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윤리 기말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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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에 대한 요약(2장)
성화는 거룩하게 됨을 뜻한다. 신자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의 말씀을 따라 점진적으로 거룩해야 한다. 여기서 문제가 드러나는데 성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성화의 방식에서 인간의 역할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공로주의로 빠질 수 있다. 인간에게 아직 죄성이 있게 스스로 성화를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시작하여 은혜로 마쳐야 한다. 그러나 성화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이 너무나 강조되어 인간의 책임을 축소하는 것도 문제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역할을 균형 있게 해야 올바른 성화의 삶을 살 수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의 justificatio는 법정적 칭의 의미보다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바른 사람이 된다는 의화의 의미가 강하다. 즉 로마 가톨릭 교회가 말하는 의화는 실효적 의화(justificatio effectiva)를 말하는데, 단지 실질적인 죄 용서를 받는 것뿐 아니라 은총을 선물로 받아 내적 인간이 성화되고 쇄신되는 것까지 포함한다. 로마 가톨릭은 칭의와 성화의 불가분성에 큰 무게 중심을 두었고 그 결과 칭의와 성화의 상호 구별성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그들이 보기에 인간이 타락 후에 박탈당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부여 받은 첨가된 초자연적 선물이다. 타락 후에도 인간 본성과 결부되어 존재하는 자연적 의(justitia naturalis)는 상실되지 않은 채 여전히 존재한. 즉 타락의 충격 여파는 덧붙여진 선물에만 미치고 본래 인간이 가지고 있었던 자연적 의에는 미치지 않았다. 결국 로마 가톨릭이 보는 인간은 “전적 타락”이 아닌 “부분 박탈”아래 괜찮은 인간이다. 로마 가톨릭은 의화되기 위해서 인간은 반드시 자신의 의지를 미리 움직여서 의화에 합당한 성향과 욕구를 갖추어야 하며 이는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으로 하나님과 협력 아래 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화되기 위해 인간의 역할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의화의 프레임 안에 하나님의 은총의 “선행적 필요성”을 끊임 없이 강조한 점은 칭찬해야 한다. 그러나 결국엔 반 펠라기우스주의적 색채를 띨 수 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시작하지만 인간의 자유선택과 공로가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하며 끝을 맺는 구조를 가진 로마가톨릭의 성화교리는 성화의 균형을 이루고 있지 않다.
루터에게 있어 타락 후 인간은 “근원적 타락”을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과 깨진 관계를 스스로 회복할 능력을 “전적으로 상실한” 인간이지 로마 가톨릭교회가 가르치듯이 주입된 은총을 덧입은 자연적 의로 차후에 직복직관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이 아니었다. 심지어 이 원죄는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된 후에도 인간 근원 깊숙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했다. 루터에게 성화란 신자의 인간 본성에 뿌리박혀 있는 내주하는 죄와 평생 걸쳐 대항하는 지속적인 싸움이다. 그래서 매일 회개를 강조하므로 루터의 성화는 점진적, 종말론적이다. 그는 성화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가 개입되는 것, 내부적 의 혹은 거룩함이 아니라 반드시 외북석 의에 근거해야한다고 말했다.
콜브뤼게는 성화를 하나님 영광이라는 틀 안에서 시종일관 은혜의 영역에 위히차는 것으로서 이해했다. 그의 성화론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나치게 성화를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영역에서만 이해한 나머지 인간의 책임을 경시하게 되었고 성화의 균형이 무너졌다.
결국 성화의 궁극적인 주체와 원동력은 인간의 선행적 준비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말씀이시다. 그러나 성화는 하나님의 주권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인간은 스스로의 자연적 의에 살아가는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죽음돠 부활의 덕에 참여한 중생된 인간이므로 성화의 공로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 그 안에서 인간이 해야 할 책임을 인식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매헌은 인간 의식의 자율성을 강조했고 성결하게 되기 위해 인간 의식에 근거한 자유선택이 주도권을 쥐고 참여했다. 하지만 여전히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은혜를 받거나 혹은 거부할 최종 주도권은 인간의 의식과 의지에 다소 치우쳐 있는 매헌의 논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역할 사이의 주도권 경쟁에 팽팽한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성화의 균형을 깨뜨린다.
케직 신학의 영성은 본받을 점이 있다. 그들은 인간의 능동성보다 수동성에 더 강조를 두었고 성화 역시 하나님이 하신다는 진리를 잘 수용했다. 하지만 케직 신학은 동시에 인간의 선택과 결단에 무게중심을 두었다. 하나님의 단독 사역의 시작으로 인간 선택이 먼저 작동되는 논리가 성립되므로 하나님의 사역이 먼저인지 인간 사역이 먼저인지 딜레마를 남기게 되었다.
성화는 한 번에 끝나는 것 아니라 전 생에 걸쳐 점진적으로 거룩한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성화 역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 중심적 성결 운동의 역사를 통해 알았듯이 인간의 자율성이 성화를 함에 있어서 시작점이 되지 않도록 계속 말씀과 성령으로 경계해야 한다. 최선을 닷해 거룩함을 위해 나아가되 그리스도의 완전한 거룩하심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한다.
머레이가 주장한 “결정적 성화” 개념과 바빙크가 주장한 “복음적 성화” 그리고 “수동적 성화” 개념의 공통점은 바로 성화의 균형 내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굳건하게 하기 위해 고안된 신학적 장치라는 것이다. 성화는 인간이 최선을 다해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는 거기에 절대로 이를 수 없다. 그러므로 성화에 있어서 신적 기원과 원동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이 나아가 결정적/복음적/수동적 성화를 가능하게 한다. 여기 안에서 더 이상 인간의 공로, 율법주의적인 성화론으로 빠지게 될 염려가 없다.
신자의 의지는 완전한 상태가 아니라 여전히 죄의 오염과 부패로 같은 인간 속에 있는 두 사람 사이의 싸움이 계속되며, 모든 사고와 말과 행동 속에 옛 사람과 새 사람에 속한 것이 자리하여 선과 악이 꼬여 혼합되어 화해와 정화를 필요로 하는 상태이다. 이때 신자의 거룩한 삶은 신자의 본성적인 의지에 근거하지 않고 창세 전에 삼위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과 의논의 결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녀로 택하신 예정에 근거하고 있다. 그 예정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는 교회의 중보자와 머리로 택함을 받으시고, 택자의 거룩을 위한 사역을 이루시고, 신자는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고 참된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므로 성화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즉 신자에게 있어 성화의 근원은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예정에 근거하며,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그 목적을 이루시며 신자는 신앙을 통하여 성화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처럼 신앙은 신자들이 성화를 이룸에 있어서의 유일하고 충분한 수단이므로,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앙 외에는 그 어떤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만일 신자의 의지와 성취로 인하여 자신이 무엇을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신자가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적을 빼앗는 것이 된다. 주님의 은총으로 신자 안에서 선행을 시작하시며 또한 끝날까지 이루시고 완수하시는 분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신자의 의지가 바른 일을 사랑하고 열렬히 원하며 그것을 추구하려고 분발하며 움직이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은총이며, 신자의 의지의 자율적 선택과 열심과 노력이 흔들리지 않고 성공을 향하여 전진하는 것이나, 이 모든 일을 신자가 꾸준히 계속하며 최후까지 인내하며 지켜내는 것도 모두 하나님께서 끝까지 지켜주시는 사역인 것이다.
책 내용에 대한 평가(2장)
최근 들어 구원의 서정 가운데 성화의 문제는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처럼 마음을 괴롭히고 성가시게 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삼십년이 훌쩍 넘었지만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화, 균형있게 이해하기’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이 책은 반드시 읽어야겠다는 다짐이 생겼다. 박재은 교수의 글은 단단하다. 명료할 뿐 아니라 단호하고 치밀한 주장은 독자들로 하여금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인간적인 추론이나 사변으로 지어낸 글이 아니다.
한국 교회의 신자들의 일반적인 윤리 수준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별 다를 것이 없다고들 한다. 신자 개개인의 생활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의 기관으로서의 유형성을 드러내고 있는 교회와 관련하여서도, 개 교회들 가운데 어떤 교회들은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세운 기관들보다도 오히려 윤리성이 부족하여 세간의 지탄을 받기도 한다. 교회가 세상의 사람들에게 윤리의 개선을 위한 본이 되는 일은 고사하고, 스스로에게 대하여 정화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조차도 의문이 제기되는 일이 종종 있음을 본다. 교회나 혹은 신자 개개인들이 세상을 향하여 윤리적으로 훌륭한 삶의 본을 보일 수 있기를 원하지 않는 신자는 없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교회사가 말하여 주는 바처럼, 일반적인 교회의 모습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룩함이라는 특성을 시원스럽게 보여주지를 못한다.
이러한 교회의 양상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좌절되었음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 것일까? 이 명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그 안에 머물도록 하는 조건인가? 그렇다면 이 명령을 완전히 순종할 가능성이 없는 우리에게는 정죄의 심판만을 더하는 것이며, 결국 우리에게는 오직 절망만이 남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정반대로,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한 낱 이상에 불과할 뿐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므로, 신자의 삶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며 무시하거나 순종을 포기해도 좋은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들은 신학적으로 혹은 신앙정서상으로 한편으로는 율법주의에로, 다른 한편으로는 율법폐기론에로 나아가는 잘못된 경향을 낳았다. 따라서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를 근거로 하여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함으로써 우리를 향한 성화의 책임 혹은 부르심에 대해 순종할 수 있는 것인지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경건 생활을 위한 필수적이며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
우리가 한편으로는 은혜주의 혹은 방임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율법주의의 영향으로부터 눌림을 받지 않은 채, 거룩함으로 나아가도록 부르시는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경건의 길은 있는가? 박재은 교수님의 “성화, 균형 있게 이해하기”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분명하고도 올바른 설명을 풀어준다. 교회사와 역사에 걸쳐서 구성이 되어 있는 “성화의 은혜”는 인간의 어떠한 행위도 하나님께로부터 보상을 받을 만한 공로를 가지는 것이 아님을 설명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행위의 완전함을 통하여 공로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믿음, 곧 우리 자신을 맡기는 것임을 바르게 지적한다.
그런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그의 사랑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믿음의 행위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오직 추악한 죄인일 뿐이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복음의 은혜에 대한 기쁨에서만 그것의 참된 동기와 가능성이 비롯됨을 강조한다. 성화란 예수님의 능력과 은혜를 통해 심령을 옭아매는 악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어 점점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라고 할 때, 이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의 결과일 뿐이며, 이 은혜의 사역은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사람으로 살아, 그리스도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으로 누리는 그리스도의 연합을 통해 이루어짐을 역설한다. 성화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결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에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신분이 달라지는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니며, 다만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통해 선을 행하는 능력이 주어지고, 또한 향상되는 결과를 낳는다고 말한다.
박재은 교수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및 역할의 균형”이라는 성경적이며 신학적인 개념에 근거하여, 한편으로는 선행의 결과에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호의를 얻는다는 식의 율법주의가,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율법폐기론이 올바른 성화의 교훈과는 적대적이며, 실제적으로 성화를 가능케하고 도모하는 일에 커다란 해악이 되고 있음을 매우 적절하게 비판한다.
본서는 이러한 성화의 원리를 강의 내용을 풀어 쓴 형식에 따라서 설명하고 있는 까닭에 읽기가 매우 수월하며, 이해하기 데에도 매우 커다란 도움을 준다. 뿐만 아니라, 교리적으로 매우 예민하고도 섬세한 취급이 요구되는 신학의 주제를 신자의 실제적 신앙 경험의 사례를 들면서 적용점과 생각할 점을 적절히 제시하여 주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역사와 선진들의 고백을 통해 성화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이해를 도모한다는 점에서 매우 훌륭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성화와 칭의의 관계에 대한 글이 좀 더 있었으면 한다. 예를 들면 김세윤 교수님의 책인 “칭의와 성화”에서 “ 전통적인 구원론에서는 칭의 다음에 성화가 이 단계적으로 이어지므로 윤리 없는 구원이라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치우친다는 것이다”라는 주장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책을 읽다가 궁금했다.
두 번째는, 칭의’와 ‘성화’의 통합이다. 김 교수에 의하면, “바울은 특히 유대인들/유대주의자들과의 논쟁의 상황에서 율법의 행위에 맞서 구원의 은혜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내기를 원할 때는 로마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3장 등에서 ‘칭의’(dikaioo/ to justify)의 언어를 선호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근본 문제를 세상의 오염으로 볼 때는 구원을 ‘성화’라고 표현하고 있다.”고 했다. 성화는 오염된 세상으로부터 구분되어 거룩한 하나님께 바쳐짐(그리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김 교수에게 “칭의”와 “성화”는 병행적인 구원론의 그림 언어들이다. 칭의와 성화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교수님의 반박을 알고 싶었다.
또 다른 학자인 멜빈 디히터는 개혁주의 전통이 흔히 칭의를 강조하지만 중생과 성화는 무시한다고 맗라며, 전적으로 전가된 의(객관적인 구원)는 크게 부작하는 반면에 나누어 받는 의(주관적인 구원)는 소홀히 취급된다고 지적된다. 개혁신학을 바라보는 시작들 안에 이런 경향의 편견들이 발견된다. 그리고 일반 교회 내에서도 예정론과 연관지어 이런 부분을 간과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런 주제에 관한 글도 있었으면 필자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개인적 삶과 교회적 삶에 적용(2장)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며 받아들이는 아들이라면 당연히 채찍질한다고 말한다.(히 12:6) 출생은 순간적이지만, 성화는 죽을 때까지 포기할 수 없는 영적 전쟁인 것이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들을 양자 삼으시고 성령을 보내심으로 날마다 거룩하게 하신다. 그리스도와 묶여 하나님의 특별하고 강력한 인도함을 받고, 보호를 받고 있어서 기어코 승리와 완성의 자리로 가게 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의 삶은 철저히 하나님 의존적인 동시에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 즉 성화는 단박에 이루어지지 않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화는 과정이며, 넘어지고 또 일어서는 삶의 연속이다. 이러한 넘어짐과 일어섬의 연속은 성도 안에 남겨진 ‘자기의’를 빼고, 오직 하나님으로 채워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신뢰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도 안에 담겨진 스스로의 의지하려는 본성을 뽑아내야 한다. 타락한 심성을 완전히 벗지 못한 인간은 자기비하의 겸손을 가진 동시에 사단이 뿌린 자기 의의 씨가 뿌려져 있다. 하나님은 성도 안에 남겨진 자기 의를 벗겨 내기 위해 신자들에게 실패를 경험하게 하신다. 성화는 이렇게 넘어지고 일어서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의 나약함을 철저하게 깨닫게 하는 동시에 의지할 분 하나님 밖에 없음을 반복적으로 교훈하시는 것임을 다시 기억하게 되었다.
조직신학을 즐겨 읽고 공부하는 편이지만 성령을 설득하는 개념으로서의 성령의 역할은 무척 낯설다. 그러한 표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성령의 설득이란 표현은 성화의 문제를 다룰 때 지성의 기능적 측면보다는 인격적 관계를 통해 성화를 이루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이 자녀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연습’하여 성령의 충만한 단계에 나아가게 만든다. 성령 충만을 기나 에너지의 충전으로 이해하려는 어설픈 생각들을 수정하여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와 향유의 문제로 끌고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다시 성도간의 관계로 이어진다.
성화는 예수님과 연합하여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살고, 그 길을 걷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실패와 환난을 통해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시고, 십자가를 짐으로 주님을 따라가게 하신다. 마지막 하나님 얼굴 앞에 서는 그 날까지 나의 십자가를 내려놓을 수 없다. 쓰러지고 넘어져도 말이다. 그렇기에 성화는 과정이며, 전쟁이며, 끊임없는 연습과 훈련인 셈이다. 짐을 하나 덜었다. 도무지 변화의 기미를 보이지 못한 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율법적 왜곡된 정신에 함몰되어 있음을 본다. 다시 힘을 내보자. 다시 십자가를 지고 나의 길을 가자.
개혁주의 성화는 개혁주의 인간론에 근거하고 있고, 인간론은 성경에 기초한다. 성경은 인간이 피조물이라는 사실과 타락하였기에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규정한다. 동시에 인간이 인격체라는 사실이 인간이 구원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격체로서 추구해야 할 방향은 변질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고, 이는 인간론에 토대를 두고 있는바 그것은 곧 피조된 인간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성령에 의한 삶 즉 성화의 삶을 실천적으로 사는 것이다. 성화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시작된 구원과 앞으로 완성될 구원과도 같은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러한 관계를 통해 인간론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형상회복이 곧 성화의 삶과 연관되며 필자는 성화교육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교육현장에서 무엇보다도 교사의 역할을 강조했다. 칼빈은 진리를 전달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교사의 인격이며 만일 교훈하는 방법이 올바르게만 사용된다면 교사 자신이 인격의 자연적 표출이, 곧 방법이 된다고 했다. 같은 맥락에서 바빙크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사의 인격과 방법은 상호보완적 요소이다. 한편으로 방법은 교사의 방법인데 좋은 방법은 교사 자신의 인격의 동시적 표출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과정으로서의 방법은 학습되어져야 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경험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이기는 하지만 살아있는 인격의 표현을 통하여서만 역동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성화 교육 방법의 제일은 가르치는 교사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교사가 결심하고 가르치고, 부지런히 가르치고, 본이 되어 가르쳐야 한다. 필자는 전도사, 교사라는 직분으로 한 교회를 섬기고 있다. 인간은 타락 했지만 성화 교육의 필요와 그 효과를 기대할 수 있고, 이점에서 교사인 필자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어린 학생 인격의 바람직한 형성을 위해 영성이 수반된 교육을 시행하야하며, 피교육자들에게 언제나 좋은 본보기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교사가 성화의 본이 되는 일에 있어서는 결코 지식이 그것을 대신 할 수 없었으며, 오직 사랑하는 행동이요 사랑하는 삶의 실천임을 기억해야 한다. 나아가 필자는 가정교육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교육 높이를 조절하신 것처럼 부모들도 자녀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교육할 것을 요청해야 한다.
성화 교육는 목적 지향의 교육이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창조되었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도록 교육되어야한다. 그런데, 현대 우리 교육은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 삼는 인간 중심의 교육을 하고 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가 될 수 없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유한하며, 의존적이며 가변적이고 스스로 존재할 수도 없다. 불변하는 진리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바로 인간의 성화교육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교육이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교육은 실제 생활에서 함께 피조 된 이웃의 행복을 위하는 인격체로 살도록 교육하는 일로써, 나만을 위한 교육이 아니고 이웃과 사회와 창조주를 위할 줄 아는 교육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구를 위해 목숨을버리면 이 보다 더 큰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셨고, 선생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 사랑과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교육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시행 되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교육하면 청소년들이 삶에 대한 무기력감과 우울함, 공허함, 절망, 현실도피, 분노, 긴장 등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고, 일탈과 자기 학대를 예방할 수 있다. 인간의 사랑과 관심도 소중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담은 인성 교육은 성화교육에 적합하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교육은 말로 가르치는 것 그 이상의 지적활동과 정서적 안정과 의지적 결단이 따르는 자기의식이 있어야 하며, 그것은 인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가는 인격의 변화와 삶의 개혁이고 시간이 필요한 일이기에 인내로 교육해야 한다. 인간은 인간에게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사랑 안에서 시간을 가지고 점진적으로 완성되어 가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육은 인간의 성화, 인간의 근본을 가르치기 보다는 인간으로 사는 방법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인간으로서의 자의식이 부족하고 자기 상실에 쉽게 빠지고, 인간 윤리를 거역하고, 인간 사회를 혐오하며, 일부이지만 학생과 교사들의 비인격적인 행동으로 인해 교육에 문제가 생긴다. 이러한 현상은 성화가 되지 않아 그러하며 성화교육이 부족하여 나타났다. 성화교육에 대해 더욱 공부하고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 적용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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