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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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오늘 받을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11장 32~44절 입니다.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설교 제목: 나사로의 부활
서론
오늘은 부활주일,
지난주 고난주간동안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잘 묵상했는가?
전도사님도 한주간 죽음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는 한 주간이 되었다.
전도사님이 다녔던 은혜의 교회, 목사님이 항상 우리보고 존귀하다고 수없이 얘기해주셨다.
특히 개인적으로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아가면, 반갑게 맞아주시고 필요한 이야기해 주셨다.
그런데 그 목사님께서 갑자기 1달전에 쓰러지시고, 지난주 월요일에 소천하셨다.
군대 가기 전 그러니까 3년전에 찾아갔는데 그 때 기도해주시면서, 다음에 나오면 만나자고 하셨어요. 근데 군대 전역하고 인사드린다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는 인사를 못드리게 됐죠.
그 이야기를 듣고서 얼마나 후회하고, 슬펐는지 몰라요. 그런데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는 부활을 믿고, 목사님 또한 예수님 믿고 죽으셨는데, 그렇다면 부활하여 천국에 계실 텐데, 과연 슬퍼하는 것이 맞는가?
그래서 전도사님도 장례식장에 가기 전에 책을 보며, 찾아봤어요.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말씀을 우리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우리가 죽음에 대해서 슬퍼하지만 부활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 성경을 통해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살전 4: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 본문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관해서 사도바울이 우리가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할지 알려주고 있어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아야” 이 문장은 이중부정으로 되어 있어요. 이중 부정은 뭐다? 강한 긍정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요, ‘예수님 없이 기뻐하지 말라’ -> ‘예수님 있이 기뻐하라’ / 오늘 본문에서 ‘소망 없이 슬퍼하지 말라’ -> ‘소망을 품고 슬퍼하라’ 이것은 ‘소망 따위는 없으니 그냥 울고 슬퍼하라’도 아니구요. ‘슬퍼하지 말고 소망을 가지라’도 아니에요.
즉 우리는 그저 참고 이겨내려 이쓰지 말고 슬퍼해야 한다. 그러나 슬퍼하는 것이 옳음에도 불구하고 슬픔은 독소로 변할 수 있어요. 소망을 가미하지 않으면 슬픔 때문에 마음이 독해지고 삶이 어두워지고 기쁨이 짓눌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본문이 친구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살펴볼 수 있다.
35절에 죽은 나사로의 가족을 만난 예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요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아무 말씀도 없이 울기만 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화가 나서 씩씩 거리며’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셨다.
요 11: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여기서 비통히 여기시며 -> 분노하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자신이 나사로를 살릴 것이라는 큰 기적을 행할 것을 알고 계썼다. 그렇다면 나는 그 무덤으로 걸어 갈 때에 슬며시 미소를 지으면서, 내가 기적을 행할 것이다. 일어나라!! 다 잘 될 것이다!! 이렇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울고 슬퍼하고 분노하셨다. 왜 이렇게 분노하셨을까?
바로 죽음이 침입자기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에 세상과 사람에게는 죽음이란 ㅇ없었습니다. 우리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도록 지으졌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짓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햇을 때, 우리는 망가졌죠. 죽음이 우리 안에 들어왔으며,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하게 되었습ㄴ다.
그렇기에 지금 예수님은 죽음이라는 침입자, 괴물 앞에서 노하며,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죽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살다가 보면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주변 사람의 죽음, 나의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에요.
우리는 영원한 삶을 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원한 삶을 살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침입자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만나지 못하도록 갈라놓죠. 그렇기에 우리는 슬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눈물을 흘리며 울며 슬퍼해야 합니다. 슬픔을 참아야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가지고?? 소망을 가지고
어떤 소망을 가져야할까요?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는 장면을 다시 볼게요. 예수님은 슬퍼하시고 울고 노하셨습니다. 잠시 후면 자신이 친구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을 아시면서도 말이죠. 하지만 예수님은 나머지 사람들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끝에 보면,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자. 예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이 한 목소로리로 이렇게 얘기합니다. “더는 가만둘 수 없다. 이제는 죽여야 한다. 예수님을 죽여야한다” 요 11:53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고 나시면, 적들이 극단적으로 행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나사로를 무덤에서 일으키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무덤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던 것이죠.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부활을 보장하시려면, 예수님께서 죽으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하신 그것이다.
그렇게 하심으로 인해 우리에게 한 소망을 주십니다. ‘살전 4: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오늘 바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 믿는 우리는 그 부활하심에 동참하게 됩니다. 우리 또한 이제는 죽음에 속한 자가 아니요. 부활에 속한 사람입니다. 죽은 자들도 함께 데리고 오실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읽고 얼마나 펑펑 울었는지 몰라요. 울어도 괜찮구나, 그리고 소망을 품자.
무디선생이 죽음의 날이 임박한 것을 예감하고 친구들에게 말하기를 『어느날 신문에서 도스필드의 무디가 죽었다고 하는 기사를 읽거든 그 사실을 믿지 마시오.그때는 지금의 나보다 더 확실하게 살아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부활한 육체를 입고 영생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훗날 천국에서 다시 만날 그 때에 기쁨으로 인사하자.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더욱 기념하자.
단순히 나사로만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게 아닙니다. 무덤에 갈 수밖에 없는 여러분을 위해 무덤에 들어가셨고요. 그리고 그 무덤에서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을 우리에게까지 허락하십니다.
결론을 맺으며 1가지 시로 마치고자 합니다.
죽음은 한때 사형 집행인이었으나 복음 앞에서 한낱 정원사로 전락했다.
죽음은 한때 우리의 숨통을 끊어 놓을 힘이 있었느나 이제 죽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우리를 하나님의 땅에 심어 비범한 존재로 피어나게 하는 것뿐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우리 청소년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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