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살아가기 위한 최고의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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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살아가기 위한 최고의 방법/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세속화의 물결 속에 믿음으로 굳세게 살아가자
[서론]
히브리서가 쓰여질 당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변에서 유대교로 다시 개종하라는 핍박과 유혹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면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아에 쫓아나기 때문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겪어야 했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모이던 회당에 나가지 못했고, 각종 사회,경제적 압박과 차별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몇몇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슬그머니 유대교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오랜 시간 고난을 견뎌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아이들도 걸려있기 때문에 더욱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아이들도 부모의 신앙으로 인해 여러가지 교육적 차별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더욱 큰 유혹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냥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면 편안한 삶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도전이 있는 상황에서 히브리서가 쓰여진 것입니다.
유대인들, 즉 히브리인들에게 쓰여졌기에 히브리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럼 과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사회, 경제적 억압과 차별을 받습니까?
예수님 믿고 교회간다고 하면 누가 뭐라고 합니까?
가끔 교회가는 것때문에 부모님과 갈등을 겪는 청년들을 본적이 있지만 그렇다고 본인이 큰 피해를 입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른 종류의 큰 유혹과 시험이 존재합니다.
바로 세상 가치관입니다.
이 세상 가치관에 물든 것을 ‘세속화’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죄가 지배하는 많은 가치관과 삶의 방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중 물질만능주의와 성공지상주의, 서구의 자유사상 등이 강력하게 우리를 유혹합니다.
미디어들, 주변인들, 친구들의 유혹과 압박도 장난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요즘 tv, 유튜브보면 부자되는 법, 성공하는 법 관련 영상들이 넘쳐납니다.
이른 나이에 최대한 빨리 은퇴하는 것이 마치 성공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성윤리도 달라져, 결혼 전에 임신하는 것을 마치 선물처럼 여기고 자랑까지 합니다.
최근 한 통계에 의하면 18-39세 기독교 미혼 청년의 80퍼센트가 혼전 성관계를 경험했다고 합니다.
동성애에 대한 인식도 서구 사회의 영향을 받아 많이 달라지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또는 정치와 기독교가 결합해 태극기 부대라는 이상한 집단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더 무서운 것은 세속화의 물결이 목회자에게도 깊이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대형 교회 목회자가 기업 회장같이 행동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목회자가 소위 잘나가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나 돈 많은 사람을 치켜세워주는 모습도 보게 됩니다.
어떤 교회는 회사 체인점 내듯 자기 교회를 전국에 세우려는 목회자도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도 모두 목회자가 세속화 물결에 떠내려가고 있는 모습들입니다.
세상에 물든 교회의 모습들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러한 세속화의 강력한 흐름 속에서 어떻게 믿음을 굳게 지킬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이 그 답을 제시해줍니다.
[본론]
먼저, 앞서 히브리서 1장에서는 예수님이 천사보다 얼마나 우월하신 분이신지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궁극적인 뜻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온 세상의 주인으로 삼아 세상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셨습니다.
아무리 천상의 존재인 천사가 대단하다고 해도 예수님보다 대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2장에 오면 예수님의 신성이 아닌 인성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낮아지셨다는 것입니다.
천사보다 우월하신 분이 도대체 왜 인간으로 낮아지셔서 고난과 죽음을 당하셔야만 했을까요?
10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많은 자녀를 영광에 이끌어들이실 때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으로써 완전하게 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보존하시는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나 인간만큼은 죄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들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 가운데 보내셔서 우리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구원의 방법이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자신의 아들 예수를 고난받게 하고, 죽게 내버려두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보존하시는 능력의 하나님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을 이렇게 무기력하게 내버려두실 수 있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들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여 그 분의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를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우리와 교제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려면 예수님이 인간들을 대신해 고난받고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을 10절에서는‘고난으로 예수님을 완전하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으셔야만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이룰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정말 아들을 죽이는 그 방법밖에 없었을까요?
네, 그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14,15절입니다.
“이 자녀들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그도 역시 피와 살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죽음을 겪으시고서, 죽음의 세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멸하시고, 또 일생 동안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이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 인간의 존재가치를 잃어버린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육체적 죽음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죽음이 바로 죄 때문입니다.
그 죄가 바로 하나님께 반역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께 죄의 대가인 죽음의 값을 지불해야 하는데 인간 스스로가 그 값을 치룰수가 없습니다.
다 죽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 값을 대신 치루기 위해 인간이 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기에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에게 죽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지만 예수님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하나님의 신성을 가지셨기에 죄가 없으신데도 하나님께 순종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인간 대표로 죽으신 것입니다.
결코 죽을 수 없는 천상의 존재가 결국 죽을 수 밖에 없는 지상의 존재로 스스로 낮아지신 것입니다.
바로 우리를 향한 사랑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이러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악마의 종노릇하던 것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이 죽음이라는 단어와 악마의 종노릇을 종교적인 단어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죽음의 공포란 우리 삶에서 어떤 의미일까요?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우리가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갔던 이유는 그렇게 살지 않으면 죽을 지 모른다는 두려움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대학교에서 경제학과를 선택한 것도, 감정평가사라는 자격증을 준비한 것도 모두 주변에서 그렇게 선택하는 게 올바른 삶의 방향인것처럼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만 뒤쳐져 죽음의 길로 갈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이 세상 가치관대로, 사람들이 살아가는대로 나도 살아가지 않으면 죽는 줄 압니다.
‘이렇게 살지 않으면 이 경쟁에서 도태되어 죽고 말거야’
이런 생각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게 바로 악마가 주는 죽음에 대한 공포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어 내 욕망과 세상 뜻대로 살아가기에 생긴 죽음의 증상입니다.
그 두려움때문에 사람들은 세상의 가치관이 마치 진리인양 따라가는 것입니다.
따라간다는 것은 우리가 곧 세상의 종노릇, 악마의 종노릇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출애굽기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오랫동안 이집트 종살이를 하다보니 노예근성이 생겼습니다.
광야에서 자꾸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의심하고 불평을 늘여놓았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하심과 신실하심을 믿지 못했습니다.
이집트에서 육체적으로는 해방되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영적으로 여전히 노예상태였습니다.
이게 바로 죽음의 공포가운데 묶인 삶, 악마의 종노릇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에서 다 죽고, 유일하게 믿음의 사람 여호수와와 갈렙과 소수의 사람들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죽음의 공포가운데 우리를 해방시키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10절에 보면 예수님을 구원의 창시자라고 부릅니다.
이 단어는 묵상책 밑에 보시면 헬라어로 ‘아르케고스’라고 부르는데 ‘지도자’ 혹은 ‘개척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를 보면 광야시절 여호수아가 떠오릅니다.
여호수아는 선두에 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입성했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은 인간의 대표자가 되어 선두에서 우리를 이끌어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다스리는 죄와 사망의 나라에서 우리를 하나님이 다스리는 의와 생명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로 옮겨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구원은 이제 하나님의 거룩한 형제, 자매가 되어 그 분의 나라 식구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11-13절입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은 모두 한 분이신 아버지께 속합니다. 그러하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을 형제자매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분은 “내가 주님의 이름을 내 형제자매들에게 선포하며, 회중 가운데서 주님을 찬미하겠습니다.”하고 말씀하시고, “보십시오.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여기에 있습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큰 따옴표가 붙은 것은 시편 22편22절과 이사야서 8장17절을 인용한 구절입니다.
히브리서가 어려운 이유가 이렇게 구약 구절들을 많이 인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을 잘 알려면 구약으로 넘어가서 그 구절들을 다 살펴봐야 하거든요.
아무튼 요약하자면,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셔서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예수님과 거룩하게 된 우리들이 모두 하나님께 속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마치 종이 주인의 아들과 한 가족이 되었다는 그런 의미와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자신의 형제 자매라고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얼마나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지를 보여주는 구절들입니다.
우리도 교회에서 서로 뭐라고 부르나요?
형제, 자매라고 부릅니다.
왜 그렇게 부를까요?
예수님이 우리를 형제,자매 삼아주셨기에 우리도 서로 서로 형제 자매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한 가족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누군가를 형제, 자매라고 부를 때 그게 그냥 교회에서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말이 아니라 얼마나 영광스러운 말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한번 옆 사람에게 형제님, 자매님 불러볼까요?
그럼 왜 이렇게 예수님과 우리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하고 있을까요?
17, 18절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점에서 형제 자매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비롭고 성실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써, 백성의 죄를 대신 갚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제거하는 성막의 일꾼입니다.
하나님이 대제사장을 기름부어서 세우셨습니다.
기름부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는 의미고, 동시에 대제사장이라는 위치는 백성을 대표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재하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1년에 딱 한 번 대속죄일에 백성들의 죄를 자신이 대표해서, 대신해서 지성소로 들어가 죄사함을 받게 됩니다.
그 대제사장 역할이 바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깨끗케하신 얘수님의 일과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중재해 주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셔서 고난과 시험을 겪으셨기에 하나님께 우리의 사정을 잘 알려드릴 수 있으십니다.
또한 사람들 앞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대리하여 잘 전달할 수 있으십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러한 역할은 천사들이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사는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이시지만 천사보다 우월하신 것입니다.
1-2장의 주제가 바로 천사보다 우월하신 예수님이야기입니다.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갖추신 예수님이시기에 천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왜 이렇게 복잡한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앞서 말했듯이 그 당시 유대교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의 핍박과 유혹으로 인해 인간 대제사장이 있는 유대교로 돌아갈 유혹과 시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대제사장의 역할을 예수님이 하셨는데 굳이 유대교로 돌아가 대제사장에게 자신의 죄를 속죄할 이유가 전혀없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의 대제사장의 속죄는 이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궁극적으로 해결하셨기 때문에 더이상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 굳이 과거로 돌아가려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이 뜨거운 여름에 목욕하고 난 후 다시 땀을 흘리려고 하는 미련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땀을 흘리고 난후 목욕하는 것이지, 목욕하고나서 땀을 흘리려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후 예수님 믿기 전 과거를 그리워하여 돌아간다면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 죄와 사망의 상태에서 해방된 깨끗한 상태가 되었는데 또다시 과거로 돌아가 자신을 더럽힐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죄로 물든 가치관에 강한 유혹을 느낄 때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히브리서 쓰여질 당시 많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고난과 유혹 속에서 시험가운데 있었습니다.
이런 오랜 고난과 유혹속에서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신앙생활이 항상 좋기만 합니까?
어렵고 힘들고, 귀찮을 때도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 다 하면 나도 하고 싶고, 나도 갖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주변에 신앙없어도 잘 살고, 잘 되는 사람들보면 부럽기도 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다른 큰 교회 청빙되서 가고 싶은 마음도 때로는 들기도 합니다.
성도들이 많은 교회들보면 때로는 제가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매일 동영상 올리면서도 내가 뭐하고 있나 싶을 때도 있습니다.
저도 믿음이 이처럼 약해질때도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죄로 물든 세상 속에서 당당하게 믿음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 답은 3장 1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부르심을 함께 받은 거룩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요,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하다는 말은 예수님께 나의 생각을 맞추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깊이 묵상할수록 내 생각이 아닌 예수님의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신앙의 사도이십니다.
사도란 하나님께 부름받았기에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살아가셨기에 우리도 하나님의 대리자처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하셨듯이 우리도 하나님과 세상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 분을 깊이 묵상하며 살아가는 한주가 되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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