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감흥없는, 그 독생자(요3: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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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2년 7월 3일 주일
제목 : 우리에게 감흥없는, 그 독생자
본문 : 요한복음 3장 16-21절 *신146
[도입]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엇까지 할 수 있습니까?
(조아엘 사진) 최근 저는 이 아이에 푹 빠져 있습니다. 물론 아내와도 나름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며, 코로나라 3년간 제대로된 데이트를 하지 못해 아쉬울 뿐이지 그래도 나름 행복한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조아엘이 나온 이후로는 아내만큼 조아엘에게도 행복한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내는 “사랑과 전쟁”등 막장 연애 프로그램이나 “연애의 참견”과 같은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데, 그럴 때 마다 저에게 방금 나온 상황을 대입하여 “내가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할꺼야?” 라는 말을 참 많이 합니다. 그 중 가장 많은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바람피면 어떻게 할꺼야?” 저는 이 질문에도 아내가 바람을 필 것이라는 불안감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 아내는 쫄보라 애당초 시도조차 못할 양반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저는 늘 “3번까지는 봐줄 의향이 있다.” 라고 대답을 합니다. 저는 제 아내를 사랑하기에 바람을 세 번까지 봐주겠다며 표현한 것이죠.
그런데, 아내에게는 정말 미안한 이야기지만, 조아엘이 나오고 나서부터는 “바람 세 번 용서”는 쨉도 안되는 것 같습니다. 제 심장까지도 내어줄 수 있을 것 같기에, 바람 세 번은 상대가 안될 듯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들을 향해 무엇까지 내어줄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저번 주 니고데모와 예수님과의 대화에 이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무엇까지 내어줄 수 있는지를 언급하십니다. 그 말씀을 통해 오늘 우리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독생자보단 100억?]
저번 주 말씀은 “거듭남”에 관한 메세지였고, 자신의 욕심과 욕망에 거듭남을 이야기 한 니고데모와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주체는 오직 주님이어야 하며, 주를 바라봄이, 주를 믿음이 온전한 신앙임을 전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이어 말씀하시는데, 16절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향해 무엇까지 우리게 주셨습니까?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여러분들은 감흥이 있으십니까? “와, 미쳤다. 나를 사랑하셔서, 뭐? 독생자 예수를 우리에게 주셨다고?! 완전 미친거 아니야?”라는 반응을 여지껏 단 한 번이라도 보이신 적이 있으십니까?
바꿔서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100억을 통장 중에 입금하셨으니” 라고 하셨다면 아마 지금 설교고 나발이고 미쳐날뛰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100억을 허락하기보다는 감흥도 없는 독생자를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현실적으로 오늘날 우리게 하나님께서 너무나 사랑하시어 하나를 허락하신다면, 아마 100억이거나 평생 건강을 달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어느 누구가 독생자를 달라 하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를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허락하심이 참으로 아쉬워지는 순간인 듯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사실에 아쉬워한다면, 여러분,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독생자보다 100억에 더 큰 감흥을 가진다는 것에 노진준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죄인으로서 우리 자신의 절망적인 상태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늘 성실히 살아가려 힘쓰고, 정직하게 살아가려 힘쓰며, 선하게 살아가려 힘쓰다보니 정작 우리의 원죄에 대해 있고 지낼 때가 상당히 많지 않은가 생각하게 됩니다. 또 우리의 자범죄 또한 크게 연연해 하지 않는 듯 합니다. 그래서 원죄와 자범죄가 해결되는 일에 크게 기뻐하지 않는 모습을 우리는 보이는 듯합니다.
생각해봅시다. 여러분들이 만약 죽을 병에 걸렸다고 말입니다. 당장 남은 나의 삶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생각해볼 때,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구찌 신발을 선물받는 것이, 에르메스 가방을 하나 선물 받는 것이, 루이비똥 핸드폰 케이스를 선물 받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런 상황 속에서는 오히려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는 의사의 말 한 마디가 더 큰 선물이고 위로며 희망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오늘 날 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주셨는데, 이 말에 아직도 감흥이 없다면, 우리는 심히 우리의 신앙에 문제가 있음을 걱정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말에 여전히 감흥도 없고, 경각심도 없고, 감동 하나 없는 것이 우리입니다.
[가장 필요한 그 이름, 예수]
그런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감흥 하나 없는, 여전히 하나님보다 세상의 위로가 더 큰 도움이라 여기는 우리에게 있어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시한부 환자에게 “건강히 살아 회복할 수 있습니다.”라는 의사의 한 마디가 간절히 필요하듯, 죄인된 우리에게는 “죄를 벗어던지고 거듭난 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하나님의 독생자가 정말, 간절히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향해 지속적으로, 또 한결같이 “독생자”를 보내주셨다 말씀하십니다. 17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독생자가 이 땅 가운데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때론 분노의 하나님을 떠올리며,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해 지옥불로 내몰아가는 어쩌면 무서운 모습만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1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가 오신 이유는 “너 안믿어? 너 지옥!” 이럴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이 땅에 오심은 “심판”하고자 오심이 아닌,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18절입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7절의 심판은 하나님의 아들이, 독생자 예수가 이 땅에 오심을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아니함으로 정죄함 받는 것이 아니라, 애당초 우리는 이미 정죄함의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런데 정작 우리는 정죄함 상태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또 여전히 “나는 괜찮아.”라고 말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인간은 인간일 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유해도, 단 한 번도 감기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강인한 건강을 가졌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저 인간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인간은 끝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여기 어느 누구도 불사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 그 어느 누구도, 즉 모든 인간은 결국 죽음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 나아감의 속도는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그 방향을 향해 걸어간다는 것이지요.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를 향해 하나님께서 한 줄기의 빛을 보내주셨는데, 바로 독생자 예수라는 것이지요.
여러분.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죄 중 가장 큰 죄가 있다면 어떤 죄가 있겠습니까? 친구의 물건을 훔친, 도둑질이 가장 큽니까? 아님, 살인죄가 가장 크다 할 수 있습니까? 강간죄나 동성애 등 많은 죄가 있지만, 명심하십시오. 우리가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죄는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탕자가 범한 죄 중 가장 큰 죄는 아버지를 모욕한 죄, 돈을 허랑방탕하게 쓴 죄 등이 있겠지만, 가장 큰 죄는 아버지를 “떠났다”는 것입니다.
[적용]
사랑하는 청소년부 여러분. 우리를 정말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독생자에 대한 감흥없이, 머리로만 이해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 독생자? 예수님이시지. 나를 위해 오셨지.” 머리로는 알지만, 정작 내 마음에 울림이 없는 상상 속 인물아닙니까?
바라옵기로는 심판이 아닌 구원자로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제는 우리 마음 속에 모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머리로 알기보다는 정말 죄로 인해 죽음 가운데 빠져나오지 못해 허우적 거리는 우리를 구원하고자 오신 생명의 빛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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