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볼라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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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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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키우스 황제 및 그의 측근에 있다가 제위에 오른 발렌티우스 황제 치세기는 전염병이 창궐하던 시기에 해당이 되는데, 이들 황제들 역시 “신들을 달래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전 제국적인 기독교 박해 정책을 폈던 것으로 보인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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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 로마, 데시우스 왕,

지금과 비슷 한 그때

4세기 이전의 기독교회는 탄압받는 집단으로서 공개적인 회집이나, 전도, 증거가 불가능했고, 온전한 신자들만의 은밀한 예배와 교제를 나눌 뿐이었다. 그들은 공개되지 않는 곳에 모였고(행12;10-17), 공개적으로 전도하지도 않았다. 이브 콩갈(Yves Congar)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인들의 번영과 안녕을 위한 기도는 했지만, 그들의 회심을 위해서 기도한 적은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선교에 대한 저명한 연구가인 노버트 브록스(Norbert Brox)는 초대교회에 선교명령에 대한 반응이 없었다는 것은 대단히 놀랄만한 일이라고까지 말 했다. 즉 초기 기독교 교부들의 문헌 속에는 전도에 대한 목회적 권고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북아프리카의 주교이자 순교자였던 키프리안(Cyprian)은 그의 저서 <에드 큐리눔>(Ad Quirinum)에서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의 책 제3권에는 새 신자들을 위한 신앙생활에 필요한 120 항의 거룩한 교훈을 담고 있는데, 형제들끼리 서로 도와야 하고 그리스도인은 항상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은 있지만, 전체 교훈 중에서 불신자들에게 전도를 촉구하는 내용의 구절은 단 하나도 없었다(Cyprian, Ad Quirinum, 3, preface, 9, 120.). 이처럼 전도하거나 증거 하는 일을 권면하지 않았던 것은 공개적인 증거가 불가능했고, 그럴 경우 심각한 희생을 지불해야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로마제국 하에서 기독교가 급속도로 확산될 수 있었을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의 순정한 사랑의 실천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 속에서 형상화했기에 그 실천적 사랑은 힘을 지니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출처 : 코람데오닷컴(http://www.kscoramdeo.com)
고대 로마에도 여러 차례의 전염병이 일어났다. 그 가운데서도 3세기 중엽 전 로마 제국을 휩쓴 전염병은 기독교와 깊이 연관되어 나타났다. 이 전염병이 당시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의 이름을 따서 ‘키프리아누스 질병’이라고 불리는 데서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전염병은 당시 크리스트 교도들에게 더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는데, 전염병이 일어난 이유를 기독교도들에게 전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키프리아누스 전염병이 유행하였던 당시 데키우스 황제에 의하여 전 제국적인 극심한 박해가 일어났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전염병은 오히려 기독교 의확산을도왔다고볼수있는데, 그이면에는초대기독교인들의전염병에대한대처방식과죽음에 대한 태도가 큰 몫을 하였다고 할 것이다.
3세기 중엽 데키우스 황제 치세로부터 전 로마 제국을 휩쓴 전염병은, 이 전염병이 당시 카르타고 주교 키프리아누스의 이름을 따서 ‘키프리아누스 역병’이라고도 불리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듯이, 기독교와 깊이 연관되어 나타났다. 키프리아누스는 ‘구토 및설사증세가계속하여온몸의힘이빠지며, 골수에서비롯된발열증세로온몸곳곳의 상처는 계속 곪아갔으며, 출혈 증세 가끔은 발이나 다른 신체 사지가 떨어져나가 걸을 수 없거나, 청력과 시력을 잃는다’고 기록하였다1).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염병이 유행하자 절망과 두려움에 빠져서 친한 이들의 시신도 방치 하든가, 아니면 순간의 향락주의에 빠져들었다면, 기독교도들은 이들과 정반대로 행하였다고 전해진 다. 자신을 아끼지 않는 사랑과 헌신으로 두려워하지 않고 병자를 돌보다가 자신도 질병에 감염되면 이 세상을 기쁘게 떠났던 것이다. 당시 기독교도들과 관련한 독특한 별명 가운데 죽음이나 전염병과 관련한것으로 보이는것이많은데,biathanatai(죽고싶어안달인사람들), parabalani(죽음등의 위험을) 무릎 쓰는 사람들), philokindynoi(위험을 사랑하는 사람들), philoponoi(고된 일을 사랑하는 사람들) spoudaioi (열심인 사람들)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별명이 의미하듯이 기독교도들은 병든 사람을 위해서 죽음을 무릅쓰고, 고된 일을 감내할 뿐만 아니라 고통을 사랑하며, 성실과 열정을 다해서돌보았음을알수있다. 그결과기독교는병자들에대한사회적태도에있어서가장혁명적이며 결정적인 전환을 가져왔으며, 고대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새로운 시설이자 오늘날 개념의 병원도 탄생시켰다.
전염병의 창궐이라는 위급한 상황에서 초대 기독교도들로 하여금 죽음을 초월하여 선행을 하게 하였던 원동력 가운데 가장 중요하였던 것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죽음에 대한 관점, 즉 부활에 대한 믿음이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특히 초대 교회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부활관은 기독교도들로 하여금 어떤 상황에서든 죽음에 초연한 태도를 가지게 하였으며, 이러한 모습은 특히 전염병의 대유행 시기에 더욱 빛났으며 사람들을 감동케 하여 교회가 성장해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키프교안의 설교
“우리가 단지 우리(그리스도인)들만을 소중히 여기고 우리끼리만 자비를 베푼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세리나 이교도들이 하는 것 이상으로 선으로 악을 이기고, 하나님께서 관용을 베푸신 것 같이 관용을 베풀고, 원수조차도 사랑하며, 주님께서 권고하신 대로 핍박하는 자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우리는 온전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태양을 떠오르게 하시며 비를 내리셔서 씨앗들을 기르시고 이러한 모든 선하심을 그의 백성들에게 보이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그렇게 하신다. 만일 누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면 그 사람은 아버지를 본받아야 함이 마땅하지 않은가?”(Pontius, Vita Cypriani, 9.) 출처 : 코람데오닷컴(http://www.kscoramdeo.com)

결과

초기 기독교인들의 자기희생적 헌신은 3가지 결과를 가져왔다. 첫째, 사망률의 현저한 감소였다. 그리스도인들이 병든 자를 간호하고 위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베푼 결과로 어떤 이는 죽음을 맞기도 했으나, 모든 치료가 중단된 상태에서 기본적인 간호만으로도 사망률을 현저히 낮출 수가 있었다고 의사학자 맥닐은 주장한다. 물과 음식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쇠약해진 이들의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방 종교 신봉자들에 비해 기독교 공동체의 생존율이 월등히 높았다. 그리스도인들의 활동은 기독교 공동체 밖으로 확산되어 사망률 감소에 영향을 끼쳤다. 둘째, 이교 숭배자들의 회심과 기독교로의 개종, 곧 종교적 이행(移行)이 일어났다. 그리스도인들이 베푼 형제애적인 사랑은 이교 숭배자들의 마음을 열어 기존 종교를 폐기하고 새로운 종교를 수용하는 변화를 가져 온 것이다. 고대의 키프리아누스나 디오니시우스, 그리고 역사가인 에우세비오스 등은 물론이지만 우리 시대의 미국의 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도 이런 역병이 결과적으로 기독교의 확산에 영향을 주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역병은 이방종교의 쇠퇴를 가져왔고, 기독교 성공에 기여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생명에 대한 사랑이 가져온 결실이었다. 이상에서 제시한 초기 기독교회의 사랑의 실천이 오늘 우리들을 비추는 거울이 되기를 바란다. 이상에서 인간 생명 혹은 생명 윤리 문제와 관련하여 그레코-로만 사회에서 제기된 3가지 문제, 곧 영아 유기, 낙태, 그리고 역병의 창궐이 어떠했는가를 소개하고 이런 상황에서 초기 기독교는 어떻게 대처하며 사랑을 실천했는가를 소개하였다. 진정한 사랑은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켰다. 사랑의 실천은 결과적으로 이교도들의 종교적 이행을 가져와 이교의 쇠퇴와 더불어 기독교 성공을 가져오는 한 가지 요인이 되었다. 그러기에 로마인들은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Omnia vincit amor)”라고 말했을 것이다. 출처 : 아이굿뉴스(http://www.igoodnews.net)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가?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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