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또 다시(요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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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2년 6월 26일 주일
제목 : 새로 또 다시
본문 : 요한복음 3장 1-15절 *신57
[도입]
지난 주 우리는 학습과 입교자들을 축하하기 위해 성인예배로 통합되어 예배를 드렸습니다. 무엇보다 많은 선생님들과 또 친구들의 축복과 축하 속에서 그 시간이 채워질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바라옵기로는 학습과 입교를 받은 친구들은 과거의 모습을 벗어 던지고, 그리스도로 새 사람 입은 자 되어 거듭난 삶을 살아내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이미 입교와 세례를 받은 친구들은 과거 내가 받았던 은혜를 다시 되새기시며 주님과의 교제가 원활하게 이루어져 가고 있는가 점검하시고 회복과 발전의 대로를 걸어가길 소망합니다. 또 이제 학습을 준비하거나, 입교를 준비하거나, 세례를 준비하는 친구들은 내게 부어주실 주님의 은혜를 기대하며 기도로 준비하였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음 학습,입교,세례식에는 우리 친구들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함께 축하하고 축복하는 시간이 되어지길 소망합니다.
오늘은 우리가 세례를 나누고자 함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고자 하는 것은, 본문을 보니 저번 주 우리처럼 “성령으로 새 사람 입은 자”가 등장을 합니다. 그 인물과 또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 또 다시”의 은혜를 받아 누리길 소망합니다.
[니고데모는 누구인가?]
본문을 쭉 보니 두 인물의 대화가 담겨 있음을 보게 됩니다. 바로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는 나름 알 것이니, 오늘은 니고데모에 대해 나눠보고자 합니다.
여러분, 본문은 니고데모를 어떻게 설명합니까? 1절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성경은 니고데모를 어떻게 설명합니까? 바리새인이라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를 유대인이라 설명합니다. 또 그를 지도자라 설명합니다. 그가 유대인의 지도자라 설명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문헌들을 보면 그가 어디서 일 했는가를 짐작해볼 수 있는데, 당시 유대인들의 최고 의결 기관이자, 71명의 인원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의의 회원으로써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 중 71명에 속할 정도의 인물이니 당시 사회적으로 얼마나 많은 존경을 받았던 자였겠습니까? 존경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꽤나 자리를 잡았던 인물이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실 당장 학교만 생각해봐도, 교장 선생님을 복도에서 마주하게 될 때, 이미 우리보다 더 높은 자임을 알아 고개를 숙이고 깍듯한 예우를 취하지 않습니까?
당장 우리가 속한 학교에서의 교장 선생님만 보아도 우리의 태도가 달라지는데, 유대인 모두를 통틀어 71명만 속한 곳의 회원이니 다른 이들의 대우가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밤을 택한 니고데모]
또한 니고데모 입장에서도 생각해보면, 자신의 직위와 사회적 위치를 모를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분명 자신을 향한 이들의 인식과 자신이 가져야 할 사회적 태도를 잘 알았을 터인데, 그런 입장에서 주 앞에 나아가는 것이 쉬운 일이었을까? 생각해보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니고데모도 그렇습니다. 2절 어떻게 시작합니까?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물론 밤에 찾아감에 있어 많은 의견들이 있습니다. 또 많은 학술적 논쟁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것으로는 당시 다른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달랐습니다. ‘그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만나고 싶었으나 낮에는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는 시간대였기에 일부로 밤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밤은 니고데모의 신앙상태를 의미한다는 이론도 있고, 낮에는 일을 했기에 밤 외에는 시간 선택이 불가피했다는 이론 등 많은 이론이 있지만, 어찌 되었든 그는 사람의 시선이 가장 적은 밤을 택하여 예수 앞에 나아 왔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메시야 입니까?]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그냥 읽어내려갈 때, 우리는 이 구절에서 어떠한 문제도, 또 어색한 것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쉬운 이해를 위해 우리말 성경으로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가 밤에 예수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랍비여,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님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선생님이 행하신 그런 표적들을 아무도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라 삼을 만한 것이 보이십니까? 아니요. 전혀 눈꼽만치도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아이 그래. 너 정말 잘 알고 있구나. 그 믿음 변치 말고, 끝날까지 복음을 전하렴.” 이라 말할 것 같지만,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너무 생뚱맞지 않습니까? 니고데모의 고백인듯한데, 그것이 질문이었는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라 기록하며, 또 니고데모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이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없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 니고데모의 고백은 고백이 아닌 질문이었습니다. 어떤 질문입니까? “당신이 정말 메시야가 맞습니까?” 라는 질문을 한 것이지요. 이들은 “메시야의 오심”을 정말 기다리던 자였습니다. 왜요? 여기서 이들과 예수님의 시점이 다름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점의 차이가 3절과 같은 예수님의 대답을 이뤄낸 것이지요.
이들이 메시야를 기다림은 자신들을 로마로부터 구원할 자를 찾았습니다. 로마로부터 구속받아 살아가는 자신들이 메시야의 오심을 통해 해방됨을 누리게 될 것을 기대한 것이지요. 그가 진짜 메시야를 기다린 이유. 그것은 내 안위에 초점이 있었고, 내 평안에 초점이 있었습니다.
[거듭나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심으로 천국백성으로 이루게 함에 목표를 두셨다는 것이지요. 그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3절 함께 읽어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 말합니다. 여기서 핵심이 무엇이겠습니까? “거듭남”입니다. 거듭남이 무엇입니까? 이는 “다시 태어난 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니, 주님. 거듭나야 하나님 백성으로 천국갈 수 있었으면 미리 좀 알려주시지. 어떻게 다시 태어납니까? 주님도 참 유두리가 없으시네..” 라고 하소연 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요?
4절입니다.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방금 제가 재연해드린 것이 니고데모의 질문과 비슷해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생각해봅시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이었는데, 거듭남의 의미를 정말 몰랐을까요? 아니요. 그는 알았어요. 결코 거듭남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근데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니고데모의 의중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건 바로 “거듭남의 가능성” 이었습니다.
“주님, 저도 가능합니까? 제가 메시야의 오심으로 거듭날 가능성이 보이십니까?”
우리는 삶을 살아갈 수록 우리의 습관과 우리의 신념을 바꾼다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압니다. 나는 A라는 사실을 30년이 넘도록 맞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제와서 갑자기 A는 틀렸으며 이제는 B가 맞다고 말한다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 입니다. 쉽게 바뀔 수 없는 그런 변화 가능성이 희박한 존재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니고데모는 물은 것이죠. “주님보시기에 저는 가능성이 얼마나 있어 보이십니까?”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과 성령에 대해서도 많은 학자들의 소견들이 있지만, 우리가 핵심으로 볼 것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들어갈 조건이 무엇입니까? 바로 “거듭남” 아니겠습니까?
이제 그 거듭남, 도대체 우리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거듭나게 합니까? 15절입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믿음이 곧 우리를 거듭난 백성되게 하며, 또 거듭난 백성이 될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적용]
사랑하는 청소년부 여러분. 니고데모는 “나는 이 땅에 임할 하나님 나라만 바라보며 살았는데, 거듭나야 한다니요? 지금껏 내 신앙이 잘못된 것입니까?” 라며 외쳤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니고데모의 신앙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 잘못되었습니까? 믿음이 주를 위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나의 평안과 행복을 위한, 해방을 위한 믿음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삶에 적용하며 나아가야 합니까? 주를 믿되, 믿음의 주체가 오직 주님 이어야 합니다. 내가 우선이 되어서는 안되며, 내가 기준이 되어서는 아니됩니다. 오직 주만이 우리의 믿음의 주체가 되어야 함을 고백합니다. 바라옵기로는 오직 주만 바라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백성으로서, 또 훗날 니고데모가 주를 바람으로 주 앞에 간절히 나아가는 변화된 신앙을 보인 것처럼, 우리 또한 변화의 신앙을 보이는, 성장의 신앙을 보이는 귀한 백성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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