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나라

킹덤스토리 해설 시리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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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수요기도회에 오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통해 참된 용서에 대해 살피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용서의 나라라는 진리가 선포될 때 함께 은혜 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세상 나라는 죄의 짐과 보복의 두려움 가운데 산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세상 나라는 죄의 짐과 보복의 두려움 가운데 사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왕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왕의 꿈을 잘 해몽해서 당시 고대 근동 세계에 가뭄이 왔을 때 그 위기를 넘길 수 있도록 했습니다. 요셉은 이 일을 계기로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총리가 된 애굽은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가족들을 불러서 애굽에서 함께 살도록 합니다. 물론 이 가족 중에는 어렸을 때 자신을 구덩이에 빠뜨려 외국 상인들에게 인신매매한 형님들도 있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야곱이 애굽에 거주한 지 17년만에 야곱에 147세의 나이로 소천하게 되었습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 요셉의 형들은 불안해하기 시작합니다. 15절에보면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요셉을 미워해서 인신 매매했던 사건에 대해서 요셉이 앙심을 품고 형들을 해칠까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여태까지는 아버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았는데 이제는 요셉에게 거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형들은 머리를 씁니다. 죽은 야곱의 유언을 조작합니다. 성경에는 형들이 조작했다고 구체적으로 말하진 않지만 정황상 어떤 학자들은 형들이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유언을 조작했다고 그렇게 설명합니다. 17절에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아버지가 이런 말을 했다고 요셉에게 전하는 겁니다.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데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본문을 보시면 아버지의 유언이라는 이유를 들어 죄를 용서받기 원하고 거기에다가 하나님까지 들먹이며 죄를 용서해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정체를 밝힌 부분이 창세기 45장입니다. 나는 어릴 때 당신들이 종으로 팔아서 애굽으로 왔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총리가 되어 하나님이 나를 통해 구원을 베풀었습니다. 라고 고백한 부분이 45장입니다. 그런데 이 45장부터 야곱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쭉 읽어보면 요셉의 형들이 요셉에게 따로 “어릴 때 노예로 팔아서 미안하다. 참 못된 짓을 했다. 용서해다오.”라고 한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요셉이 자기 정체를 밝히고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고백하고 자기 동생 베냐민을 안고 우는 장면이 나오고 그 후에 야곱이 요셉을 보러 오고 축복을 하고 유언을 합니다. 형들이 요셉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한 적이 없다가 이제 죽을 것 같으니까 이렇게 사과를 합니다. 여태까지는 아버지가 있으니까 안전할 것 같아서 있다가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까 아버지의 유언을 조작하며 하나님을 들먹여가며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 받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 나라의 특징입니다. 세상 나라에는 참된 회개가 없습니다. 죄를 짓고 넘어가면 그만입니다. 나에게 큰 피해가 오거나 처벌이 주어지지 않으면 뉘우치고 회개하지 않아도 굳이 상관이 없습니다. 오죽하면 예전에 제가 들은 농담 가운데 이런 것도 있습니다. 십계명중에 숨겨진 계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십일계명까지 있는데 마지막 열한 번째 계명이 들키지 말지니라 라고 합니다. 세상의 방식은 당장 처벌이 주어지지 않고 나에게 피해가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회개가 없고 이웃으로부터 받는 용서의 은혜가 없습니다. 죄인으로서의 자아가 살아 있어서 그냥 넘어갑니다. 단지 내가 지은 죄로 인해 보복 당하지 않을까 피해를 입지 않을까 그것이 불안합니다.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목숨을 잃을까봐 불안합니다. 만약에 야곱이 죽지 않았더라면 형들은 결코 요셉에게 용서를 구하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야곱이 죽으니까, 자기 신변에 문제가 생기니까 용서를 구합니다.
세상의 용서는 이런 방식입니다. 보복을 감당할 수 없어서 하는 용서입니다. 보복을 막아줄 안전장치가 있으면 굳이 용서하지 않아도 됩니다. 혹은 내가 보복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있고 능력이 있으면 용서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세상의 용서는 힘이 없는 자들, 약한 자들이 고개를 숙이는 것이 용서입니다. 용서라기보다는 굴복에 가까운 행위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이런 생각을 하기까지 애굽에 머무는 17년 동안 마음이 그냥 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언젠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어떻하지 하는 생각이 있었기에 야곱이 죽자마자 요셉에게 이런 이야기들을 합니다. 17년 동안 두려움과 죄책감의 짐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음에 뭔가 짐은 있는데 당장은 보복 당하지 않으니까 고개 숙이기 싫은 그런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참된 회개가 없고 용서가 없으면 마음에 이런 짐을 지고 살아야 합니다. 보복을 당할 때만 용서를 구하는 그런 비참한 삶을 살게 됩니다. 세상 나라의 용서는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며 공동체가 하나 되는 기쁨을 누리는 용서가 아니라 어떤 자존심의 문제고 보복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입니다. 세상 나라에는 용서 대신 마음의 짐과 죄책감이 있고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폭력적인 힘이 있습니다.
2- 용서로써 세상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시킨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용서로써 세상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시킨다고 하는 것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요셉은 이런 형들을 용서해줍니다. 아버지와 하나님을 들먹인 비겁한 용서였습니다. 그리고 참 많이 늦은 용서였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성경은 성경인물들의 모든 자세한 정황을 기록한 책은 아니고 구원역사의 목적에 따라 기록한 책이기 때문에 11명의 형제들 중 한 명 쯤은 요셉에게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고 용서를 구했을 수 있지만 열한 명 형제의 공식적인 용서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70명의 가솔들에게 설명하며 공적으로 뉘우치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형제가 공모해서 요셉을 노예로 팔았으면 적어도 열한 형제의 공식적인 사과가 있어야 하는데 성경에 그런 장면은 없습니다. 공식적으로 용서를 요청하고 요셉이 받아줬다면 성경이 기록하지 않을 이유가 없고 또 요셉의 형들이 야곱이 죽은 이후에 이렇게나 두려움에 벌벌 떨 리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유언을 팔아가면서까지 목숨을 부지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비겁한 형들이었지만 요셉은 용서했습니다. 용서한 것을 넘어서서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복 당할 까봐 두려웠던 형들에 대한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습니다. 19절에 요셉은 형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이 말 뜻은 죄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뜻도 있겠지만 20절에 보면 왜 요셉이 이렇게 말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요셉이 종으로 팔려간 것은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이 일의 결과를 평가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형들을 심판하고 정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형제들이 동생을 노예로 팔아버린 참 잔악무도한 일이지만 하나님은 이런 악한 일 조차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구원 역사로 바꿔버리셨습니다. 20절 하반절에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라고 말씀합니다. 요셉이 형들을 용서할 수 있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주권과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복음을 위한 고난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고난을 준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상황들 너머 영원한 구원계획을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용서가 되면 이 용서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나라 가운데 펼쳐지게 됩니다. 세상이라는 무대 너머에 구원 역사를 계획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요셉은 또 보복의 역사를 쓸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요셉의 용서로 인해서 보복의 역사가 끊어지고 죄책감의 짐이 덜어지며 참된 평강이 부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집니다. 이게 말이 쉽지 어떻게 하면 이럴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 같으면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일년 정도는 감옥에 가뒀을 것 같습니다. “원래 내가 감옥에 갇히고 노예생활 했던 세월만큼 감옥에 있어야 하지만 일 년으로 용서해주겠다! 감사히 여겨라” 이랬을 것 같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용서를 실천하신 분이 손양원 목사님 아니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할 뿐 아니라 양아들로 삼은 놀라운 이야기는 기독교 역사상 거의 유래 없는 용서입니다. 어떻게 이런 용서가 가능한지 상상하기가 힘듭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해하는 것 외엔 없습니다.
제 4의 벽이라는 연극용어가 있습니다. 드니 디드로라는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가 주장한 이론입니다. 연극이라는 것은 어떤 방 안에서 이뤄지는 일인데 그 방의 한 쪽 벽면은 관객들이 보고 있고 연극배우들은 관객들이 보고 있는 그 벽을 넘어서 이야기하거나 그 벽 너머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대와 관객석을 가로막고 있는 가상의 벽을 말합니다. 무대에는 그 나름대로의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고 관객은 그 이야기를 봅니다. 배우들은 관객을 향해 말을 걸거나 소통할 수 없습니다. 이게 바로 제 4의 벽입니다. 제 4의 벽은 연극 뿐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에도 적용됩니다. 영화가 상영되면 스크린이 제 4의 벽이되고 드라마를 볼 때 티비 화면이 제 4의 벽이 됩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계획하시고 그것을 세상이라는 무대 가운데 구현한다고 하셨을 때 거기 있는 배우들은 구원 역사를 위해 쓰임 받기도 하고 또 구원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구원 역사를 방해하는 인물로 등장하기도 할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 같은 경우에는 요셉을 괴롭히지만 그것을 통해 구원 역사의 한 부분을 담당하게 된 경우입니다. 요셉은 어떻게 이 고통스러운 무대에서 형들을 용서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 연극용어로 치면 요셉이 제 4의 벽을 초월했기 때문에 이 일이 가능했습니다. 무대 안에서의 상황만 놓고 보면 동생을 판 저 형들을 당장 감옥에 가두고 고문해야 합니다. 하지만 제 4의 벽을 건너편에 이 땅에 구원 역사를 계획하신 하나님을 보니까 이 형들의 역할이 그냥 죽여 없애야 하는 악역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구원 역사의 무대에서 제 4의 벽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발견합니다. 또 바깥에서 제 4의 벽을 관통해서 다시 무대를 보면 앞으로 이 무대에서 펼쳐질 구원 역사를 위해 자신이 형들의 생명을 보존해야 할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용서로 돌아가겠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용서를 베풀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습니까? 그 답은 구원역사의 무대를 넘어 하나님의 계획을 보는 것입니다. 제 4의 벽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이 제 4의 벽을 초월하는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은 세상안에서 세상의 것들을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뤄지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제 4의 벽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그 계획이 이 땅 가운데 이뤄지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가 가능할 때 결국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해달라는 기도까지 연결이 됩니다.
죄인인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도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왜이렇게 힘든 시나리오를 주셨습니까? 왜 이렇게 거친 무대를 주셨습니까? 그렇게 무대 밖에서 편안하게 연출만 하고 계시니 우리 형편을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대 밖에서 무대 안으로, 제 4의 벽을 넘어 구원 역사의 무대로 직접 등장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친히 죄인들을 용서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용서의 나라임을 보여주셨습니다. 무대 밖에서 배우들에게 지시만 하는 그런 연출가가 아니라 구원역사에서 가장 억울하고 가장 고난당하는 배우로 오셨고 가장 하기 힘든 용서를 베푸신 분으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이 용서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신 것을 보며 우리 또한 용서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열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알게 하는 말씀으로서, 제 4의 벽을 초월해서 하나님 나라 역사를 간구하는 기도로서 나에게 오는 고난들을 용서하며 하나님 나라를 일궈갑니다.
3- 하나님 나라를 통해 많은 백성이 구원 받을 것이다.
(설명) 그 다음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교훈은 하나님 나라를 통해 많은 백성이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복과 죄책감으로 가득한 세상에 용서를 베풀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21절에 보면 요셉이 그의 형들에게 약속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형들의 자녀들을 기르는 것입니다. 20절에서처럼 요셉은 형들이 악을 행했지만 하나님이 선으로 바꿔 7년간 가뭄의 시대에 요셉을 통해 야곱의 40명 가솔들이 구원 얻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요셉은 용서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방식인 것을 알고 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어떤 일을 할 것이라 다짐합니다. 바로 야곱의 아들들의 자녀들을 기르는 일입니다. 요셉의 사명은 가뭄의 시대에 하나님 나라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었고 이제 다음 세대 하나님 나라 백성을 잘 기르고자 합니다. 후에 이들은 몇 십만, 몇 백만으로 그 숫자가 늘어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용서를 해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이유는 우리가 좀 더 나은 사람으로 인정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평안하고 좋기 위해서,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통해 많은 이들이 구원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요셉이 그 형제들의 자녀를 기르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얼마나 지원을 했겠습니까? 형제들을 다 용서하고 형제의 자녀들을 내 자녀처럼 그렇게 길렀습니다. 요셉이 태어난 순서로는 거의 끝이었지만 마치 야곱의 장남인 것처럼 집안을 일으키고, 가문을 일으키고 야곱의 가문을 민족단위로 번성 시켰습니다. 이 번성한 민족은 장차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이루고 이 나라를 통해 인류의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입니다. 요셉이 세운 하나님의 나라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많은 이들이 이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 받게 될 것입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보고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 나라는 더 느리게 천천히 역사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용서는 마음이 편안하게 되는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영혼을 구원하는데에까지 이릅니다. 용서가 곧 구원의 방식입니다.
(적용)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우리가 여러 가지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용서해야 할 일에 마주치게 됩니다. 내가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용서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주도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용서를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의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권력을 잃은 사람들이 구하고 혹은 권력을 취할 수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그런 수단입니다. 아니면 약자에게 용서를 해서 어떤 명예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세상적인 용서의 구도는 이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용서를 통해서 얻는 만족감 보다 더 큰 상처와 분노가 있을 때 우리는 용서하지 못하고 싸우고 보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적인 관점에서의 용서로는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일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용서는 달라야 합니다. 우리의 용서는 살리기 위한 용서입니다. 우리의 용서는 죄책감과 보복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한 용서고 그 나라 안으로 많은 사람을 품어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용서입니다. 이 용서의 나라를 통해서 많은 이들이 진정한 용서 복음이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참된 용서를 경험하는 곳마다 영혼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인 우리가 용서하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용서는 비굴한 것도 아니고 혹은 주도권을 쥐는 것도 아니고 명예를 얻는 것도 아닙니다. 나라를 얻고 영혼을 얻는 일입니다. 요셉이 했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을 기르는 일입니다.
결론
설교를 맺겠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용서를 통해 죄책과 보복이 없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길 바랍니다. 그것을 통해서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