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캡틴 지저스_캡틴이 리더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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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캡틴 지저스_캡틴이 리더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
■ 주제: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마가복음 2장1-12절 말씀입니다. 신약성경 54페이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봉독 하겠습니다.
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 개요
[서론]
여러분 마블 영화 좋아하세요?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토르, 헐크, 스파이더맨, 앤트맨, 닥터 스트레인지 각자 자기가 가지고 슈퍼 파워로 지구를 지키는 히어로들의 이야기 인데 이 슈퍼 히어로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시리즈가 있었죠? 어벤저스입니다. 마블 팬으로서는 정말 반가운 일이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렇게 개성이 강하고 각자 슈퍼 파워를 가지고 있는 히어로들이 한 팀이 되어서 움직이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주 탁월한 리더십이 없이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해내는 어벤저스의 리더가 있죠? 누군지 아세요? 캡틴 아메리카입니다. 사실 캡틴 아메리카는 어벤저스 중에 거의 최약체에 가깝습니다. 머리로 치면 닥터 스트레인지 힘으로 치면 토르나 헐크 임기응변 하는 능력으로 치면 아이언맨 스파이더맨 앤트맨 이런 친구들이 더 좋습니다. 그런데도 캡틴 아메리카가 어벤저스의 리더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뭔지 생각해 보신적 있습니까? 바로, 그만이 가지고 있는 희생정신 때문입니다. 대의를 위한 희생정신, 그리고 팀원들을 위한 희생정신 바로 이것 때문에 캡틴 아메리카가 모두 제 각각인 어벤저스의 리더가 될 수 있었고 팀이 세워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어벤저스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세상의 많은 조직이 그렇듯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자멸해 버렸을 것입니다.
[본론]
우리가 지난번까지 응답하호 승무원을 모집하면서 살펴 본 믿음의 영웅들을 기억하십니까?
다윗, 다니엘, 이사야, 한나... 이렇게 대단한 믿음의 영웅들이 있었죠? 우리 공동체 안에도 분명히 이런 믿음의, 영응들 멋진 믿음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영웅들만으로 공동체가 세워지고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공동체가 온전히 세워지려면 이 영웅들을 이끌어갈 리더십이 세워져야 합니다. 어벤저스에 캡틴 아메리카가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보내 주신 캡틴이 있습니다. 누구에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아무리 많은 믿음의 영웅들이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공동체의 리더가 되어 주시지 않으면 공동체가 세워지지 않고 우리 삶도 온전히 세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부터 여름 수련회 기간까지 우리 공동체를 이끌어 가시는 리더, 우리의 캡틴이 되시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재미있는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 무엇입니까? 중풍병자인 친구를 낫게 하기 위해 네 명의 친구들이 예수님이 계시는 집에 지붕을 뚫고 환자를 내려보내는 장면이죠? 당시 유대인들의 집은 보통 직육면체 모양이었습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각티슈처럼 생겼다고 생각하변 됩니다. 진흙이나 돌로 벽을 쌓고 그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들보를 올리고, 들보 위에 작은 나무들을 가로질러 놓았다. 작은 나무들 사이를 나뭇가지나 마른 풀 등으로 엮은 다음에 짚을 잘게 썰어 넣은 진흙을 발라 평평하게 만든다. 흙을 바른 후에는 모래나 작은 자갈을 뿌려 마무리 한 후에 크고 둥근 돌로 단단하게 다진다. 이렇게 마무리한 흙이 마르면서 단단한 지붕이 완성 된다. 유대인들이 이 지붕을 어떻게 활용 했냐 하면 잠을 자거나 쉬는 공간으로도 활용했고, 사색하고 기도하는 공간으로도 쓰기도 하고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곡식이나 채소를 말리기도 했습니다. 이 외에도 초막절에는 거기에 장막을 치고 살기도 했고 나그네들이 노숙하는 공간으로 내어주기도 했습니다. 정말 다양하게 쓰이는 공간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프라이빗한 공간이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계시는 가버나움의 집은
예수님의 집이 아니고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장모님의 집으로 추정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서른에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갈릴리에서 사역하시면서 베드로의 장모님의 열병을 고쳐주셨는데 이 일이 개기가 되어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하시는 동안에 이 집이 예수님의 사역에 전초기지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가버나움이 당시에 상당히 대도시였기 때문에 예수님에게도 아주 유용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서 사람들에게 진르를 가르치고 계실 때 예수님을 아주 난처하게 하는 일이 생긴겁니다. 예수님 때문에 집 천장에 구멍이 뚫린 겁니다. 엄밀히 말하면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 때문이지만 남의 집을 빌려 사역을 하면서 이거 참 난감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그 자리에 또 유대 서기관들이 가장 앞자리에 와서 앉아 있었던 거에요.
서기관들이 뭐하는 사람입니까? 일반적으로는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으로 공문서를 작성하고 필사하는 사람이지만 유대인 서기관들은 좀 다릅니다. 율법 연구가들이면서, 유대 사회에서 율법을 가르치고 집행하는 오늘날로 치면 법률가들입니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남의 집 지붕을 뚫고 들어 왔다는 건 검사 앞에서 용감하게 재물 손괴, 주거 침입 같은 범죄행위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참 재미있는 것이
서기관을 비롯해 누구도 이들이 남의 집 지붕을 뚫고 주거침입을 한 것에 대하여 놀라거나 문제 삼거나 책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가 모든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천장이 뚫리고 중풍병자가 들것에 달려 내려오는데 예수님께서 대뜸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무엇인가 너무 많이 생략된 것 같지 않으세요? 의사가 환자를 만나면 기본적으로 묻는 것들이 있죠? 이름이 뭔지, 몇 살인지, 증상이 어떤지, 증세가 어떤지, 언제부터 무슨 일로 이렇게 되었는지.. 예수님은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지만 중풍병자를 보신 순간 이미 이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그를 향한 긍휼로 가득하셔서 그에게 바로 죄사함을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말씀을 하셨고, 어떻게 이 말씀을 하실 수 있었는지는
그 다음 내용을 보면 이해할 수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서기관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7절 말씀입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절,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중심에 아시고 라는 표현은 다른 번역으로는 심령으로 아시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영으로 아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이 마음에 생각하는 것을 것을 영으로 아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지붕을 뚫고 내려온 중풍병자의 마음을 모르셨을까요? 당연히 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중풍병자를 만난 예수님의 말씀이 뜬금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보신 순간 그의 모든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고,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선포해 주셨습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저는 이것을 중의적인 의미로 봅니다. 온몸이 마비된 육신의 질병을 고치시기 전에 그의 병든 영혼을 치료하시기 위해 그의 전인격적인 죄에 대한 사함을 선포하신 것 이면서 동시에, 남의 집 지붕을 뚫고 내려온 위법적이고 무례한 행동에 대한 예수님의 사죄선언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사죄 선언은 절대로 말뿐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죄를 사하실 수 있는 실질적인 권세가 있는 분이시면서 우리를 대신해 그 대가를 반드시 직접 지불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이 받아야 할 비난을 대신 받아 주시는 자기희생적인 사죄선언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와 연약함을 사하실 권세가 있으신 분이시고 이를 말로만 하시지 않으시고 우리가 받아야할 모든 비난, 모든 징계, 모든 형벌을 친히 십자가를 지시는 자기 희생으로 감당하셨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영적인 리더십의 핵심이 들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특별한 능력에 집중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사지가 마비된 중풍병자를 치유하는 능력에 놀라지만 예수님의 영적인 리더십은 놀랍게도 그런 슈퍼 파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 날에도 교회와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서는 이런 슈퍼 파워를 가진 믿음의 영웅들이 즐비해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죠?
우리는 예수님의 영적인 리더십이 그분의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대신 짊어지시는 자기희생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여러 모양의 믿음의 영웅들이 등장합니다.
사실 중풍병자는 온몸이 굳어져서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생존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인데 이런 모습은 율법주의에 같혀 조금의 실수나 잘못도 용납하지 못하는 당시 안타까운 유대인들의 영적인 상황과 율법 보다 크신 하나님을 법과 원칙의 틀 안에 가두어 놓고 하나님을 제한해 놓은 유대인들의 하나님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이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이 대목이 해석이 된다. 이것은 이 환자가 상징하는 유대인들의 모습과 회복을 위해 싸우는 유대인들을 유대 공동체라는 한 인격으로 보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모든 율법적인 제약과 한계 상황을 뛰어 넘어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지붕을 뜯어냈던 친구들은 굉장히 혁신적인 믿음의 영웅이다. 그러면 그렇다고 해서 그동안 율법을 지키고 가르치며 하나님의 말씀을 수호하는 서기관들을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까? 아니에요. 이들 또한 자기 일을 충실히 하는 믿음의 영웅들입니다. 어쩌면 지금도 이 서기관들과 같은 역할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실 이 두 믿음의 영웅들이 서로 충돌할 위기에 처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 사이에 서셔서 비난과 책임을 자기에 돌리시고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연약한 자들의 허물은 덮어 주시고 율법의 요구는 만족시켜 주신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공동체 안에도 믿음의 영웅들이 많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너무 멋지게 그리고 헌신적으로, 때로는 자기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임원으로 순장으로 리더로 찬양팀으로 또 다른 부서에서는 교사로 찬양대로 너무 멋지게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기존의 틀을 깨고 개혁적으로 새롭게 뭔가 해보려고 용기있게 도전하는 중풍병자의 친구들 같은 영웅들도 있고 서기관들처럼 안전하고 신중하게 하지만 확실하고 성실하게 공동체를 지켜가는 영웅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탁월하고 능력 있는 영웅들이 많이 있어도 영웅들만으로는 믿음의 공동체가 세워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웅들만 많으면 오히려 각자의 명분과 능력이 부딪혀 반드시 싸움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능력이 클수록 큰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이들의 힘을 하나로 모아 건강한 믿음의 공동체를 세울 수 있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자기 희생적인 영성, 자기 희생적인 리더십을 가진 리더가 있어야 합니다.
지난주에 한 청년과 대화를 나누다가
후배들의 연약함을 덮어 주는 선배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동안 그렇게 하지 못한 것 같아서 너무 부끄럽고 미안하다는 겁니다. 누군가의 연약함이나 실수를 보면 판단하고 정죄하기는 쉽지만 같이 책임을 져주고 그 비난과 비판을 대신 받아주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데, 그동안 그렇게 하지 못한 것 같아서 너무 부끄럽고 미안하다는 겁니다.
하... 이 이야기를 듣는데 저는 오히려 제 얼굴이 뜨거워지더라구요. 부끄러우면서도 감사했습니다. 왜 감사한지 아세요? 공동체 안에서 자정작용이 일어나고 있는거잖아요? 공동체를 회복하고 일으켜 세우는 예수 그리스도의 리더십 자기를 희생하고 내어 주면서 상대방의 죄와 허물을 덮어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적 리더십이 회복되고 있는 거잖아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될 수 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리더가 될 수는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를 보면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리더십이 필요한 자리가 너무 많습니다. 사랑방에도, 목장에도, 여러 사역 팀에도, 임원들 가운데도 이런 영적인 리더십에 목마른 곳이 너무 많습니다. 영웅적인 능력을 구하는 것도 좋지만 진정한 캡틴이신 예수님께서 자기를 내어주신 영적 리더십으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여 주신 것처럼 여러분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캡틴이 되어 주십시오. 저도 캡틴 보다는 아이언맨이 좋습니다. 조금 이기적이지만 개성있고 능력있고 멋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공동체에는 캡틴과 같은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절대로 좋은 공동체에 만족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정체 되고 썪게 되는 겁니다. 위대한 공동체를 꿈꿔야 합니다. 위대한 공동체에는 위대한 리더십이 반드시 필요하겠죠? 앞에 서있는 이들 뿐만 아니라 동역하는 모두에게 이런 리더십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영적인 리더십으로 위대한 공동체를 함께 이루어 가는 노량진 교회 청년 공동체가 되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언합니다!
<기도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