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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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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령의 의미 2. 성령세례 vs 성령충만 3. 오순절 사건 "방언의 의미" 4. 나는 성령을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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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믿으며

여러분 성령.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올라요?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신 분.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분. 그리고 성령은요? 성령님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세요?
오늘 우리는 “나는 성령을 믿으며"라는 고백을 함께 살펴볼거에요. 매주 “성령을 믿는다.”라고 고백해왔는데, 우리는 어떤 성령님을, 성령님의 무엇을 믿는다 고백해 왔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래요. 나의 믿음의 대상을 정확히 알고 바라보는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자 예수님에 대한 고백은 6개가 있었죠. 성령님에 대한 고백은 몇개가 있을까요? 한개 있어요. 그런데 그 한개도 정말 짧게 지나가요. “나는 성령을 믿으며"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모두 다 소중하고 우열을 가릴 수 없을만큼 중요한 존재들인데요. 성부 성자 하나님에 비해, 성령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려요. 어떤 수식어도 설명도 구체적인 예도 없어요.
성부 하나님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셨다.”라는 그 분을 설명할 수 있는 표현이 있었고,
성자 예수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잉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다. 장사한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하늘에 오르셔서 우편에 앉아 계신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 등의 다양한 표현과 고백이 있었어요.
그런데 성령 하나님은 “성령을 믿사오며" 이 한 마디로 끝이 나요. 뭔가 굉장히 홀대 하는 듯한 느낌도 들고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느낌도 들죠.
우리가 성령님! 하면 머리속에 뭔가 막 그 분의 역할이 잘 떠오르지 않는 것처럼, 내가 경험한 성령님보다 설교시간에 들었던 성령님에 대한 여러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로 모이지 않는 것처럼 너무 간단하고 또 두루뭉술한 표현인 것 같아 보여요.
“성령을 믿으며"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에 대한 찬사와 표현에 비해 초라해 보이는 말이죠. 성령 하나님의 역할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스리슬쩍 넘어가는 것은 아니에요.
“성령을 믿으며”라는 이 고백은 정말 굉장히 중요하면서도 우리의 삶과 밀접한 연관이 있어 .
성령 하나님 우리의 삶을 바꾸는 역할을 해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믿고 고백하여 구원받고 난 이후의 삶. 예수님을 만나 삶의 변화가 일어날 때. 그 전환점에서 치고 달려 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그것을 설명해주는 고백이 바로 뒤에 나오는 네개의 고백이에요.
사도신경을 처음 나눌 때 CREDO IN DEUM 이라는 제목으로 나누었었는데요. CREDO는 나는 믿는다. 라는 고백이에요.
“성령을 믿사오며" CREDO! 라고 외치고 난 후 등장하는 이 네가지는 모두 쉼표로 연결되어 한 주제를 받고 있어요.
거룩한 공교회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는다.
라는 이 네가지의 고백이 바로 우리가 믿는 성령 하나님의 역할을 설명해주는 것이에요.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는 교회와 성도에 대한 믿음의 고백으로도 볼 수 있지만, 그러한 믿음의 고백을 하도록 이끄는 존재. 그 고백이 가능하도록 하는 존재가 바로 성령 하나님이라는 것이죠.
성령 하나님의 역할은 내 삶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성령님 하면 무엇인가 딱! 떠오르지 않고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운 우리에게 구체적인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를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거에요.
우리가 고백해왔던 “성령을 믿사오며" 이것은 내 삶에 일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습니다. 라는 말의 줄임말과도 같아요.

성령

성령님은 내 삶과 정말 밀접한 관계가 있는 분이에요. 멀리 떨어져 있는, 그저 친분만 있는 누군가가 아니라 내가 인식하지 못해도 내 삶에 이미 깊이 개입해 있는 존재가 바로 성령 하나님이에요.
성령님 역할은 정말 다양해요. 그 중 몇가지만 나누어 보려고 해요.
먼저 성령님은 우리를 돕기 위해 이 땅에 오셨어요. 보혜사 성령이라는 표현 들어보았죠? 솔직히 보혜사 라는 단어를 듣고 한 번에 이해한 사람 없을거라 생각해요. 보혜사 말도 어렵잖아요. 우리가 자주 쓰는 단어도 아니고.
보혜사는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인데요. 파라는 곁에. 클레토스는 누군가를 돕기 위해 부름받은 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보혜사 성령님이라는 뜻은 “누군가를 곁에서 돕기 위해 부름 받은"이라는 뜻인거죠.
그 이름의 뜻처럼 성령님은 우리 곁에서 함께 하고 계셔요. 함께 있는 것을 넘어 가르치고 가르치고 증언하시고 우리의 삶을 유익하게 만들고 변호하고 계셔요.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 것은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사역을 동일하게 이어 받으신 것을 말해요.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죠. 우리와 하나가 되어서 그 분의 뜻이 나의 뜻이 되고 그분의 즐거움이 나의 즐거움이 되도록 하고 계셔요.
여러분 무협지를 보면요. 다양한 무공을 가진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 중 검을 든 사람들이 오르고 싶어하는 경지가 있어요. 바로 신검합일의 경지에요. 검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죠. 검이 없어도 검을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신검합일이라고 해요. 이거 무협지에서만 쓰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아니에요. 검도에서도 사용해요.
검과 내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수련을 하고 실력을 갈고 닦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겠죠. 그렇게 죽을똥 살똥 해도 오르지 못하는 것이 신검합일이에요.
여러분이 생각하고 공부하는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를 원한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미친듯이 연습하고 공부하고 매진해야겠죠. 손흥민이 EPL 득점왕을 그냥 했을까요? 박지성이 맨유에서 그냥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그들도 미친듯한 노력과 훈련 그리고 반복된 절제의 삶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잖아요. 세상의 모든 것들은 최고의 경지에 서려면 뼈를 깎는 고통과 시간을 보내야 해요.
여러분 // 성령님을 여러분의 삶에 모시기 위해 그리고 성령님과 하나 되기 위해 어떤 노력 한 것이 있나요?
무슨 게임하는 것처럼 퀘스트를 수행해서 성령과 하나됨을 이루어낸 사람 있으면 이야기 해줄래요?
10만 시간 명상하기. 하루에 5개씩 선행을 베풀기. 기도 1만시간하기. 예배 시간에 졸지 않기. 뭐 이런 거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하라고 하셨나요?
그런 것 해야 성령님을 보내주겠다 하지 않으셨어요.
그저 믿기만 했을 뿐인데 성령님을 보내주셨고 그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면서 함께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해주셨어요.
우리는 구원만 거져 받은 것이 아니에요. 성령도 거져 받았어요. 그래서인지 성령님에 대한 감사함도 고마움도 그리고 소중함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아갈 때가 많아요. 우리가 그렇게 살아간다해도, 성령님은 우리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함께 하세요.
그러면서 우리에게 가르치세요.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는 일을 하세요. 우리 어떤 노력도 없이 성령을 받았어요. 합일 되는 삶을 살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해요. 그래서 성령님이 우리 마음 속에서 계속해서 말씀이 떠오르게 하고 하나님을 생각하게 만들어요.
왜? 무엇을 위해? 내가 일하고 있으니까 알아달라고?
아니죠. 우리가 받은 구원이 결코 번복되지 않으며,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가르치고 계셔요.
세상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제외한 나머지를 주입시키죠. 그래서 우리의 모든 영역이 세상의 것으로 물들어 가요. 그 때 성령님이 여러분에게 정신차리라고 말을 던지시는거에요. 세상에 넘어가지 마라. 세상에 물들지 마라. 세상처럼 살아가지 마라! 라고 안에서 끝없는 외침. 어떻게 보면 공허한 외침을 계속해서 하고 계셔요.
그 성령님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내 마음과 시간을 드리기 시작하면요. 여러분이 원하는 성령 충만한 삶으로 변화가 시작되어요.
성령 충만해지면 뭐가 좋겠어요?
여러분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거에요. 예수님이 보이는거에요. 성령 충만하면 그 기쁨을 나만 누릴 수 없으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게 되는거에요.
성령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아멘
내 안에 이미 들어 와 있는 것. 절대 나와 떨어질 수 없는 성령. 그 분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그 분을 수단삼아서 충만하라는 거에요. 성령으로 예수가 그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 차도록 하라고 말하는거에요.
다른 주님인 알콜로 여러분의 오장육부를 채우고, 알콜로 충만해져서 담대한 삶 살아가지 말고!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라고 말하는거에요.
여기에 술 마시는 사람 많다는 것 알아요. 정죄하려고 하는 것 아니니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미안하지만 여러분이 술을 마신다는 그 이야기들이요. 정말 다양한 곳을 통해 저에게 들려와요.
많이들 걱정하시죠. 교회에서 여러 사역을 하고 있는 “누구"가 술을 마시고 있어요. “누가" 사람들에게 전화해서 불러모아서 술을 마시고 있어요. 다 들려요. 하지만 따로 불러서 책망하거나 하지 않았어요.
그저 기도할 뿐이에요.
“하나님 이 친구가 지금은 성령님보다 하나님보다 또 다른 주님을 너무 사랑해서, 그 주님으로 삶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요. 그 주님이 다른 주님으로 바뀌게 해주세요.”
“청년들 마음 속에 있는 그 주님이 충만하게 차고 넘쳐서 토하고 아파서 다시는 쳐다도 보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기도 해요.
성령으로 충만한 삶이 아닌 알콜 혹은 다른 것들로 충만한 삶의 끝은요. 비참해요. 좋지 않아요. 그런데 더 비참하고 속상한 일이 뭔줄 알아요?
그렇게 알콜로 다른 것들로 충만한 삶을 살다 우리가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가잖아요?
너무 부끄럽게도 성령님이 예수님이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심판대 앞에서 증언하신다는거에요.
그 분들이 우리를 변호할 이유가 하나도 없잖아요.
목숨걸고 우리를 구원해주셨는데, 우리가 그 구원을 알지만 다른 것들로 삶을 가득채워서 살았어요.
그렇게 하나님이 아닌 알콜, 세상의 것들로 충만한 삶을 산 것은 나와 여러분의 선택이었어요.
그런데요. 무참하게 죽은 예수님. 비참하게 죽은 그 분이 또 그 자리에 서서 저와 여러분을 변호하고 증언한다는 것. 전 이게 정말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속상한 일이라 생각해요.
그 심판대 앞에 서서, 내가 선택해서 멋대로 산 삶에 대해 변호하시는 성령님을 생각해봐요.
그 분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하셨어요. 하지만 난 그 일들을 알면서 외면했어요. 그럼에도 예수님은 성령님은 우리의 무죄를 위해 최선을 다해 또 변호 하세요.
그 것을 여러분이 바라본다면 어떤 마음이 들 것 같아요? 미안하고 죄송한 감정이 생기지 않을까요?
성령님은요.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그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변호하시는 예수님께 부끄러움과 죄송한 마음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지금 저와 여러분의 삶에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하도록 이끌고 계셔요.
내 삶에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은 “이 못난놈아!!”하고 책망하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정죄하지 않는다. 힘을 내라.” “너의 죄는 십자가에서 다 사해졌다. 그러니 스스로를 정죄하지 말라. 힘을 내라” 라고 말씀하기 위해 나의 죄를 깨닫게 하시는거에요.
그래서 성령님께서 우리 삶에서 일하시면서 계속해서 우리의 삶을 바꾸어 가기 위한 일을 하고 계셔요.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어진 성격 혹은 삶의 모습들이 있나요? 보이지 않는 그 성령님께서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심을 통해 우리가 나도 모르게, 원하지 않지만 계속해서 변해가는거에요.
보이지 않는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면 바람이 있구나! 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는 것처럼, 내 모습 혹은 상대방의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성령님의 일하심을 우리는 알아차려야 해요.
여러분 지금 삶을 어서 돌아보세요. 예수님 믿고 변화되어진 성격이나 삶의 모습들이 무엇이 있나요? 어떤 부분이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었나요?
여러분의 말과 행동 삶의 변화를 가져온 것은 여러분이 아니에요. 나이가 먹고 자라면서 머리에 지식들이 들어가면서, 또 주위 눈치를 살피게 되면서 삶의 변화와 언행들이 고쳐진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 안에 있는 그 성령님의 일하심으로 변해가게 된거에요. 참지 않고 들이박고 싶을 때 많잖아요. 그 혈기를 참게 해주는 것이 성령님의 일하심에요. 우리의 삶을 유익하게 만들어가고 계신거에요. 우리를 통해. 부족한 나를 통해 선한 영향력이 흘러가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끊임없이 건들면서 변화시키고 계시는거에요.
성령님은 우리 곁에서 계속해서 일하고 있어요. 여러분의 삶에 생각보다 더 깊이 개입하셔서 수많은 곳을 만지고 회복시키고 계셔요.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

여러분 성령 세례라는 말 들어봤나요? 성령 세례는요. 특정한 때에 받는 것이 아니에요. 어떤 수련회 혹은 부흥회 등과 같은 특별히 준비되어진 집회때에만 받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 나라는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참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성령 세례. 여러분 이미 받았어요.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임한 가장 첫번째 역사가 바로 성령 세례 였어요. 반복되지 않는 딱 한번 단회적 사건이 바로 성령 세례에요.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고 고백할 때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 우리의 옛 자아는 죽고 주 안에서 새로운 자아, 새로운 정체성. 그것이 바로 성령세례에요.
지나온 나의 삶을 부인하고 이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겠노라 말하며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도록 하는 삶의 전환점.
나는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선 살아갈 수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령 세례의 증거에요.
여러분도 한번 이상 해봤을 고백.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미 내가 성령 세례를 받았고 변화되었다는 확실한 증거에요.
사실 저와 여러분의 삶 자체가 기적 아닌가요?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 먼저 선택받아 구원을 받고, 세상의 가치가 아닌 보이지 않지만 절대가치를 발견하고 믿고 따를 수 있게 된 우리의 삶 자체가 기적 아닌가요?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바보같다 말하지만 사실 아니죠. 우리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바보라 말하는 그들이 안타까운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죠.
그들의 말에 상처 받고 반응하지 마세요. 성령 세례를 받은 우리는 이미 “주님의 무한한 은혜로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이에요.
그러한 말들에 절대 상처를 입을 수 없는 아다만티움보다 더 강한 갑옷을 입고 있는 존재가 바로 저와 여러분이에요.
반면 성령 충만우리의 삶 속에 끊임없이 계속해서 적용되는 것을 말해요.
에베소서에 보면요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해서' 내 삶을 주의 뜻대로 맞추어 살라고 말해요.
성령충만이란 내 삶을 주님의 뜻에 맞추어 사는 것이에요. 어떠한 방언이나 예언을 하고 누군가의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는 그러한 능력과 은사를 받는 것이 아니에요.
성령충만함의 진정한 의미는. 점점 더 바보가 되어가는 것이에요. 심플하고 간결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령충만의 의미에요. 하나님 밖에 모르는 바보가 되어가는 것이죠.
성령충만한 사람.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요. 하나님 앞에 내 고집을 부리지 않아요. 겸손해지고 긍휼과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가요. 성령님이 계속해서 그렇게 내 안에서 일하시거든요.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모이면 어떻게 되는 줄 아세요? // 하나가 돼요.
오늘 본문 오순절 사건이 그랬어요. 모두가 바보가 되어갔고 바보들이 모여 하나가 되어지기 시작했어요.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말. 성경의 표현으로는 방언을 하기 시작해요. 처음에 사람들은 이 말을 들으면서 “미쳤다"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들어본 적 없는 이상한 말을 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 들의 말이 “미친 것이 아님"을 증명해주는 사람들이 등장했어요. 바로 절기를 맞이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인 다른 나라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에요. 깜짝 놀란거에요. 분명 저 사람들은 내가 사는 나라에서 본 적도 없고, 그 나라에 가본 적도 없는 사람인 것이 분명한데 외국어를 하고 있거든요. 이상한 말 한다. 미쳤다 라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외국에서 온 유대인들이 “어? 저거 내가 사는 나라의 말인데?”라고 증명을 해준 것이죠.
여러분 성령 충만해진 사람들이 왜 ‘다른 나라의 말'을 하게 된 것일까요? 성령 충만과 언어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성령 충만하면 외국어를 잘한다라고 한다면 여러분 기를 써서라도 성령충만한 삶을 살려고 하겠죠? 더 이상 영어나 스페인어, 독일어, 중국어, 일본어 등 외국어 공부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들이 ‘다른 나라의 말'을 한 것에는 한 비밀이 숨겨져 있어요. 여러분 원래 우리는 한 언어를 쓰는 조상을 갖고 있었죠.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과 같아 지기 위해, 흩어져 번성하라는 말을 어기고 모여서 바벨탑을 쌓아 올리기 시작했죠.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쌓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흩어버리셨어요.
그 때 나라들이 생기며 언어들이 다양해졌어요. 그래서 대화가 되지 않았어요. 그렇게 사람들 사이에 거리감이 생겼고 결국 흩어졌죠.
사람을 흩고 언어를 다양하게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죠. 언어를 다양하게 만드셨다면, 그 언어들을 하나로 합치거나 혹은 언어들을 습득할 수 있는 능력도 우리에게 주실 수 있겠죠.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다양한 언어를 말할 수 있었던 이 사건은요. 흩어졌던 사람들과 언어가 이제 다시 하나가 되는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하는거에요.
각기 흩어져 살던 죄인들. 오해하고 대화가 되지 않아 거리감을 느끼게 된 그들. 죽어서 영원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던 우리를! 서로 알지 못하고 죽어가던 우리들을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한 가족으로 묶어주는 역사의 첫걸음이 시작된 거에요.
성령충만을 통해 내가 하나님과 가까워졌어요. 관계가 회복되었어요. 옆 사람도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었어요. 성령으로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었고, 성령으로 나와 내 옆사람이 하나가 되어가요.
성령으로 모두가 하나가 되는 엄청난 사건의 시작이 오순절 다락방. 각기 다른 언어의 사용이었어요.

나는 성령을 믿으며

“나는 성령을 믿으며"
이 고백은 내 안에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내가 믿습니다. 머리로 믿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내 마음 다해 믿습니다! 이것이 실제 내 삶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성령님께서 우리 삶에 깊게 개입하셔서 하시는 일 세가지를 꼭 기억하세요.
첫째, 관계를 맺게 해주세요. 개개인이 성부, 성자와 관계를 맺게 해요. 그렇게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모이게 해요. 그래서 한 공동체를 이루어 각자가 만난 하나님을 함께 나누고 또 나누면서 각자의 믿음을 강하게 굳건하게 만들어줘요.
둘째, 깨닫게 하세요. 이전까지 이해하지 못했던 성경 말씀, 각자의 은혜를 이해하고 받아드리게 하세요. 말씀의 깊은 의미와 진리를 서로가 함께 알아가도록 해주세요. 그것을 통해 우린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죠.
마지막 회복을 위해서에요. 파라클레토스. “나의 곁에서 나만을 돕기 위해 있는 성령님"이 우리를 회복의 길로 그 끝으로 인도하세요. 파라클레토스. 보혜사의 주된 목표. 최종 목표는 우리의 회복이에요. 상하고 찢어지고 갈갈히 무너진 우리의 삶과 마음을 완전히 회복시켜주는 것이 파라클레토스. 성령님의 주된 목적과 목표에요.
‘너는 내 아들이라’라는 찬양을 다 알거에요.
이 찬양의 가사를 쓴 이재왕님은 바로 이러한 회복을 경험하신 분이에요.
1967년에 태어나셨는데요. 선천적인 근육병 때문에 네 살 때부터 몸이 아파 의사들은 스무 살을 넘길 수 없다고 했어요. 그 분은 어머니 등에 업혀 다녔던 초등학교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의 공부를 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그는 예수를 주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 혼자 힘으로 노력해서 500편의 찬송시를 남기고 33살에 세상을 떠나셨어요.
그 분이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던 20대 초반의 어느 날이었어요.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몸부림쳤지만 아무 것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과 자기 자신이 너무 비참해서 그냥 죽어버리고 싶다!! 라는 마음과 생각이 가득찼던 때가 있었다고 해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죽음을 택할 수도 없는 그 비참한 순간에 들었던 무력함과 절망 그리고 허무함에 빠져 있던 그 때 시편 2편 7절의 말씀을 보게 되었어요.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그 때였어요.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는 구절이 갑자기 그에게 다가오기 시작하면서 텅 비어버렸던 그의 심령과 마음에 무엇인가가 채워지기 시작했어요.
죽고 싶지만 스스로 죽을 수 조차 없는 그 무력함 속에 있던 그에게 “내가 너를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낳았다"라고 말씀하시는 그 시편을 통해 그 분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비록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몸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존귀하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은 내 모습이 이래도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인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구원해주셨구나. 그렇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구나"
지독한 괴로움과 자기 연민 그리고 절망 속에서 말씀을 통해, 성령님의 일하심을 통해 자리에서 일어나서 쓴 찬송시가 바로 “너는 내 아들이라"에요.
저도 여러분도 동일해요. 비록 내 모습은 형편 없고 여전히 나의 믿음은 보잘 것 없이 아주 작아 보이지만요. 그런 저와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시면서 성령님을 보내주신거에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아버지 하나님"으로 온전히 회복하게 된 것. 그 것이 바로 성령님의 역사에요.
그 역사는 지금도 동일하게 저와 여러분에게 일어나고 있어요.
하나님은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저와 여러분에게 성령님을 통해 다가오셔서 말씀하셔요.
너는 내 아들이라. 내 사랑하는 아들과 딸이다. 그 어느 것과 절대 바꿀 수 없는 나만의 아들과 딸이다. 라고 말씀하고 계셔요.
“나는 성령을 믿으며"라는 고백을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과 딸로 삼아주심에 감사하고, 나와 관계를 맺어주심에 감사하며 매일 삶 가운데 나를 이끌어 주고 계심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이번 한주의 삶이 되기를 소망해요.
한 주간 너는 나의 사랑하는 딸. 아들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그 분의 마음을 느끼며 따뜻함 속에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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