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롭게 살아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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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롭게 살아간다는 것/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정의를 실천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서론]
우리는 앞서 사무엘상을 보았습니다.
사무엘상은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입니다.
왜 사울이 망했고, 다윗이 흥할수 밖에 없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이 아무 과정없이 흥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많은 시련과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사울왕이 자신을 죽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이런 어려움을 겪는 것이 너무 억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을 믿었기에 사울을 죽이지 않고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아마 다윗이 힘으로 왕이 되려고 했다면 벌써 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지나 결국 하나님이 사울을 심판하셨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우리도 세상 살다보면 억울한 일들을 많이 겪습니다.
그런데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돈도 없고, 백도 없는 힘없는 사람들입니다.
가해자들은 대부분 가진 자들, 힘있는 자들입니다.
그럼 우리도 억울한 일 안 당하려면 돈과 백을 가져야 할까요?
이런 억울한 일은 개인과 개인간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단체나 국가가 이런 악행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불법 해고는 회사가 저지를 수 있는 악행입니다.
과거 불법 고문들도 국가가 자행했던 악행들입니다.
불법 해고 당한 후 강남 사거리 첨탑 위에 올라가 365일 몇년째 시위하시는 분도 본적 있습니다.
얼마나 억울하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럼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의지할 곳은 어디일까요?
바로 법정입니다.
그래서 법정은 사회에서 정의의 마지막 보루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법정에서 조차 제대로 판단해주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결국 억울함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문제는 법정에서조차 가진자, 힘있는 자들이 유리하다는 것입니다.
김앤장같은 곳에서 비싼 변호사 쓰면 재판이 뒤집어질 수도 있습니다.
법은 있는자나 없는자 모두에게 공평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여전히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뉴스보면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10년 넘게 형을 받을텐데 돈있고, 백있으면 겨우 1-2년 받거나 집행유예를 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럼 그 피해자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가?
정의가 죽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살아계실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본론]
그것에 대한 답이 바로 오늘 시편입니다.
시편은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우리의 신앙적 반응들, 기도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지만 우리는 그 뒤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기도 하고, 고난가운데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울부짖기도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하고,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기도 합니다.
그 중에 오늘 시편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믿음으로 고백하는 기도입니다.
1절입니다.
하나님이 하늘 법정에 나오셔서 신들을 모아 놓고 재판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신들’이란 왕이나 재판관같이 옳고 그름, 선과 악을 판단하는 사회 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선과 악을 판단하는 재판을 맡기셨습니다.
그들을 ‘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선과 악을 판단하는 일을 원래 하나님이 하시는데 그들이 하나님을 대리해서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고, 그 말씀대로 재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재판하라고 그들을 세우신 게 아닙니다.
그들은 내가 하는 판단이 곧 하나님의 판단이라는 생각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선과 악을 판단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는 사형제도가 있지만 언제가부터 실제 집행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의 죄가 정말 한 생명을 빼앗을 정도의 죄인가에 대해 판사조차도 판단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차라리 100년형을 때리는 게 쉽지,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처럼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어느 정도의 벌을 내려야 하는지 결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판사들은 철저히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생각으로 겸손하게 행해야만 하는 위치입니다.
그런데 1절에서 왜 하나님은 재판관들을 모아놓고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가 2절에 나옵니다.
2절입니다.
‘언제까지 너희는 공정하지 않은 재판을 되풀이하려느냐? 언제까지 너희는 악인의 편을 들려느냐?(셀라)’
여기서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언제까지’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억울한 자들의 말을 대신해서 해주시는 것입니다.
당시 왕이나 지도자들이 해야 하는 중요한 일중 하나는 백성들의 여러가지 송사를 잘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재판같은 게 등장하는 것입니다.
아이 하나를 두고 누가 진짜 엄마인지 솔로몬이 해결하지 않습니까?
정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잘 해결하는게 지도자의 사명이었습니다.
사회 정의의 마지막 보루가 바로 이 법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리자 재판관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재판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공정하지 않은 재판을 하며 악인의 편을 드는 것입니다.
악인이 가진 것이 많고, 힘이 있기 때문에 그의 편을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재판관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해 판결을 왜곡한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 재판관들을 책망하시고 그들을 심판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법정이 정의의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법정에서도 정의가 세워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럼 억울한 사람은 평생 억울함을 벗지 못하는 것이죠.
그래서 최종 법정이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법정이 제대로 판결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다시 판결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판결말고도 하나님의 최종적인 판결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살면서 때로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악한 일들, 억울한 일들 볼 때 하나님이 안계시는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하며 한탄하기도 합니다.
정의가 죽은 것을 마치 하나님이 죽은 것으로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다 지켜보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 일들에 대해 정확히 계산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1장 17절에서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할 때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차별없이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말 것이며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거든 내게로 돌리라 내가 들으리라’
하나님은 분명하게 재판을 외모, 즉 그들이 가진 배경으로 판단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힘과 권력을 두려워하지 말고, 결정하기 어려운 것은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그들이 이렇게 공정하게 재판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3,4절입니다.
‘가난한 사람과 고아를 변호해 주고, 가련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에게 공의를 베풀어라. 가난한 사람과 빈궁한 사람을 구해주어라. 그들을 악인의 손에서 구해 주어라’
이게 하나님이 재판관들을 세우신 목적입니다.
그들이 공정한 재판을 해야 하는 이유는 힘없고 백없는 사람들을 보호해주기 위해서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강조하시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부, 고아, 나그네 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거의 홀로된 사람들입니다.
의지할 대상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의지할 대상은 하나님 한분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 대신에 재판관들에게 보호자가 되어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사람들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고귀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밖에 의지할 수 없는 소외된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는 정의라고 말하면, 어떤 것이 떠오릅니까?
악을 막고, 처벌하는 것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이 말하는 정의에 불과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정의, 공의는 세상의 소외된 자들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악인들을 처벌하는 것은 그 다음 일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예레미야 5장 28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찌고, 살에서 윤기가 돈다. 악한 짓은 어느 것 하나 못하는 것이 없고, 자기들의 잇속만 채운다. 고아의 억울한 사정을 올바르게 재판하지도 않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지켜주는 공정한 판결도 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이유중 하나는 바로 고아와 가난한 자들을 제대로 돕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 나라의 영적 건강을 체크하실 때 소외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를 기준으로 삼으십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 공의의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회의 소외된 사람들이 제대로 된 도움을 받지 못하고, 억압당하고, 고통당하면 그 나라는 타락의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서 사무엘상 22장을 보았는데 그 때 다윗이 사울을 피해 아둘람 굴로 도망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압제를 받는 사람들,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구때문일까요?
사울때문입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하나님 말씀에 따라 제대로 재판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존재는 사울의 왕국이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병들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시대는 빠르게 변화되고, 전염병도 생겨나는데 그를 따라갈 법은 빠르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범죄도 점점 첨단화되는데 법을 만드는 속도가 따라가지 못합니다.
N번방 사건이나, 딥페이크 기술을 이용한 범죄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부지런히 사회를 분석하고 미리 미리 법을 만들어야 할 국회의원들이 권력이나 탐하고, 맨날 싸우면서 제대로 일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법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전관예우를 앞세워 판결을 왜곡시킵니다.
판사출신 변호사는 승률이 엄청납니다.
그가 잘해서가 아니라 전관예우를 받기 때문입니다.
이런게 모두 재판을 왜곡시키는 죄악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성경은 5절에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람들이 깨닫지도 못하고, 분별력도 없이, 어둠 속에서 헤매고만 있기 때문이다.
이런 표현들은 원래 우상숭배자들에게 사용됩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숭배하는 원인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사야 44장 18절입니다.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들의 눈이 가려서 보지 못하며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니라’
무슨 의미냐면, 재판관들이 올바른 판결을 내리지 않는 것은 우상숭배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들 위에 계신 하나님을 잊고 ‘탐욕’이라는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그들의 눈이 어두워져 판결을 왜곡시킨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우리의 영적인 눈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러한 재판관들의 타락이 심각한 문제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이 이 땅에 세우신 도덕적 질서를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5절 후반부에 보면 ‘땅의 기초가 송두리째 흔들렸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창조때부터 이 세상에 세운 도덕적 기초를 재판관들이 흔들어버린 것입니다.
선과 악, 옳음과 그름이 완전히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사회는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법은 세상 질서의 토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의 근간을 흔들어버린 재판관들을 심판하십니다.
6,7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신들이고,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들이지만, 너희는 사람처럼 죽을 것이고, 여느 군주처럼 쓰러질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신’처럼,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처럼 고귀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신들의 이러한 권위를 남용해서 재판을 왜곡시켰고, 약자들에게 피해를 주고, 그들을 보호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잘 감당하지 못하면 그들 역시 죽음과 파멸, 즉 심판을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말씀이 우리에게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우리가 판사도 아니고 말이죠.
우리 역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한다는 점에서 이 시편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대리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은 이 세상을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공의와 정의는 결코 악인을 처벌하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공의와 정의는 세상의 소외된 자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며, 그들을 돕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소외된 자들의 보호자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들을 돌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하는 공의와 정의를 모두 보고 계시며 이를 통해 우리를 최후 심판하실 것입니다.
최근에 뉴스를 보니 참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중증 장애를 앓는 아이와 함께 엄마가 둘이서 20년 넘게 함께 살았다고 합니다.
엄마가 20년을 넘게 아이를 돌봤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요?
그런데 엄마가 어느날 갑상선 암에 걸리신 거에요.
이 일로 인해 엄마도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 엄마가 자신이 혹시 암으로 죽으면 딸이 혼자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지적장애 딸을 죽이고야 말았습니다.
그 후 엄마도 죽으려고 했는데 실패해서 결국 자수해 6년형을 받았다고 합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이런 사람들을 주변에서 관심을 갖고 돌봐줬다면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제도적으로 돌봐주는 시스템이 있었다면 이런 일이 있었을까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는 단지 내가 죄를 저지르지 않고 살아간다고 세워지는 게 아닙니다.
악인을 처벌하는 강력한 법을 만든다고 세워지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소외된 사람들에게 무관심하다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공의와 정의는 세워지지 않습니다.
우리 학교에 노숙자 사역을 하시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 말씀을 들어보니 코로나로 인해 노숙자가 더 늘어났다고 합니다.
그만큼 어려운 사람들이 더 늘어난 것입니다.
노숙자들은 세상에서 이름이 불려지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소속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먹고 살기도 바빠서 이런 사람들에게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우리 역시 예수님을 믿기 전 영적 노숙자였습니다.
이름도 없고, 소속도 없이, 즉 우리의 정체성도 제대로 알지 못한채 방황하는 죄인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셨고, 우리를 구원해주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역시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돌봐줘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고통받는 약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하나님이 대리자로 세워준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직무유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우리의 모든 행위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내가 죄를 짓지 않거나 선하게 사는 것 그 이상입니다.
내 주위의 소외된 자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거룩한 부담감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세워지는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구두장이가 나오는데 그는 어떤 집에 세들어 살면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자신과 아내가 같이 입을 겨울 코트를 만들기 위해 돈을 수금하러 갑니다.
그런데 결국 제대로 돈을 받지 못해 화가나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집으로 가는 도중에 교회 앞에서 벌거벗은 사람 한 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사람을 도와줄지 말지 고민하다가 결국에는 도와주게 됩니다.
자신의 옷과 장화를 벗어주고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의 아내도 처음에는 수금을 하지 못하고 술먹고 들어온 남편을 보고 화를 냈습니다.
그런데 남편에게 이야기를 듣고난 후 그 사람에게 저녁을 대접해줍니다.
나중에 이 사람은 구두장이와 함께 구두만드는 일을 합니다.
그러면서 몇몇 손님들을 겪게 되는데 그 과정을 통해 그 사람은 몇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나중에 알고봤더니 그는 이 땅에 내려온 천사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질문 3가지에 대한 답을 얻어오라고 이 땅에 보내신 것이었습니다.
그 질문이 이것입니다.
첫째, 사람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둘째,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셋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입니다.
첫번째, 세번째 답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람 안에는 사랑이 있고, 그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답은 언제 죽을 지 몰라 지금 자신에게 진짜 필요한 게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앞을 내다볼 수 없으니 진짜 자신에게 필요한 게 뭔지 알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지금, 현재 행동해야 할 게 바로 사랑입니다.
어떻습니까?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며 사람은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 정의를 세우는 길입니다.
이번 한주간도 이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우리 다카포 식구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