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626 저녁] 여호와 이레의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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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338[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본문 창22:14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본문이다. 어쩌면 본문만 보아도 어떤 내용이 설교될지 짐작하실 분들도 계실 정도로 오늘 본문은 아주 유명한 본문이기도 한다. 오늘 본문은 “여호와 이레" 를 말씀하신다. 오늘 본문을 통해 “여호와 이레"에 담겨 있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 보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셨다. 1절을 보라.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러자 아브라함은 주께 즉각 응답한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평소 성경을 깊게 묵상해오던 분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하신다는 내용을 보면서 고민에 빠질 수 있다. 왜냐하면 약1:13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 1절에 등장하는 시험이라는 단어와 야고보서에 등장하는 시험이라는 단어는 서로 의미가 다르다. 우리 한글 성경에는 동일하게 시험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문맥을 고려할 때 실제 원어상의 의미는 서로 다르다. 오늘 본문 1절에 등장하는 시험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의 신앙을 더욱 견고하게 하시기 위해 행하시는 일종의 테스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이 이 테스트를 통과하여 더욱 하나님을 잘 섬기기를 원하신다.
반면 약1장에서 등장하는 시험이라는 단어는, 사탄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술수를 행하는 일종의 미혹 행위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 받는 시험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고, 오직 자기 욕심에 미혹되어 사탄이 그 틈을 노리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영어 성경 번역본 에서는 두 구절에 나오는 시험이라는 단어를 각기 다르게 번역하기도 한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시험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시기 위해 베푸시는 일종의 테스트이다. 결코 그를 넘어뜨리기 위한 미혹행위가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 테스트에 통과하여서 여호와 하나님을 더욱 바르게 알고 제대로 섬기기를 원하셨다.
그런데 그 시험의 내용을 보라. 아브라함에게 매우 부담되는 내용이다. 창22:2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우리는 이 내용의 결과를 알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 순종하여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렸다고 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 명령이 어떤 것인지 상세히 안다면, 이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명하신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노력해서 얻은 아들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사라가 출생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주신 독자였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 바로 앞장에서 그 이삭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노라고 약속까지 해 주신 상황이다. 앞으로 이삭을 통해 수많은 주의 자녀들이 태어날 것이며 그의 후손을 큰 민족으로 만드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그가 만난 첫번째 큰 난관이다.
두번째 난관이 있다. 이삭을 그냥 바치라는 게 아니라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후대에 모세를 통해 번제 드리는 방법을 말씀해 주셨다. 번제는 레위기에 기록된 대표적인 5대 제사중 하나인데, 그 명칭이 말하는 것처럼 제물을 불살라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레1 장을 보면 그 방법에 대해 상세히 말씀하시는데, 제물을 번제로 드릴 때에는 먼저 피를 흘려 그 제물을 죽여야 한다. 도살장에서 소나 돼지를 잡는 것처럼 아들을 각을 떠서 내장과 다리를 물로 씻어내어야 한다. 피를 모두 쏟아내고 제단에 그 피를 뿌리며, 그 아들을 모두 제단위에서 완전히 불살라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방법이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보라. 아브라함이 100세나 되어 겨우 얻은 독자 이삭을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다시 달라 하신다. 자기 아들을 마치 짐승 잡는 것 마냥 각을 뜨고 피를 다 쏟아내고 제단 위에서 완전히 불살라야 하는 상황이다.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아들을 주실 때는 언제고 이제는 그 아들을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다시 거두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와 같은 명령을 하셨다면 어떠했을까. 우리 중 누구라도 그 명령 앞에서 심각하게 고민하지도 않고 말도 안되는 명령이라며, 그 명령을 거절했을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러실 일 없다며 거부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자기 아들 이삭을 데리고, 또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그 산으로 향한다. 사흘 길을 걸어 아브라함이 멀리서 그곳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 때 아브라함은 두 종들에게 말한다. 창22:5 를 보라.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여기서 기다리라고 한 이유는, 어쩌면 자기 아들 이삭을 잔인하게 번제로 올려드리는 참담한 광경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을런지 모른다. 그런데 그 후에 그가 한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린다. 이어지는 5절 하반절 말씀을 보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들 이삭과 함께 저기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겠다는 말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는 말씀은 정말 의아하게 들린다. 왜냐하면 지금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을 죽이러 가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삭을 잔혹하게 번제물로 하나님께 드린 이후에도, 다시 아들과 함께 두 종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겠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한 장례식을 다녀왔다. 시신을 화장하고 남은 부분들을 유골함에 담기 위해 유족들을 불렀다. 다 타고 남은 재들을 보여주는데, 정말 한 줌의 흙이었다. 지금 아브라함이 하는 말이, 자기 아들을 번제로 불사르고 그 남은 한 줌의 흙을 종들에게 다시 가져오겠다는 말인가? 아니면 종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우리는 이상하게 들리는 아브라함의 말을 대수롭게 여겨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아주 심오한 신앙고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히11:17-19 를 함께 읽어보자.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창22 장 당시 아브라함의 믿음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태워 하나님꼐 드려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줄로 확신했다. 이것이 방금 읽은 히11:19 이 증언하는 바이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물론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이런 놀라운 믿음을 소유한 것은 아니었다. 100세가 된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을 때 그는 그 약속을 비웃으며,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합니다” 라고 했던 자였다. 그러나 그 이후로 여러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직접 체험하게 되자. 아브라함은 마침내 부활신앙을 갖게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야말로 죽이기도 하시고 다시 살리기도 하시는 전능자이심을 그는 확신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100세가 되어 죽은 것 같은 자기와 아내의 몸을 통해 새생명이 태어나자 이 믿음이 확고해진 것이다.
더구나 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네 자손을 통해 모든 언약 백성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그는 굳게 붙든 것이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통해 열방이 복을 받으려면, 이제 한 가지 방법 뿐이다. 아브라함 자신이 그 아들을 불살라 번제로 하나님께 드려도, 하나님은 그 아들을 다시 살리시는 방법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정말 말도 안되는 명령이더라도,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었기에 그 말씀에 즉각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도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명령을 주실 때가 있다. 내 상황이 지금 그 명령에 순종하기 어려운 상황임에도 때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그 명령에 순종하라는 하나님의 강권하심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그 명령은 여러분들의 직장 가운데서 나타날 수 있고, 교회 상황과 관련하여 나타날 수도 있다. 아니면 내 삶의 아주 소중히 여기는 것을 내려놓으라는 강권하심일수도 있다. 만일 이런 상황이 닥칠 때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겠는가.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반응하시겠는가. 아니면 내 머리로 계산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제한하며 그 명령을 거부하시겠는가. 이해할 수 없는 그 명령에 믿음으로 순종한다면,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은 놀라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아들과 함께 하나님이 명령하신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120세 가까이 된 노인이 힘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어느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인지, 번제에 사용할 나무들을 아들에게 짊어지게 한다. 그리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오른다. 이 때 아들이 아버지에게 묻는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에 사용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에 아버지는 대답한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한글번역에는 친히 준비하실 것이라고 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준비하시리라"는 것이 아니라 “보고 계신다" 혹은 “보여주신다" 라고 되어 있다. 즉 번제할 어린 양을 하나님께서 지금 보고 계신다 혹은 보여주신다는 의미이다. 이 말에는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번제할 어린 양이 바로 너 이삭이란다" 라는 아브라함의 의도가 담겨 있을 가능성이 크다.
아무튼 칼을 들기 전까지 아들을 안심시켜야 하는 아버지의 입장이 참 안쓰럽게 다가온다. 마침내 말씀하신 장소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깔아놓고 아들 이삭을 제단 위에 묶는다. 아버지의 말도 안되는 행동이 이어지고 있다. 거기에 아버지는 120세 노인이다. 이삭은 충분히 저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여호와 하나님을 굳건히 신뢰했던 것처럼 그 역시도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했기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곧바로 칼을 쥐고 아들을 찌르려했다. 이 때 여호와의 사자가 급하게 아브라함을 부르신다. 창22:11-12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그 순간 아브라함이 당황하여 눈을 들어 살펴보니 한 숫양이 수풀에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그 숫양을 자기 아들 이삭을 대신하여 여호와하나님께 번제로 드린다. 그리고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 라고 부른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렷듯, 여호와 이레의 정확한 의미는 ‘여호와께서 보여주신다 혹은 보고 계신다' 라는 뜻이다. 이삭에게 초점을 맞출 때에는 ‘보고 계신다' 라고 번역하고, 수풀에 걸린 숫양에게 초점을 맞출 때에는 ‘보여주신다' 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준비하신다' 라는 말은 후대에 성경학자들이 문맥상 의역한 것이다. 히브리어 사전에서 이러한 의미를 찾아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이 의역이 틀렸다고 하긴 어렵겠다.
어쨋든,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보여주신다. 보고 계신다. 그렇다면 무엇을 말인가? 하나님께서 단지 아브라함에게 숫양 한 마리를 준비시켜 보여주셨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오늘 본문을 기록했을까? 표면상으로는 그렇게 보이지만 궁극적인 이유가 있다. 요8:56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친히 들려주신 말씀이다. 예수님이 증언하신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예수님께서 오실 때를 미리 보고 즐거워하며 기뻐하였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예수님의 때를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 때를 믿음으로 미리 내다보았던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성육신하기 이전의 모습으로 하늘에서 아브라함을 분명 지켜보고 계셨다. 예수님께서 이 장면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진리가 무엇인가? 그것은 먼 훗날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본인이 직접 아버지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보여주시는 어린 양이 되어, 번제물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겠다는 ‘복음'이다. 복음.
이것은 성경을 관통하여 증언하는 진리이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일러주신 산은 모리아 산이다. 놀랍게도 솔로몬은 바로 이 곳에 성전을 건축한다. 구약의 성전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예표한다. 더욱 놀랍게도 모리아산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골고다 언덕이 포함되는 곳이다. 물론 정확한 위치에 대해 그 누구도 모르지만, 골고다 언덕은 모리아 산의 일부임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독생하신 아들께서 행하실 구속사역을 미리 보여주셨다고도 볼 수 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자기 아들을 죽여야만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브라함에게 심어주셨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보여주시는, 또한 준비하시는 번제할 어린 양이 그분의 독생하신 아들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아브라함아, 네가 지금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에서 번제로 바치려 하듯이, 나도 내 유일한 아들 예수를 먼 훗날 이 곳에서 번제로 죽이려 한다. 네가 믿음으로 고백한 대로, 번제할 어린 양을 하나님인 내가 친히 인류를 위해 준비하여 보여주려 한다. 네가 이삭을 번제로 불살라 죽여도 내가 살려내리라 믿었던 것처럼, 나도 내 아들 예수를 번제로 십자가에서 죽이고 다시 살려낼 것이다" 감히 추측하건대 하나님께서 이런 마음으로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지 않으셨을까.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 이유는 단지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 순종했다는 사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히11:1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는 이유는, 아직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오심을 미리 내다보고 기뻐하였다는 데에 있다. 아브라함은 주전 2,000년 대에 생존했던 인물이다. 그는 2천년 뒤에 일어날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두고 미리 기뻐하며 즐거워했던 것이다. 이것이 여호와 이레에 담긴 신앙고백이다.
이는 엄청난 믿음이다. 왜? 우리는 불과 일주일 뒤에 일어날 일, 아니 당장 한두시간 뒤에 일어날 일을 두고도 하나님께 맡기기는 커녕 심각하게 염려한다. 사업가들은 내년 사업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두고 염려하고, 학생들은 내년에 어느 학교를 진학해야 할지를 두고 고민하며,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들은 어느 직장에 들어가야 할지를 두고 고민한다. 물론 우리는 이런 것들을 전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전능하신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미리 기뻐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하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생각해보라.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 100세나 된 노인을 통해 어떻게 자녀가 출산이 되고, 어떻게 큰 민족을 이루게 되겠는가. 인간의 생각과 상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떠해야 하는가? 내가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굳게 붙든 적이 있나. 아님지금 내 삶의 문제에 파묻혀서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대신 세상의 방식을 붙들고 있지는 않는가. 지금 당장 어떠한 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미리 기뻐할 수 있는가?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 앞에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이미 이루어진 사실을 두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큰 믿음이 아니다. 아직 응답받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언젠가 가장 선하신 방법으로 그 기도제목들에 응답하실 것을 두고 미리 기뻐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결론을 맺는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즉각 순종하는 믿음이었다. 말도 안되어 보이는 주님의 명령에 즉각 순종하였던 그의 믿음을 기억하라. 또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부활의 믿음이었다. 이삭을 번제물로 불살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리라는 부활의 믿음이다. 또한 그의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확신하는 믿음이다. 노년이 되어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이삭을 주실 것을 확신했던 그의 믿음이었다. 또한 그의 믿음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에 대하여 믿음으로 미리 기뻐하였던 믿음이다. 그로부터 2천년 뒤에 임할 주님의 임재를 미리 내다보고 기뻐하였던 그 믿음을 기억하라.
여호와 이레의 믿음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즉각 순종하는 믿음, 부활의 믿음, 바라고 확신하는 믿음, 미리 기뻐하는 믿음. 이 믿음이 수 천년 전 아브라함 만의 믿음이 아니라, 오늘 이 자리의 저와 여러분에게도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찬송 314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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