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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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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믿음의 의미 2. 에클레시아 3. 코이노이아 4. 교회를 사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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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다는 무슨 뜻인가

오늘 우리는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에 대해 함께 나눌거에요.
말씀을 나누기 전 여러분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며 오늘 말씀을 나누려고 해요. 여기에는 정답이 없어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을 나누어 주면 돼요.
여러분에게 ‘믿는다.’ ‘믿음'은 무엇인가요? 여러분의 언어로 ‘믿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나요? 여러분은 무엇을 믿고 있나요?
우리가 매주 살펴보고 있는 사도신경의 ‘믿는다' CREDO. 이 고백은요. 크게 3가지의 의미를 갖고 있어요.
CREDO. 믿는다. 이 것의 첫번째 의미‘의지하다. 신뢰하다'에요. CREDO는 코르도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는데요. 코르도는 ‘심장을 바치다'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이 ‘무엇인가를 혹 누군가를 믿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나의 심장을 바칠 수 있다.라는 말인 것이죠.
심장을 바치는 것은 어떤 의미죠? 나의 모든 것. 생명까지도 줄 수 있다. 모든 것들을 빠짐 없이 맡길 수 있다라는 아주 강력한 표현이죠?
믿는다. 이 고백은 정말 내가 신뢰하고 의지한다.라는 의미에요.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여러분의 이 고백은 ‘하나님께 나의 심장을 드릴 수 있습니다.’라는 것이에요.
CREDO. 믿는다. 두번째 의미‘가장 가치 있다. 가장 소중하다’에요. 첫번째 의미와 비슷한데요. 내가 믿는 이 대상은 ‘나의 심장을 기꺼이 바칠 수 있을 정로도 가치있고 소중하다.’ ‘내 생명보다도 더 가치있다'라는 것이에요.
이것은 단순히 내가 믿고 있는 대상. 그 대상의 말이 진짜다! 이것이 진리이다! 라고 확신하는 것이 아니에요. 단순히 이게 맞아! 하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맞다! 라고 생각하는 이 것을 위해 내 목숨을 즐겁게 드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믿는다의 의미에요.
CREDO. 믿는다. 세번째 의미‘가치 목록의 상단에 두다’에요. 여러분이 가치 있다 생각하는 것들이 있죠? 내 삶에 이것은 꼭 있어야 한다. 이것만큼은 내가 포기 할 수 없다. 라고 하는 것들이 한두가지는 있을거에요.
내 삶에 가장 가치 있는 것들 중 가장 상단에 ‘믿음'을 올려두는 것이 ‘믿는다'에요.
여러분 버킷 리스트라는 말 알죠?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것들의 목록이죠. 아마 여러분에게도 버킷 리스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여러분 이 버킷 리스트가 어디에서 시작된 말인지 혹시 알고 있나요? 버킷 리스트는 사실 슬픈 이야기에서 시작되었어요.
예전에 교수형을 집행할 때 죄인을 버킷. 양동이 위에 먼저 세워두었어요. 그리고 목에 줄을 감죠. 그리고 죄인이 그 버킷을 걷어차도록 지시해요. 버킷을 걷어차기 전 마지막으로 죄인에게 원하는 것을 말하라고 집행관이 이야기 해요.
죄인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가장 하고 싶은 것. 그것이 바로 버킷 리스트에요.
여러분이 갖고 있는 그 버킷 리스트. 그것을 다 이루면 행복할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저에게도 버킷 리스트가 있었어요. 버킷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는 재미가 있더라구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저는 버킷 리스트를 꺼내보지 않게 되었어요.
그 이유는 버킷 리스트를 이루어 나가면 나갈수록 또 다른 욕심이 나더라구요. 마치 내 삶이 그 버킷 리스트를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지더라구요.
‘내가 믿는 대상’ 하나님이 가치 목록 상단에 있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들이 내 삶의 가치를 만들어 가기 시작하니까요. 다른 것들로 삶이 채워지기 시작하니까요.
그것을 열심히 해서 이루고 나니 너무 허무한거에요. 그 허무를 지우기 위해 또 다른 버킷 리스트를 위해 달려가게 되더라구요. 정신없이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을 위해, 내 삶의 가치 실현을 위해 살아가게 되더라구요.
저는 깨달았어요. 내가 적어둔 이 버킷 리스트는 끝이 나지 않겠다. 그리고 이것을 다 이루어도 절대 나는 행복한 감정을 느낄 수 없겠다.
그 이후로 저는 버킷 리스트를 제 휴대폰에서 지웠어요.
저도 여전히 못하지만 하나님을 내 삶의 가치 목록 최상단에 두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삶의 가치 목록 최상단.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삶의 최우선 순위를 하나님으로 둔다는 것이에요.
여러분이 고백하고 있던 그 ‘믿음'은요.
내 심장을 하나님께 드릴만큼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한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이라는 그 진리가 나의 생명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 삶. 최우선 순위로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내겠습니다! 라는 그러한 선포였어요.

에클레시아

여러분 혹시 에클레시아. 라는 말 들어봤나요? 정확한 뜻은 몰라도 에클레시아 라는 단어는 들어보았을 것이라 생각해요.
에클레시아는 ‘여러분'이에요. 우리 가온누리 공동체에요. 에클레시아. 세상에서 구별되어 불러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에요. 다른 말로. 하나님을 섬기는 곳. 그곳이 바로 에클레시아에요.
이 에클레시아는요. 하나님이 거룩하다 구별하여 불러낸 존재들이 모여 만든 공동체에요. 하나님이 거룩하다 구별한 공동체인 에클레시아.
진짜 거룩한 공동체일까요? 여러분이 생각했을 때 교회는 거룩한 곳인가요? 여러분 교회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올라요?
물론 여러분이 오랜 시간동안 지내왔던 인천제2교회가 생각나겠죠. 그리고 무엇이 생각나나요? 예수 그리스도가 생각나나요? 거룩한 곳이라 느껴지나요?
하나님이 거룩하다 구별하여 불러주신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이지만 사실 이 곳은 거룩하지 못할 때가 많아요. 어쩌면 교회와 거룩은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할거에요.
세상에서 빛이 되지 못하는 교회. 침몰하고 있는 배처럼 좌초하고 있는 곳이 교회의 모습이고, 세상이 바라보는 교회라고 해도, 교회는 거룩한 곳이에요.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 곳에 계시니까요. 우리에게 거룩한 모습이 없다해도, 이 곳을 세우고 만들어가시는 분이 거룩한 하나님이기 때문이에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이 바로 그 것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어요.
‘교회'는 함께 지어져 가는 곳이라고 해요. 20절을 보면 예수님이 교회의 모퉁잇 돌이 되었다고 해요. 건축할 때 기초가 되는, 가장 먼저 땅에 내려놓는 곳이 바로 모퉁잇 돌이에요. 가장 아래에 있기에 눈에 띄지 않고 잘 보이지 않지만요. 이것을 놓아야 건물 짓기가 시작돼요.
교회의 시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요. 예수님께서 그 삶을 통해 사람들을 불러모으셨어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셨어요. 그렇게 교회의 모습. 거룩하다 구별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 공동체를 만드셨어요.
그리고 그 분이 하늘로 돌아가시면서 제자들에게 교회를 세우셨어요. 그래서 교회의 시작. 모퉁잇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요.
22절의 말씀. 함께 지어져 간다. 모퉁잇 돌인 예수님을 중심으로 저와 여러분은 함께 성전의 건축물이 되어가는거에요.
모퉁잇 돌은 흔들리지 않고 삐뚤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그 위에 쌓아져 올라가고 있는거에요.
우리는 거룩할 수 없어요. 죄 때문에 더더욱 거룩해질 수 없어요. 그런데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거룩하다 말씀하셨고, 거룩해질 수 있도록 구원과 은혜를 베푸셨어요.
함께 지어져 가는 과정에 여러 문제가 생기고 어려움이 발생하지만 결국 그 끝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아름답고 거룩한 공동체가 될 거에요.
하나님께서 반드시 거룩한 공동체로 우리를 만드실 것이거든요.
거룩한 공교회. 공회라는 말은 일반적이고도 보편적교회라는 뜻이에요. 사실 보편적 교회라는 이 단어는 영어로 카톨릭이에요. 여러분이 아는 그 천주교. 로마 카톨릭이 거룩한 공교회라는 단어에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로마 카톨릭이 성경적인 교회다! 라는 그런 말은 아니에요.
교회의 성격이 바로 보편적이고 전우주적이라는 뜻이거든요. 카톨릭은 카톨리케라는 헬라어에서 파생되었어요. 카톨리케라는 단어로 교회를 보면요. 교회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항상 존재했다. 태초부터 세상 끝날까지 존재한다. 라는 뜻이에요.
교회가 태초부터 있었다는 것.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 시작이 하나님이라는 거에요. 교회의 뿌리는 하나님이고, 그 분 지금 하늘 나라에 계시죠.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모세, 다윗, 바울도 그들이 살았던 그 시기에 교회라는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었어요.
구약 시대에 교회라는 단어는 없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과 함께 예배하며 살아갔어요. 그들의 평생의 삶이 바로 에베소서 2장 22절. 함께 지어져 가는 공동체였어요. 그 공동체가 대를 이어 지금까지 저와 여러분에게 이어졌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거에요.
교회. 참 많은 욕을 먹고 공격을 받죠. 코로나 때 교회가 집중 공격을 받을 때 교회는 끝이 난 것처럼 보였어요. 사람들이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교회 다닌다고 하면 부끄러움을 당할 정도로 어려운 시간이 있었어요.
하지만 교회는 무너지지 않았어요. 그 어려움과 공격 속에서도 버텨냈어요. 그리고 다시 이 공동체로 사람들이 돌아오기 시작했어요. 왜 그들이, 우리가 욕을 먹어가면서까지 이 공동체로 다시 돌아오려 하는 것일까요?
단순히 인간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어서? 여기 오면 그냥 마음이 편해서? 사람들이 잘해줘서? 네 그런 이유도 있겠죠. 하지만 우리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는 이유는요.
이 교회의 뿌리가 하늘에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뿌리로부터 공급을 받아야 하거든요. 그래서 실망하고 상처를 받고 교회 공동체에 환멸을 느끼더라도 결국 우리는 다시 돌아오는거에요.
사도신경이 만들어졌을 때의 사람들에 교회는 이런 의미였어요.
“교회. 나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가 있는 곳입니다. 교회는 나에게 정말 소중한 곳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내가 제대로 살기 위해서 가장 필요하고 소중하게 여겨야하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아까 나누었던 ‘믿음' 내 심장을 바칠만큼 소중한 그 믿음을 기꺼이 나눌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교회입니다. 라고 사람들을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들도 죽음을 무릅쓰고 다시 교회로 돌아오고 모이고, 또 숨어서 하나님을 섬겼던거에요.

코이노이아

성도의 교제 중 성도의 한자 뜻을 풀이하자면 ‘거룩하게 된 무리'에요. 저와 여러분을 성도라고 하죠? 그럼 우리는 ‘거룩하게 된 무리' 인 것이네요?
그럼 여러분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해볼래요?
“나는 거룩한가?” “휘석아 너 거룩하니?”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무엇인가요? 여러분 스스로를 거룩하다 생각하세요? 자신있게 당당하게 “나는 거룩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겠죠.
우리는 참 문제도 많고 이기적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보고 거룩하다 말씀하세요.
고전 1장2절을 보면요. 바울이 고린도 교인을 ‘성도'라고 불러요. 우리 함께 1장 2절을 찾아볼까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아멘.
사실 고린도교회는 문제가 많았어요. 진짜 많아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많았어요. 고린도교회도 교회지만 사실 고린도라는 도시 자체가 진짜 대단한 도시였어요.
누군가가 진짜 개판치고 멋대로 살고 진짜 노답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물어봤어요.
“너 고린도인이야? 딱보니 고린도인이네”
사회적으로 고린도는 정말 성적, 도덕적으로 문란한 타락의 끝판왕이었어요.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 고린도교회가 세워졌어요.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그들은 타락한 문화 속에 살아갔어요. 그래서 바울파니 게바파니 아볼로파니 하면서 당파를 짓고 싸웠어요. 싸우다가 서로를 법정에 고발하기까지 했어요.
정말 부끄러운 모습으로 거룩한 공동체인 에클레시아를 이루고 살아갔어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바울은 ‘거룩하게 된 무리’ 성도라고 하고 있는 것이죠. 바울이 그들을 성도라고 불렀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울이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성도'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니 하나님께서 이기적이고 문제 많은 우리를 “왜 성도"라고 불러주실까요?
언행이 한심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한다 할지라도
순종보다 불순종의 삶을 더 많이 살아간다 할지라도
끝까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사는 사람
그가 바로 저와 여러분이기 때문이에요.
세상이 아무리 여러분을 위협하고 공격해도. 그것을 맞고 넘어져서 통곡하며 우는 모습이 나라고 해도. 결국 하나님을 의지해서 일어날 사람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리를 향해 ‘성도' ‘거룩하게 된 무리'라고 말씀하신 것이죠.
우리가 거룩하게 된 무리가 된 이유가 있어요. 아 이정도면 무리에서 쫓겨날수도 있겠는데? 싶은데도 그 무리 속에 우리가 계속 남아 있을 수 있는 이유가 있어요.
바로 오늘 본문이에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그의 안에서 건물. 저와 여러분이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서로 교통. 통할 수밖에 없어요. 서로 교제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를 코이노이아 라고 해요. 코이노이아는 단순히 먹고 마시는 교제를 말하지 않아요.
코이노이아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 사람들의 교제를 말해요. 비록 떨어져 있더라도 한 분이신 성령님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이어지고 있음을 믿는 사람들의 교제를 말해요.
제가 작년 11월에 와서 여러분과 처음 나누었던 말씀 혹시 기억하고 있나요? 에베소서 4장 1-6절 이었어요. 그때 설교 제목은 ‘같이 걸어가기’ 였구요.
처음 말씀을 나눌 때 저는 여러분에게 이런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다. 함께 만들어가자 이야기 했었어요.
모두의 언어와 행동 그리고 생활방식이 다를지라도, 나와 생각하는 것이 달라도 내가 걸어가는 것과 속도가 달라도 그것을 인정하라. 용납하라. 인내하라. 허용하라. 다른 방식과 속도를 인정하라. 보채지도 말고 먼저 가지도 말고 그냥 걸어가라.
누군가는 한 걸음씩 신중하게 걸어갈 것이고, 누군가는 작은 보폭으로 여러 번 걸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큰 보폭으로 큼직 큼직 걸어 갈 것이다. 다 자신에게 익숙한데로 걸어갈 것이다. 나와 다름으로 인해 힘들어하지도 말고, 또 나의 생각을 다른 이에게 강요하지 말자고.
평안의 매는 줄로 이미 하나가 되었으니 그냥 걸어라. 같이 걸어라.
그것으로 충분하다. 같이 걷다보면 뒤처지는 사람도 있고 먼저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인데, 뒤처지는 사람에게는 먼저 보상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손을 먼저 내밀어 사랑을 베풀어주고, 먼저 가는 이가 있다면 겸손하게 그를 세워주라. 온유한 마음으로 용납하라.
‘성도'는 바로 이런 공동체에요. 함께 울고 웃을 수 있어야 해요.
나의 믿음이 수준이 낮아보여서 나누기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도 나눌 수 있는 공동체. 상대가 나누는 것을 듣고 공감하며 응원하고 함께 감정을 나누는 것
그것이 바로 성도. 거룩하게 된 무리에요.
우리는 혼자 신앙 생활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혼자 하나님을 믿고 섬기라 하지 않으셨어요. 함께 같이 하라 하셨어요.
오늘 본문만 보아도 알 수 있어요.
그의 안에서 서로 연결하라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라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
한 분 성령이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역사하시면서 서로를 연결하고 있어요. 떨어져 있어도 우리를 하나로 연결하고 묶어주고 있어요.
성령님의 일하심으로 ‘나. 혼자'의 신앙생활이 아닌 ‘우리' ‘함께'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죠.
여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나와 너의 교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나와 예수님'과의 교제라는거에요.
나와 예수님의 교제가 먼저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저 친목생활을 하는 하나의 동아리 개념밖에 되지 않아요.
그분이 우리를 거룩하게 구별하여 불러주셨는데, 이기적이고 문제 많은 우리를 거룩하다 하시며 교회로 불러주셨는데, 우리가 그 거룩의 대상과 교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회도 성도도 아니겠죠.
예수님과 내가 먼저 교제해야, 내 안이 그분으로 가득 차 있어야 이 곳에 와서도 나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삶을 나누며 도전을 주고 받고 위로 할 수 있어요.

성도의 교제 = 교회의 본질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 왜 이 두가지를 함께 묶어놨을까요?
교회와 성도의 교제는 사실 같은 것이기 때문이에요.
교회는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분께 감사를 표현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거룩하게 된 무리인 성도들의 다양한 삶이 나누어지는 장소'이기 때문이에요.
다시 말해서 //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그리스도의 제자. 즉 성도가 된 사람들이 모여 교제하는 공동체가 바로 거룩한 교회라는 것이죠.
‘참된 교회'는 신앙 안에서, 주님 안에서 동일한 믿음을 고백한 사람들이 관계를 맺는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곳이에요.
성도이기 때문에 모이는 것이에요.
성도이기 때문에 남남인 우리가 서로 관계를 맺고 서로 주님 안에서 사랑할 수 있는 거에요.
성도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받고 그것을 나의 비전으로 품고 사역하는 것이에요.
종교 개혁자였던 루터나 칼빈도 교회를 ‘성도의 교제'라고 표현했어요.
지금 우리가 모여 있는 이 곳은 ‘인천제2교회 가온누리 청년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같은 하나님을 믿고, 한 분이신 예수님이 피로 주신 삶을 함께 누리며 관계 맺고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에요.
나에게 교회란?
여러분에게 교회는 어떤 곳인가요? 여러분은 교회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나요? 아니 이 공동체가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도대체 이 가온누리 공동체가 여러분에게 무엇이기에 접근도 좋지 않은 이 곳에 이렇게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나요?
이 곳에서 옆에 있는 지체들과 함께 성도의 교제를 나누고 있나요? 그 교제로 인해 행복한가요?
순방학을 했어요. 방학이에요. 끝이 아니에요. 순모임 종료가 아니에요. 순방학을 준 이유는요.
자유롭게 순모임을 하라는 의미에요. 친해지고 싶었던 사람 혹은 같은 순이 아니었던 사람들과 마음껏 만나고 교제하며 예수님을 나눌 시간을 여러분에게 준 것이에요.
순방학인 7-8월 동안, 그리고 다음 달에 있을 여름수련회를 통해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이루는 가온누리 공동체가 되길 간절한 마음으로 축복해요.
이번 한주를 살아내며 여러분 스스로에게 제발 질문해주세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치열하게 그 질문의 답을 찾아주세요.
“나에게 교회는 무엇인가? 이 공동체가 나에게 무엇인가?”
꼭 질문하고 답을 찾아내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우리 함께 찬양할까요?
우리는 혼자 이 길을 걸어갈 수 없어요. 나 혼자 거룩한 교회를 만들 수도 없고, 성도의 교제를 이루어 낼 수 없어요.
“그 선한 힘에 고요히 감싸여 그 놀라운 평화를 누리며 나 그대들과 함께 걸어가네. 나 그대들과 한해를 여네"
내가 여러분이 우리가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이유. 우리가 평화를 누리며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모퉁잇돌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힘 때문이에요.
“지나간 허물 어둠의 날들이 무겁게 내 영혼 짓눌러도 오 주여 우릴 외면치 마시고 약속의 구원을 이루소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허물과 죄.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게 주었던 그 상처들 기억하지 않으신데요. 외면하지 않으신데요.
“주께서 밝히신 작은 촛불이 어둠을 헤치고 타오르네 그 빛에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온누리에 비추게 하소서"
“이 고요함이 깊이 번져 갈 때 저 가슴 벅찬 노래 들리네 다시 하나가 되게 이끄소서 당신의 빛이 빛나는 이 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그 어두움 속에 작은 촛불이 하나 보여요.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바라보지 못하고 허우적 거리며 어둠 속에 살던 우리가 그 촛불을 중심으로 모여드는거에요.
작은 불빛인 촛불을 향해 다가갈수록 어둠에 가려졌던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해요. 나 혼자 힘들고 괴롭다 생각했는데, 같은 괴로움과 아픔 그리고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서로를 바라보면 어떤 마음이 들겠어요? 가슴이 벅차 오를 수밖에 없어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힘이. 저와 여러분을 감싸는 이 찬양의 시간이 되길 바래요. 함께 손을 잡고 부축여주며 믿음으로 일어나는 가온누리가 되길 바래요.
하루 하루 서로를 생각하고 주 안에서 사랑하는 마음이 커져서 늘 새로운 은혜를 누리며 사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바라며 함께 찬양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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