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aceMaker (화평케 하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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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Maker (화평케 하는자) (잠 6:12~15)
건달과 악인그릇된 말이나 하고 돌아다닌다” (12)
= 불량하고(A worthless person) 악한자(사악한 자, wicked man)는”
troublemaker(문제를 일으키는 자, 말썽꾸러기,NIV)들은 잘못된 사용으로 오용된 행위를 하며 돌아다닌다.
그들은 눈짓과 발짓과 손짓으로 서로 신호를 하며 (말로하지 않고 신호나 부호로, ‘조용히 소통하다..’) (13)
비뚤어진 마음으로 항상 악을 꾀하며, 싸움만 부추긴다 (14)
비뚤어진 마음 = (‘패역함’, 개역개정 : 좋은 것을 고의적으로 왜곡하는 성질)
싸움만 부추긴다 = (다툼을 일으키다, 개역개정 : 갈등을 확산시킨다)
그러므로(그러한 까닭에) 갑자기(경고도 없이 순식간에..) 닥쳐오는 재앙을 만나, 순식간에 망하고, 회복되지 못한다. (15)
오늘 본문에서 ‘건달과 악인’이라고 표현된 이 단어들은 곧 ‘불량한자, 악한자, 항상 문제를 일으키는 말썽꾸리기, 다시 말해서 악한 일을 행하는 자들을 총칭하는 단어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도대체 그들의 마음이 어떠한 상태이길래, 이러한 악행을 끊임없이 행하는 것일까..
그러한 질문속에 저는 오늘 본문을 생각하고 묵상하면 제 마음에 와 닿은 구절이 바로 14절입니다. “그 비뚤어진 마음으로..” 우리 14절만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 비뚤어진 마음으로 항상 악을 꾀하며, 싸움만 부추긴다..”
여기서 그 비뚤어진 마음..이란 단어를 개역개정으로 번역하면 ‘패역함’이란 단어입니다. 패역, 즉 “좋은 것을 고의적으로 왜곡하는 성질”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들은 그 비뚤어진, 즉 좋은 것들을 왜곡하는 마음의 성향으로 모든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어딜가나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게됩니다. 좋은 것도 왜곡하고 비틀어서 말하는 그런 부정적인 사람들을 말입니다.
더 나아가 본문이 말씀하시는 그 악의 형태는 구체적으로, “싸움을 부추기는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큰 소리나 말이 아닌, 은밀하게 신호를 주고 받으며, 갈등을 일으킵니다. 더 정확히 ‘갈등을 확산, 퍼뜨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이러한 자들이 우리 곳곳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믿는 자들 역시도 이러한 성질, 즉 왜곡하여, 갈등을 조장하는, 싸움을 부추기는 성향이 우리 안에 문득 문득 들 수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그러한 것들이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라는 것입니다.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아멘..!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9절에서 ‘화평하게 하는자가 복이 있고, 하나님께서 그를 자기의 자녀라고 부를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화평하게 하는자..” 즉 “peacemaker”들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피스메이커, 조정자, 즉 “분쟁을 그치게 하는 자들” 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삶의 마디마디, 곳곳에, 좋은 것을 왜곡하며 부정하는 부정적인 사람들, 이러한 악을 행하는 자들, 그러한 말썽꾸러기들, 분쟁과 갈등을 조장하는 자들과 때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밖에 없음에도..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그 분쟁을 그치게 하는 자들이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아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신자는 바로 peacemaker다! 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어떻게 피스메이커, 즉 화평하게 하는 자로 그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저는 오늘 이 짧은 시간에, 다는 못해도 한 부분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 실제적 적용 첫 번째로, 우리가 먼저 그들을 “이해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진리, 즉 성경을 통해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거듭나지 못한, 그러한 사람들을 철학적인 용어로 “자연인..”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이 자연인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자연인 중에 최고의 지성, 사상가인 ‘아리스토틀, 아리스토텔레스’란 사람이 있습니다. 한번쯤은 모두 들어보신 이름일 것입니다. “철학의 최고봉”인 사람입니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으로 인간과 이 세계를 관찰하였습니다. 자연인으로서, 불신자의 눈으로 아주 객관적으로 말입니다.
그가 인간의 마음의 성향의 한 부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의 즐거움과 행복을 좇지 마련이다..”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인간은 어디서 즐거움과 행복을 찾는가..?” 다양한 요소들이 있지만 그 중 한가지가, 바로 “모든 사람은 이기는 것을 좋아한다..” ‘승리’ 즉 이기는 것 말입니다.
세상을 잘 관찰하다보면,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만 말하자면 인간이 그렇게 스포츠경기를 보며 즐거움을 누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기고 지는 그 과정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팀이 이기면 그냥 그렇게 그것에서 대리만족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저 역시 손흥민 선수를 좋아해서, 그가 속한 토트넘이 이기면 너무 행복하고, 또 비기거나 지면, 짜증이 막..올라오고..)
이처럼 모든 인간은 ‘승리’를 갈구합니다. 여러분 승리자가 있으면, 반드시 상대적으로 어떤 자가 존재합니까..? 바로 패배자입니다. 승자와 패자가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고, 곧 그것이 이 세상의 논리인 것입니다. 그 승리에 대한 본능, 성공에 대한 본능이 우리 안에 있는 본능인 것입니다. 인정이 되십니까?
마찬가지로, 여러분 스포츠 경기는 우리가 잠시잠깐 즐기는 유희거리지만,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삶은 실제적이고 우리의 모든 것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에도, 우리의 몸에도, 왜입니까? 우리가 먹고사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삶에도 승과 패가 존재합니다. 성공과 실패가 있듯이 말입니다.
무한경쟁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드시 어둔 그늘과도 같은 패자들, 실패자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들 마음 한 가운데 드려진 어두운 감정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여러분, 실패하고 싶은 사람은 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필연적으로 승자가 있으면 패자가 발생하게 됩니다. 다 성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이 있으면 어딘가에는 실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감정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낙담, 비통, 슬픔..그리고 결정적으로 그것이 ‘분노..’라는 감정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왠지 모르게 가슴 속이한’이 라는 것이 맺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감정들을 잘 드러내지는 않지만, 사실은 그러한 감정들을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본능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인,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살아가는 본능이고 삶의 방식이며, 예수님을 믿는 우리 역시도 이러한 감정들에서 완전히 자유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스스로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듭난 우리 역시 낙담, 비통, 슬픔 그 모든 것에서 적어도 이 땅에서는 완전히 자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분노에서 자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본질적인 그 성향은 파괴되었으나, 여전히 잔존하는 것들이 우리 안에 있다라는 것입니다.
참 너무나 슬프고 위험하게도, 인간은 ‘익숙한 것에 즐거움을 느낍다..라는 것입니다.. 즉 부정적인 감정, 즉 우울감 분노 이러한 것들이 익숙해지면, 그것을 우리의 뇌가 우리의 몸이 마치 즐겁게 반응하듯이..자꾸 그러한 감정들을 허용하고 “함몰된다..” 즉 침식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지속될 때..
그것이 바로..그 원한이 ‘복수, 앙갚음..’ 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러한 자들의 행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 안에 그러한 비뚤어진 마음으로 인해서 갈등을 조장하고 싸움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넘어질 수 있습니다. 분노할 수 있고 때로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일어서 회개함으로, 주님께 돌이킴으로 그 부정적이고, 왜곡된 감정에서 빠져나와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고통을 피할 수는 없으나, 그 고통에 머물러 있는 것은 우리가 피해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 부정적인 감정에서 우리는 빠져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말씀과 기도에 열중하며 거룩함을 추구하는 목적이고 이유인 것입니다.
여러분 ‘자살..’이 정말 의미하는 것은 곧 ‘이 사회에 대한 분노, 내 주변 사람들에 대한 분노,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 자신을 용납하지 못함에 있는, 분노..그 분노가 복수로 나타나는 것..’입니다.그래서 그렇게 때문에 자살이...그렇게 슬프고 안타까운 일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 사회에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전히 OECD 국가중 올해 6월 통계로 대한민국 자살률 1위입니다..)
우리나라 어떤 사상가들이, ‘뭐 복수는 나의 힘이다..’, “어떤 유명한 음악 프로듀서가 분노가 나의 창작의 힘이다..“ 등..뭐, 청년들이여, 분노하라..등 이런 이상한 메시지를 듣게 될 때..참 저도 제 나름대로 혼자 분을 삭히곤 합니다. 저거 아닌데..왜 저러지..그들이 하나님을 모르기에..무지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 무슨 의미에서 그런 말을 하는 줄 알겠는데..그러한 방법으로는 우리의 본능적인 딜레마를 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라고 주님께서 분명하게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시고 주님께서는 그러한 복수, 되갚음을 철저하게 꾸짖으시며 경계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원수를 사랑하라, 그리고 더 나아가 너희를 박해하는 그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곧분노함으로..분노함으로, 원수, 되갚음 하면서 살지 말아라..’는 것입니다. 또
에베소서 4장 26절에,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하십시오.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화를 내고 분을 품고 있는 것이 곧 마귀에게 틈을 주는 것이다. 그것들을 피하고 제어하라..그것이 너희에게 해를 끼친다. 너희의 몸과 마음이 상하며 모든 것이 망가진다라는 것으로 경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화가 나고 분노할 지라도, 그것을 해가 지도록 품고 있지 말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복음..’ 영원한 복, 기쁜 소식인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러한 감정들에서 벗어날 길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아멘!
주님은 우리의 본능을, 우리의 본성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 십자가의 길로, 그 고난의 길로 친히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너희가 너희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좆아와야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 “자연인의 본능”으로만 살아가지 말라 라고 권면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7절에) 너희가 필요한 것을 내가 다 알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그런 것만 구하지 말아라. 너희가 진정으로 구하여야 할 것이 따로 있다..구하라, 주실 것이요, 두드리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
내가 구하는 자에게 무엇을..? ( 성령 ) 을 선물로 주겠다. 아멘..! 우리 안에 오신 그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자연인의 본능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초자연적인 성령의 사람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써 성화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우리가 이러한 것을 깨닫고 겸손히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될 때, 나 자신과 이웃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집니다. 곧 마음이 여유를 가지고 부드러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목사님께서 자주 자주 말씀하신..“그 여유..”라는 것이 우리 안에 생기는 것입니다. 성패, 승리와 패배의 논리가 아닌, “져주고, 거저주고, 섬기는 삶이..”바로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승리의 삶이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진 여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고린도후서 6장 9절과 10절에서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들인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하나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여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이길 수 있음에도, 져주고..’ ‘화를 낼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화를 누그러뜨리며.’. 또한 ‘가진 형편 껏 거져 주고..’ “정말 듣기 싫은 부정적이고 지루한 말일지라도, 끝까지 경청해주는 것”..
“같이 가기 싫은 그 먼길을 기꺼이 동행해주고..” 때로 그것이 내 가족일 수도 있기에..너무나 고통스러워 회피하고 버리고 싶지만, 끝까지 견디며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볼 때..
정말 제 주변에 이러한 삶을 실천하시는 성도님들을 보면, 저절로 마음속으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숙연해 지고, 깊은..위로를 받고, 아 나도 저러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라고 느낍니다. 그러한 분들의 상급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클 것이기에..
우리가 우리 주님을 닮아서, “성령의 능력으로!” 이러한 일들을 순종하게 될 때, 우리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화, 분노가 사그러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마치며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피스메이커는 곧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용서하는 사람들 인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듯이..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용서하는 삶..”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로마서 12장 18절에,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아멘, 바로 이어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성경에도 기록하기를 원수 갚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고 존귀한 여러분, 주님께 맡겨드리십시다. 아멘, 주님께 우리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그 사람을 주님께 맡겨 드리십시다. 그리고 때로 그 원수와 같은 이들과 우리 편에서 할 수 있는 한 화목하게 지내십시다. 아멘,
사실,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자들은 ‘영적 환자..’ 즉 아픈 자들입니다. 아픈 자들에게 어떻게 화를 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 편에서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으로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줍시다. 아멘..!
우리가 우리 주변의 자연인들, 즉 불신자들, 때로 믿지 않는 우리의 가족을 애정어린 마음으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섬기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진짜 너희가 나의 자녀들이다..”라고 칭찬해주시는 것입니다.
모두가 그러한 화평하게 하는 peaceMaker의 삶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 이 기도의 시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주님께서는 두려워 자신을 배신했던 제자들의 모습에도 개의치 않으셨음을 압니다. 주님 먼저 나 자신을 용서합니다. 주님의 은혜 앞에서 나 자신의 모습을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주님께 은혜를 구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날 사랑하느냐..? 네가 날 사랑하는냐..?”
아멘,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기꺼이 그 길을 따라가길 원합니다.
오늘도, 먼저 나를 용서하는 자로, 그리고 이웃을 용서하는 자로, 화평하게 하는 자로 주님의 길을 따르길 원합니다. 우리에게 주님을 따라갈 용기와 힘을 이 새벽에 주시옵소서..
우리가 또 다시 주님의 품안에 거하길 원합니다. 세상을 이기신 그 주님을 바라보며 담대하게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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