 고통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막연한 기대를 갖도록 격려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죠. 물론 고통 속에 있기 때문에, 그러한 위로와 격려를 기대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격려가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참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그 소망만을 붙잡도록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3가지의 것을 살펴보게 될 때, 우리 대흥교회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본론
첫번째, 베드로는 편지의 서두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산 소망을 주셨기 때문이죠.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로 인해 우리가 거듭남,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정체성의 변화는 엄청난 변화입니다. 우리는 종종 결과나, 행동을 바꾸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다이어트를 한다. 살을 10키로 정도 빼겠다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살을 뺀다는 것은 어떤 행동의 결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항상 살을 뺀다고 얘기해놓고 빼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는 그러한 결과를 바라나, 사실 그것을 원하며 살아가지 않기 때문이죠. 우리가 밥을 적게 먹을 수 있고, 운동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든지 행복을 추구하는 우리는 그 행동을 멈추고,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고, 육체의 안식을 위해서 운동을 쉴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행동의 변화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변화일 뿐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정체성의 변화입니다. 우리가 살을 빼고자 하지 않고, 건강한 사람이 되고자 하면, 건강한 식습관을 갖게 되고, 건강하기 위해 운동을 하고, 건강하고자 적절한 수면시간을 갖게 될 거입니다. 이러한 정체성의 변화는 건강해졌다고 멈추지 않습니다. 주변에 헬스 운동을 열심히 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매일 매일이 운동을 위해서 사는 것처럼, 열심히 운동을 합니다. 이렇게 질문하죠. 내일 뭐하는 날이야? 그러면 내일 있을 스케줄을 얘기하지 않고, 내일 해야할 운동을 얘기합니다. 밥을 먹으러가도 단백질 함량을 따지면서 먹습니다.
이렇게 단순히 살을 빼려고 하였던 사람이 운동에 진심이 되면서, 매일 운동 중심으로 살아가게 되는 변화가 바로 정체성의 변화입니다. 마치 이렇게 정체성이 바뀌는 삶이 바로 거듭났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받게 되는 변화가 바로 이러한 정체성의 변화인 것이죠.
이러한 정체성의 변화가 나타나는 본문을 떠올리면, 니고데모가 떠오릅니다. 니고데모는 종교와 도덕을 대변하는데요. 그가 예수님에게 찾아갔을 때, 예수님께서 더 나은 삶을 위해 실천할 것을 가르치지 않으셨죠. 그리고 그의 삶 전체가 다시 태어나야만 하는 거듭남을 요청하셨습니다. 이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일부분 바꾸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전체의 삶을 바꾸셨습니다. 그로인해 우리는 삶의 모든 부분에서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향하여 살아갑니다. 소망을 품으며 살아가는 것이죠.
그러한 그리스도인은 모든 선택과 행동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 안에서 선택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소망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의 소망은 미래의 잘 될 것이다는 불확실하고 막연한 소망이 아니라, 하늘에 두신 영원한 생명이라는 구원인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현재의 편안함에 젖어,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인해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으며, 거듭난 우리를 위하여 구원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날까지, 영원한 유업을 받을 그 때까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보호하다라는 단어에는 사실 “탈출하지 못하도록 막다”는 의미와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다”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그의 왕국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도록 지키고, 그들을 또한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이중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죠.
결국 베드로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산 소망을 가진 자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죠. 이러한 정체성을 설명한 후에 이제 베드로는 그들이 겪고 있는 고난과 시련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얘기하고 있는 두번째는 그리스도인은 고난으로 인해 근심할 수 있으나, 연단으로 인해 기뻐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좋은 일만 경험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어려움에 처하게 되고, 그로인해 근심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근심을 하게 하는 그러한 시련들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위대하시고 무한히 지혜로우신 목적의 관점에서 필요할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확실한 사실은 우리에게 있어서 고난은 불가피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불가피한 일일까요? 완벽하게 살고, 다른 이들에게 죄를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왜 우리 삶에서는 배신 당하고, 신체적 질병을 경험하고, 재정적 어려움이 끊이지 않게 되죠. 도대체 왜 고난이 그치지 않고 어려운 일을 경험하게 될까요?
예수님을 생각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완벽한 사람이셨지만, 불평하지 않고, 더 큰 유익을 위해, 끔찍한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크신 뜻을 행하는데 있어서 행복하고, 기쁨이 넘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에 부르짖고, 아파하며, 근심하셨습니다. 선하시고 완벽하셨던 예수님께서 고통 속에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살 때, 우리 삶에 그러한 고통이 없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다는 것이 문제가 없는 상황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그러한 문제와 어려운 상황을 없애는 게 아니라, 그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길로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죠.
이러한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행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고 계십니다. 수세기 동안 금이 일반적으로 가장 귀하고 가장 오래토록 소유될 수 있는 것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연단을 통해서 정제되어진 참된 믿음은 금보다도 더 귀한 것입니다. 금도 엄청나게 귀한 것이지만, 결국 없어질 것입니다. 금 뿐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가치가 사라지고, 없어질 것이며,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에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시간이 지나가면 그 가치가 떨어짐을 경험하잖아요. 게다가 우리가 죽음을 맞이할 그 날에는 더더욱이나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어떤가요?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을 품게하기에, 그 무엇보다 값진 것이지요. 우리가 맞이할 죽음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사라지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더욱 가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오직 시련과 연단을 통하여 단단해집니다. 이 믿음이 사라질 믿음이 아니라, 단단한 믿음인 것이 시련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죠.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믿음인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향한 이기적인 믿음인지를 알아보는 가장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시련을 받는 것이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바라는 믿음은 시련이 찾아왔을 때, 이기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믿음은 하나님을 자체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시련이 찾아올 지라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신실하게 주실 참 소망을 기대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러한 시험들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6절의 기뻐하다는 표현을 원어로 살펴보면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기뻐하다는 단어의 형태가 중의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해석할 때에 너희가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도 있으며, 너희가 현재 기뻐하고 있다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왜 이렇게 적혀 있을까요. 여기서 독자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표현하였다고 있는 것이죠. 쉽게 표현한다면, 고난 속에 기뻐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너희가 기뻐하는 것이 잘하고 있다며 격려하고 인정한다는 뜻이며, 고난 속에 기뻐하지 않는 독자들에게는 고난 속에서 기뻐하라고 명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결말을 받게 될 것이라 약속하시는데요. 9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믿음의 결국 곧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결국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10절부터 12절에서는 우리가 받게 될 그 구원을 올바르게 알도록 하기 위해 해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마지막으로 살펴볼 내용입니다. 이 구원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성경에 기록해둔 것입니다. 그렇기에 구원에 대해서 더 깊이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들어 읽어야 합니다.
이 구원은 예수님께서 우연히 이루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갑작스럽게 예수님을 보내신게 아니죠.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우리가 누려야 할 구원이 있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복음이 이 땅 가운데 임할 것임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 안에는 구원을 이루고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고난과 영광이 담겨 있었던 것이죠.
성경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고통과 영광에 관한 것입니다. 예언은 모두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의 후손으로 오시는 이가 구원할 것이라 얘기했습니다. 이사야 9장에서 그는 임마누엘이라고 얘기하고요. 이사야 53장에서처럼 그는 고통받고 살해당할 것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시편 16편에서 그가 다시 일어날 것임을 들었습니다.
레위기는 어떤가요? 읽기 어려운 그 제사와 성막의 내용들 또한 모두 예수님에 관한 거야. 예수는 구약이 가리키고 있던 희생제물이셨어요. 제단 위의 빵이었다. 거룩한 곳에 있는 등불이었습니다. 그는 성전 그 자체이십니다.
심지어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십계명에 써 있는 모든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에 관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무엇보다도 율법을 완성하신 도덕적으로 흠이 없으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죠. 예수님께서는 마음과 생명을 다해 주 하나님을 사랑하신 유일한 사람이시며, 이웃을 자신처럼 완벽하게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이렇듯 우리는 성경을 들어서 필 때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으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그 고난과 영광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죠. 우리는 죽음의 위기가 없는 시대를 살아가면서 영원한 삶, 구원에 대해서 등한시 여길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 구원은 심지어 천사들도 흠모하고,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구약의 모든 이들이 바랬던 그 구원을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바라보고 있으며, 이미 얻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결론
이제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베드로전서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고난 속에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믿기에 고난 속에 있으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 안에서 기뻐하고 계신 분도, 아직은 근심 속에 계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비록 제가 여러분의 어려움들을 다 알 수 없지만,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막연한 희망으로 위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 없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지도 못하며, ’이번만 지나면 회복 될 것입니다’, ‘곧 괜찮아질거에요’라는 말 뿐인 위로는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더 절망 속으로 파고 들게 할지모른 다는 것이죠.
그래서 차라리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고난 속에서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진정한 소망을 바라보자. 비록 삶의 어려움과 환경이 바뀌지 않았더라도, 우리가 품고 있는 그 소망으로 인하여, 구원을 바라보길 원한 것입니다. 시련으로 인해 우리의 믿음이 금보다 더 귀하고 진실하도록 연단되기를 바라는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시련이 우리를 너무나 괴롭혀 마음이 어렵게 될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우리에게 주신 성경을 봐야 합니다. 구약의 말씀을 통해서 약속의 그 구원이 어떤 것인지, 신약을 통해서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이 어떤 것인지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주께서 주신 참 소망의 기쁨을 갖고,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 기쁨은 8절에서 표현한 것처럼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