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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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합니까? (행 1:15-26)
[ 서론 – 문제제기 ]
행복합시다. 아멘, 오늘은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합니까..’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믿음의 여정, 곧 우리가 믿음으로 걷는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중요한 방향타와 같은 우리의 “시선..” 즉, 우리 마음이 어디를 주목하고 바라보아야 하는지..오늘 본문을 통해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먼저, 시선이란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즉 눈이 가는 길, 눈의 방향이라는 문자적 뜻이 있고, 주의 또는 관심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2절에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다..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눈, 우리 눈의 방향은 바로 우리의 마음을, 우리 전 존재, 영혼이 반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 22절을 앞뒤로 하신 말씀이 바로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이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의, 식, 주 먹고 입고 마시는 것을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아라.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그것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가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이 세상에서 온갖 부귀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보다도 길가에 피는 이름모를 꽃이 더 영화롭다. 왜인가?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입히시고 먹이시기 때문이다.
너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시니,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고 살아라. 그런 것들은 믿지 않는 자들이나 하고 사는 생각들이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해라. 그리하면 나머지 것들은 주님께서 채워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눈, 즉 우리의 시선이. 더 구체적으로 우리의 마음, 우리의 영혼을 이 땅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 하나님 나라의 것으로 방향을 틀어야 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 문제는 곧, 우리의 마음의 문제요, 우리 영혼의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너희의 시선을 바로 나,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두라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안이 중대한 문제임을 알면서도, 우리의 삶 가운데 그러한 것들이 실제적으로 잘 적용되지 못함을 자주 느낍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시선을 둘 수 있는 것일까..에 대해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 본론A – 우리의 존재를 알아야 하나님을 향해 시선을 돌릴 수 있다 ]
먼저 오늘 본문은 ‘한 사도, 즉 한 제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속해있던 사도들에 대해서 말하며, 그 사도가 해야할 직무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의 시작이 이러합니다. 우리 사도행전 1장 2절-3절을 한번 읽어보게습니다.
“거기에 나는, 예수께서 활동을 시작하신 때로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지시를 내리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날까지 하신, 모든 일을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신 뒤에, 자기가 살아 계심을 여러 가지 증거로 드러내셨습니다. 그는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여러 차례 나타나시고,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들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멘.
여기 1절에 “거기에서..”는 “누가복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하였습니다.
다음으로 그가 택하신 사도들..이란 말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사도’를 구별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있어서 본문에 적힌 헬라어 aposteles의 이 ‘사도’ 직분이라 말하자면, 바로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사역 기간에 그분과 함께 다니고 배웠던 ‘제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분의 십자가 상의 죽음과 ‘부활’을 직접 목격한 자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어떠한 측면에서는 오늘날의 우리 같은 ‘제자’와는 조금 구별되는 조금은 특별하게 세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늘날 어떻게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대한 일들을 인식하고 믿게 되는 것입니까?’ 바로 그것들을 입으로, 글로, 그리고 삶으로 전해주는 증인들을 통해 믿게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위해서 가장 먼저 예수님께서는 열 두 명의 제자, 즉 사도들을 먼저 세우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중 사도 중 한 사람 ‘유다’에 대한 이슈가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복음서에서 그는 예수님을 은 삼십냥에 예수를 잡으려는 사람에게 팔아넘긴, 앞잡이라 성경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을 직접 보고 가르침을 받고 함께 활동하던 제자 중 한 사람,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배교..’라고 합니다. 즉 주님을 배신한, 교회를 배신한 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본문은 이 배교자에 대해서 ‘이미 앞선 시대의 신앙인 다윗의 입을 통해 미리 말씀하셨다, 예견하셨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도행전 1장 16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를 잡아간 사람들의 앞잡이가 된 유다에 관하여, 성령이 다윗의 입을 빌어 미리 말씀하신 그 성경 말씀이 마땅히 이루어져야만 하였습니다..”
“미리 말씀하신 성경말씀이 마땅히 이루어져야만 하였다..”
참 궁금합니다. 왜 성경은 모든 것이 이렇게 될 줄 알면서, 즉 유다라는 사람이 배신할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방치하시는가..! 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유다의 죄를 억제하지 않으시고 방임하시는가..?
성경이 한 배교자의 단순히 “어차피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유다는 지옥갈 운명이기에, 그렇게 그길을 가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이 누구는 구원받고 누구는 지옥에 간다라는 “예정론”입니까?
절대..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자유의지” 라는 것을 주셨습니다. 이 자유의지라는 것은 바로 인간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즉 “선택”에 관한 부분으로 연결됩니다. 이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선택’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이 자유의지가 온전히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부합하길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생각과 감정이 없는 로봇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문답서의 첫 질문이 이것입니다.
“사람의 첫째가는 최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 사람의 첫째가는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자발적으로..자발적으로..그분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길 원하시는 마음을 가지고”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간은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 반역을 자발적으로 선택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아담의 원죄, 선악과 사건으로 인해 우리는 그 첫 사람인 아담의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 반역감, 제멋대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그 죄”의 오염을 물려받았습니다. 우리 로마서 5장 12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또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온 것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멘.! 바로 이것로부터 온 인류의 ‘도덕성’이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허리에서 난 자들, 즉 인류가 함께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본질’인 것입니다.
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가?
미국의 탁월한 복음주의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문제를 탁월하게 논증했습니다.
“정직하고 선한 행위를 아무리 많이 생각해 봐야 별 소용이 없다. 추측하건대, 그 어떤 선한 행위의 결과나 효력마저 철저히 압도할 수 있을 만큼 심각한 도덕적 사악함으로 향하는 성향이 존재한다.
이 끔찍한 성향,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의 경향성, 죄를 향한 그 마음과 시선이 이 우리 안에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아멘.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어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바로 그 본질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받았음을 말합니다. 아멘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받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분을 찬양하고 감사를 돌리는 것, 그것이 우리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이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뒤로 로마서 5장 15절은 곧바로 이렇게 말합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에 생긴 일은, 아담 한 사람이 범죄 했을 때에 생긴 일과 같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로 한 사람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더욱 더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 즉 그분 한 사람이 은혜 통해 받은 선물,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 생기는 일입니다. 아멘이시죠?
그렇다면 왜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말씀을 통해 깨닳아야합니까? 조금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 본론B – 영혼 구원의 시급성과 그 필요성에 대해 ]
오늘 본문 20절에 베드로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의 거처가 페허가 되게 하시고, 그 안에서 사는 사람이 없게 하십시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배교자를 통해 우리에게 경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희에게도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으니..조심하라..” 경각심을 일깨워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동일하게 앞에서 논증했듯이, “죄를 향한 마음의 경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교훈은 “우리 안에 끊임없이 죄를 향한 갈망과 경향성”이 있고, 그 악한 성향으로부터의 본질적인 구원이 시급하게 필요하다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유다처럼, 불의한 의도와 행동을 통해 주님을 욕되게 하지 말라!, 그 불의한 값으로 취한 그곳에..바로 그 안에서 사는 사람이 없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2장 20-2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운 것들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거기에 말려들어서 정복을 당하면, 그런 사람들의 형편은 마지막에 더 나빠질 것입니다.
그들이 의의 길을 알고서도 자기들이 받은 거룩한 계명을 저버린다면,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했던 편이 더 좋았을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속담이 그들에게 사실로 들어맞았습니다.
‘개는 자기가 토한 것을 도로 먹는다. 그리고 돼지는 몸을 씻고 나서, 다시 진창에 둥군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신앙을 잃어버리면, 배교한다..그리고 더 나아가 사명을 잃어버리면, 반드시 타락한다..” 그렇습니다. 유다는 신앙을 잃어버렸고, 동시에 사명 또한 잃어버려 마침내 배교의 길, 죽음의 길에 처해졌습니다. 우리 24-25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기도하여 아뢰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는 주님, 주님께서 이 두 사람 가운데서 누구를 뽑아서, 이 섬기는 일과 사도직의 직분을 맡게 하실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시오. 유다는 이 직분을 버리고 제곳으로 갔나이다..“
“유다는 이 직분을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유다는 섬기는 일과 사도직의 직분 그 모두를 버리고 죽음을 택했습니다.
바로 이처럼 신앙을 잃어버리면 배교하고, 사명을 읽어버리게 되어 반드시 타락하여 멸망의 길을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그 경향성 때문에, 우리 역시 이것에서 이땅에서 완전히 자유할 수 없고 마땅히 해야 할 영적의무들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찌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워주신 이 직무, 25절의 말씀처럼 봉사와 와 및 사도의 직무를 감당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오늘 본문에 분명한 길을 하나님께서 가리키고 계십니다. 바로 22절입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로부터 예수께서 우리를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날까지 늘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을 뽑아서, 우리와 더불어 부활의 증인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 이라는 말에 주목해보십시오.
여러분, 우리가 신앙을 가졌다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단순히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어 천국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입니까? 물론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절대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오늘 말씀, 그 그대로, 우리가 “부활의 증인,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세상에 증언해야 했던 위대한 일은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메시야 되심을 보여주는 큰 증거입니다.
12명의 제자들, 그들이 사도로 세워진 목적은 세속적인 지위와 지배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증인이라는 것은 직접 보고 듣고 배운 것을 고대로 전하는 것, 그런 것을 증인이라고 합니다. 아멘입니까? 내가 보고 듣고 배우지 못한 것을 누구에게 전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내가 증인이 아닌데, 누구에게 증거한단 말입니까?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로 우리가 먼저 다른 것이 아닌 이 부활의 증인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장 22절에,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야, 그가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서, 성경 말씀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 그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깨닳아야, 이 성경의 수많은 주님의 가르침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
또 베드로전서 1장 3절에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타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산 소망을 갖게 해주셨으며..”
말씀 그대로 우리의 살아 숨쉬는 생명력이 넘치는 진정한 소망, 이 땅에서의 소망이 다름아닌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가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고 이 부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부활을 깨닳을 때, 하나님의 말씀, 성경의 모든 진리를 깨닳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참 소망이 된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부활이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죽었던 것이 다시 살아났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부활 전에 무엇이 있습니까? 바로 죽음이 있습니다.
찬송가 487장에
“어두운 후에 빛이오며 바람분 후에 잔잔하고 소나기 후에 햇빛나며 수고한 후에 쉼이 있네. 연약함 후에 강건하며 애통한 후에 위로 받고 눈물난 후에 웃음있고 씨뿌린 후에 추수하네. 괴로움 후에 평안있고 슬퍼한 후에 기쁨있고 멀어진 후에 가까우며 고독함 후에 친구있네
고생한 후에 기쁨있고 십자가 후에 영광있고, 죽음온 후에 영생하니, 이러한 도가 진리로다..아멘..
세상에 뭐 이런 찬송이 다있답니까..정말 복음적인, 우리의 삶을 위로하는 찬송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먼저 죽음을 경험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 그 근원적인 문제를 당신이 죽음으로써 해결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끝이 아니라 바로 그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그 죽은 자들, 잠자는 자들의 첫 본보기, 첫 열매가 되신 것을 친히 우리에게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열매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바로 “영혼 구원”인 것입니다. 먼저 나 자신의 영혼이 구원을 얻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그 부활의 증인되어, 죽음의 길로 치닫는 다른 영혼을 구원하여 다시 끔 부활의 증인삼는 것, 그것이 바로 제자 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영혼구원에서 우리의 삶이 새롭게 출발하는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잠언 29장 18절에
“계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이 행한다.”
Vision,비전이라는 것, 이것은 우리의 꿈 ,Dream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 사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예언적 비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전, 뜻을 저버리는 자들은 방자히 행하며, 제 멋대로 살다가 결국 고통스럽게 삶을 마감합니다. 그래서 사명을 잃어버리면, 예 조금 언짷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반드시 타락합니다.
그러나 삶이 아무리 고단하고 힘들어도, 사역이 아무리 고단하고 힘들어도 바로 이 비전, 영혼 구원의 “열매”가 있으면 진짜 행복합니다.
내 꿈, 나 병든 옛 자아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이 행복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우리 삶에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가 행복을 쟁취하는 비결인 것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매 주일 예배하는 것입니까? “안녕하세요 하나님, 이번주도 저 왔어요~“ 마치 출근 도장 찍듯이 예배에 나가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았음을 감격하며 그분을 기뻐하며 찬송 가운데 영광을 돌리며, 이 기쁨이 내 안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또 다른 영혼 구원을 향한 사랑과 섬김의 순종으로 나아가기 위함이 아닙니까? 아멘입니까?
왜 우리가 끊임없이 사는 날동안 말씀과 기도 생활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향한 그분의 뜻! 그것을 끊임없이 깊이 깊이 마음 속에 되새기며 깨닫기 위합니다.
히브리서 3장 1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부르심을 함께 받은 거룩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요,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히브리서 기자는 앞장 2장에서 바로 큰 구원, 구원의 창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논증한후, 바로 앞의 3장에서 “그러므로..” 결론으로..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너희여,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이 아닌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그분이 어떤 분인지, 그분이 우리에게 어떤 효과를 주는 것인지,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이시다. 그분이..
영어성경. NIV버젼에서는 “fix your thoughts on Jesus”라고 번역되었습니다.
fix, 고정시키다, 고착화하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단순히 한 두 번 깊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그분께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어떤 문제가 있습니다. 그 문제로 인한 어떤 어려움이 발생했습니다. 물론 그 어려움을 우리는 해결해야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문제만을 해결하는 것이 우리 영혼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좀 더 근원적인 문제로 다가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것이 “영혼의 문제”입니다.
그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유일한 분이 바로 우리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시선, 즉 마음의 방향을 끊임없이 하나님께 돌려놓아야만 합니다. 아니 오직 그분께 고정시켜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의 할 수 있는 모든 몸부림을 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우리 삶의 소망이고 위로가 되며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 결론 ]
말씀을 맺겠습니다.
한번은 우울증, 중독 등의 회복 사역을 하시는 목사님을 만나 대화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질문도 하고 이야기를 하던 중에, 그 목사님께서 갑자기 제게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전도사님, ‘성육신’이 뭘까요? 한번 전도사님이 전도를 한다는 가정하에 쉽게 설명을 좀 해보세요..”
그래서 제가 선뜻 그랬지요, “성육신이란, 하나님이 우리의 꼭 같은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아 그랬더니 대번에, “에이..너무 어렵습니다..” 그러시네요.
그래서 좀 더 풀어서 또 그랬지요, “성육신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이 되셔서 우리를 이해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자 둘 다 틀린답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렵습니다. 그러는 것이에요..그래서 모르겠습니다...그랬죠...
그분이 빙그레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구요,
“성육신이란, 예수께서 우리의 눈을 맞추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눈맞춤입니다..” 아..
사랑하는 여려분,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의 눈을 바라보게 됩니다. 지긋이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마주 보고 눈을 바라볼 수 없다면, 한쪽이 자꾸 고개를 돌리거나, 얼굴 마주하기를 어색해 한다면, 무엇인가가 부족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곧 그분께서 우리 앞에서 우리의 눈을 맞추시는 것입니다...
제가 눈물을 글썽이며..아멘, 목사님 참 그러네요..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 지금도 우리와 눈을 맞추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눈을 바라보신다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기 위함이요, 우리의 삶을 깊이 이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공감’입니다.
제가 지난 날의 제 삶을 뒤돌아보며, 지금도 끊임없이 애통한 것은 바로, 이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이 내게 없구나..그렇게 공감해주지 못했구나..라는 것입니다. 나의 부모님께, 내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에게 이 ‘공감..’ 그 분들의 눈을 마주칠 수 없었구나..
왜 여전히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부활하셔서 여전히 살아계셔서, 내 앞에서 나의 눈을 바라보고 계신데, 나는 여전히 고개를 쳐박고 이 땅을 바라보며, 또 회피함으로 허공을 응시한 것은 아닌지..
베드로전서 5장 8절-9절에,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 악마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악마를 맞서 싸우십시오. 여러분도 아는 대로, 세상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자매들도 다 같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사단이 마치 “우는 사자와 같이..” 여러분 큰 짐승이, 사자가 울면 연약한 자들은 그 자리에서 얼어 붙습니다. 꼼짝없이 두려움으로 얼어붙습니다. 사단의 권세가 이와 같습니다. 고난 앞에서, 사단이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를 아무것도 못하게 꼼짝없이 두려움과 회피로 붙들어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십시오. 말씀을 깨닫고 주저하지 말고 싸우십시오..“ 믿음의 용기를 가지고 굳게 서십시오..아멘..
부활하신 주님을 똑바로 바라보십시오. 두려움과 우울감, 패배감으로 고개를 떨어뜨리지 마십시오. 사단이 할 수 있는 것 거기 까지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주저앉아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아멘입니까?
우리가 누군가의 영혼 구원을 위한다는 것은 곧,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되어, 먼저 그분의 눈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옆의 지체, 불신자들의 눈높이에서 그분들의 눈을 맞추며, 깊은 공감을 해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의 증인들이 살아가는 매력적인 삶인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우리의 목장이, 우리 공동체의 시선이, 두려움과 회피로 묶인 삶이 아닌 바로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님의 눈을 맞추길 원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예수님의 마음으로 우리 목원들의 눈을 맞출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 찬송 :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사랑하는 여러분 이시간 함께 기도하길 원합니다. 하나님 이 시간 다시 믿음의 눈을 들어, 먼저 우리 앞에 살아 역사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눈을 다시 한번 바라보길 원합니다. 바로 그 예수님의 사랑의 시선을 가지고 또 다른 영혼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저희들 될 수 있도록 우리 함께 주님의 이름 간절히 부르며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