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706 수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147 views
Notes
Transcript
Sermon Tone Analysis
A
D
F
J
S
Emotion
A
C
T
Language
O
C
E
A
E
Social
View more →
묵도전 395 자비하신 예수여, 291 외롭게 사는 이 그 누군가
찬송 261 이 세상의 모든 죄를
본문 눅10:25-37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에게도 많이 알려져 있는 말씀이다. 이 비유는 1차적으로만 본다면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아낌없이 친절과 관용을 베풀라는 의미로 비춰질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 어쩌면 이렇게만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평소 우리는 이 비유에 대해 익숙해 하다 보니 예수님의 의도에 대해 잘 안다는 착각에 빠질 가능성이 많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가르치는 교훈은 단지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우라는 권고에 머물지 않는다. 낯선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라는 것, 즉 선행을 하라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주 요점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매우 단순한 생각이다.
주님께서 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이 실제로 요구하는 기준에 아무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시기 위함이였다. 우리의 선행과 종교적인 공로를 아무리 쌓는다 할지라도 그것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셨다. 왜냐하면 당시 랍비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을 잘 지키면 영생을 얻는 데 필요한 공로를 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경말씀 중 어려운 부분들은 교묘하게 피하고, 율법의 사소한 것에만 집착하면서 지나치게 까다롭게 굴던 유대종교지도자들의 희망을 완전히 꺾어놓으셨다.
예수님은 앞서 눅10장 초반에 70명의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갈릴리 지역의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셨다.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그들이 많은 반대와 마찰을 겪게 될 것을 미리 아시고 만일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든 그 땅에서 묻은 먼지까지도 다 털어버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초기 갈릴리 사역을 통해 이미 많은 가르침을 베푸셨던 마을 세 곳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시면서 저주를 선언하신다. 그곳은 고라신, 벳새다, 그리고 가버나움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예언적 저주를 듣던 종교지도자들, 더욱이 예수님께 악감을 품고 있던 저들이 더욱 더 분노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 한 율법 교사가 나서서 예수님을 당황하게 만들 목적으로 영생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의 위선적인 태도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의 질문은 배우고자 하는 정직한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늘 본문의 시작에서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는 주님을 시험할 목적으로 찾아왔다. 율법교사는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주님께서 다시 질문으로 대답하시며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고 물으시자, 율법교사는 그 질문에 대답한다. 27절 말씀을 같이 함께 읽어보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러한 대답은 율법의 도덕적 명령을 완벽하게 요약한 대답이었다. 십계명은 두 가지 범주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계명부터 네 번째 계명까지는 하나님 사랑에 대한 부분, 다섯 번째 계명부터 열 번째 계명까지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계명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율법 교사의 대답은 매우 적절하였고, 율법의 핵심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28절에서 “네 대답이 옳도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에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가 영생을 얻으려면 선을 행해야만 한다는 말씀인가? 율법을 행하는 것이 구원의 기초가 된다는 말씀이신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롬3:20 에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라고 말씀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율법교사에게 복음이 아닌 율법을 가르치셨을까?
만일 이 율법교사가 정직한 자였다면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지 못했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지 못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율법 연구에 심취한 자였다면, 율법의 가르침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겸손히 회개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이렇게 고백했어야 했다. “예수님, 제가 너무나도 연약하여 율법의 가장 기본적인 계명조차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자 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는 자부심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여 어떻게 하는가? 29절 말씀을 보라.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그는 스스로가 의롭지 않음을 알면서도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의롭게 보이고 싶어했다. 율법교사로서 그 체면을 지키고 싶었다. 그리고 이것이 당시 율법교사와 바리새인들을 포함하여 대부분 종교인들의 문제였다. 눅18:9 에 따르면 저들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던” 부류였다.
이 율법교사는 예수님의 질문을 듣고 마땅히 물어야 할 질문을 던지지 않고, 엉뚱한 질문을 한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그는 하나님을 마음과 몸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할 문제는 건너뛰고, 이웃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율법교사의 의도는 무엇이었는가? 누가 이웃이고, 누가 이웃이 아닌지에 대한 궤변을 내세워서 예수님을 옭아매기를 원했다. 당시 유대인들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원수는 이웃이 아니라는 것만을 확실하게 옹호한다면 예수님의 주장이 틀리고 자신의 주장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의도를 알고 계셨던 주님께서는 이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이 비유의 말씀은 가장 예리하고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비유 중 하나이다. 누구든 이 비유의 말씀을 듣는 자는 자신의 교만한 태도를 내려놓고 간절히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호소할 수 밖에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주 들어서 익숙한 이 비유의 말씀은 물론 자선과 선행을 독려하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맞다. 그러나 이러한 일차적인 의미는 세상의 비신자들도 잘 알고 있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이 비유의 말씀을 따르는 데 있어서 단순하게 불행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돕거나, 우리의 이웃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으로만 그친다면 이 비유의 말씀에 숨겨진 큰 의미를 놓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가 이 비유를 통해 깨달음을 얻어 스스로가 얼마나 부패한 죄인인지를 알기 원하셨다.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한 죄인의 본성의 부패함과 은혜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깨닫게 하시려는 취지로 말씀하신다.
비유의 시작은 위험한 길을 여행하는 여행자가 당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 길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이 길은 오늘날도 존재하는 길로 알려져 있는데,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고도의 차이가 1,200미터 정도 나고, 길이는 약 27키로미터에 달한다고 한다. 특히 이스라엘은 우리나라의 사계절과 달리 단 두 개의 계절만 있다. 긴 건기와 짧지만 엄청 강력한 우기이다. 생각해보라. 평소에는 비 한방울 안오다가 우기때 폭우가 앞이 안보일 정도로 쏟아진다. 특히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고도차이가 1,200이상 날 정도로 급경사이다. 당연히 폭우가 쏟아지면서 여러 물길들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긴 건기동안에는 비가 오지 않아서 마른 골짜기의 형태를 취하지만, 우기 때에는 이 골짜기를 통해 빠르고 강력한 물이 지나간다. 이러한 지형을 “와디" 라고 부른다.
짧지만 엄청나게 쏟아지는 폭우가 바위를 깎아 내리기 시작하여 와디 지형은 대체로 험하고 급경사의 절벽이 형성되어 있고, 동굴과 거대한 암석이 줄지어 있는 곳이라보니, 한편으로는 도적떼들에게 좋은 은신처가 되기도 하였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이러하다. 한 여행자가 이 길을 지나다가 강도를 만났다. 강도는 그의 소유를 빼앗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심하게 구타한 후 죽으라고 가만히 놔둔 채 떠나게 된다. 여행자는 치명상을 입은 채로 황량한 길에서 죽어가고 있다.
이스라엘에 절기가 있어서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왕래할 때에는 간혹 그 길에 여행자들이 지나갔다. 그러나 평범한 때, 특히 한낮의 열기가 엄청나게 뜨거운 때나, 한 겨울 심한 바람과 추위가 기승을 부릴 때에는 이 길을 지나는 여행자들은 매우 드물었다. 그 길에는 휴식처도 없으며, 쉴만한 곳도 없다. 어쩌면 이 죽어가던 여행자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마침 약간의 희망이 보이는 것 같다. 왜냐하면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이 죽어가는 여행자를 봤기 때문이다. 제사장은 어떤 사람인가? 모세 율법에 정통한 자였다. 모세 율법에 정통했다는 것은 어려운 처지에 놓인 형제를 돌봐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본문 31절 말씀을 보면, 제사장은 죽어가는 형제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의 원어의 의미를 살려서 보면, 그는 상처 입은 여행자를 보고 그를 피하여 지나가기 위해 일부러 가던 방향과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어 곤경에 처한 여행자를 외면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제사장은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동정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자는 레위인이였다. 레위인은 성전에서 일반적인 업무에 종사하던 자들이었다. 제사장을 보좌하고, 성전을 정비하며, 건물을 유지하는 일을 비롯한 각종 업무가 저들의 몫이었다. 종교적인 일에 헌신하던 자들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율법에 능통한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상당한 여행자를 보자 제사장과 동일한 태도를 취한다.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모습이 레위인도 동일하였다.
제사장과 레위인의 모습은 어떠한가? 저들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만일 저들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했다면 그분의 계명을 힘써 지켰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다. 긴급한 상황에서 사랑을 실천할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저들은 거부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제사장과 레위인의 이와 같은 행위를 지적하며 비난하다. 물론 비난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저들을 비난하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을 비난하는 것과 같다. 저들의 태도는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인간의 본성, 우리 마음 속에서 발견되는 악한 마음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제사장과 레위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역시도 곤경에 처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실로 무관심하고, 무감각하며, 무정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설령 우리가 어려운 이웃들을 잘 돌보았다고 해도, 완전함을 요구하는 율법 앞에서 아무도 이 의무를 충실하게 잘 감당했노라고 자랑할 자는 없다. 세상의 어느 누가 자기 자신을 아끼는 것처럼 우리의 이웃을, 더 나아가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그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겠는가. 완전함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계명 앞에서 자랑할 자 아무도 없다. 바로 이것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가르치고자 하셨던 예수님의 요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비유의 정점을 찍을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사마리아 인이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지나간 지 얼마 후에 사마리아인이 현장에 도착한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서로 엄청난 적대감을 품고 수세기 동안 서로를 배척하며 살았다. 본래 사마리아인은 주전722년, 앗수르가 북왕국 이스라엘 주민들을 강제로 포로로 잡아간 후 이방인들과 통혼시킨 이스라엘의 후손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 대부분이 포로로 잡혀갔지만 그곳에 남아있던 자들도 있고, 또한 되돌아온 자들이 있었다. 문제는 그곳에 사는 이스라엘의 후예들이 구약성경에 근거한 전통의 일부를 유지하였으나 이방종교를 흡수하였고, 그 결과 이스라엘의 유대교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혼합 종교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의 종교를 하나님을 거역하는 부패하고 부정한 종교로 간주하였다. 이처럼 서로를 멸시 여기고 원수와도 같이 대하던 사이였다.
그런데 이 원수와 같던 사마리아인은 어떻게 행하였는가? 앞선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등을 돌렸는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앞선 두 종교인과는 달리 피투성이가 된 여행자를 불쌍히 여겼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총 6번 사용된 단어로 모두 예수님의 기사에만 기록되어 있는 단어이다. 주께서 죄인들과 병자들을 보시며 느끼셨던 마음을 설명할 때 사용되었었다. 저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음을 보시며 민망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시던 그 마음, 그 단어가 바로 여기에 사용되고 있다.
사마리아인은 죽어가던 여행자에게로 가까이 다가간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취했던 행동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맸다. 강도들은 여행자의 값진 물건들을 모두 앗아 갔지만, 사마리아인은 상처를 소독하고 감염을 예방하기 위하여 자신이 가진 값나가는 것들과 사막에서 견디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그리고 그는 죽어가던 여행자를 자신의 짐승 위에 태운다. 사마리아인은 걸었고 상처입은 사람은 짐승에 실려 갔다. 전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불편을 감수한다.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인은 그를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봐 주었다. 부상당한 여행자를 홀로 두지 않고 그 곁에 계속해서 머물렀다. 방을 빌려 그를 누이고, 건강을 회복하도록 간호하였다. 거기다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부상당한 여행자를 돌봐달라고 청한다. 당시의 돈의 가치로 따지면, 길가 여인숙과 같은 곳 2달 동안 방을 빌릴 수 있는 액수이다. 서로 일면식도 없는데다가 원수관계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너무나도 사마리아인의 처사가 관대하다. 그의 마음은 사랑이 가득했기 때문에 길을 걷다가 우연히 절실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보는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다 해주었다. 그는 사정을 묻거나 머뭇거리지 않았다. 사마리아인은 율법 교사처럼 ‘도대체 내 이웃이 누굽니까?’ 라고 묻지 않았다.
한번 생각해보라. 우리 중 대부분은 아마도 사마리아인이 낯선 사람에게 너무 지나치게 관대하게 대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누군지도 모르고, 돌아오지도 않을 관용을 베푸는 것, 상처를 소독하고 음식을 먹이며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곁을 밤 새워 지키며, 비용을 부담하고, 몇 주 간의 방세와 식비와 약값을 미리 지불하고,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라며 넉넉한 돈을 놔두고 가는 등, 우리의 생각으로 사마리아인의 행동이 참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이 비유를 접하면서 사마리아인이 되기보다, 죽어가는 여행자 입장이 되려 하지는 않은가? “나를 극진히 보살펴 다오. 가장 훌륭한 의사를 불러다오. 내가 필요로 할 때까지 내 곁에서 나를 보살펴다오. 내 필요를 채워다오. 나를 위해 무엇이든 좋은 것을 아끼지 말아다오.” 나 스스로 먼저 사마리아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마음을 먹는다 한들 사마리아인처럼 관용을 베푸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나타내고자 하신 것은 무한한 사랑이다. 그러나 어느 인간이 이와 같은 무한한 사랑을 베풀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가르치시는 이유는 율법의 기준 자체가 인간이 행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높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셨다. 주님께서 물으신다. 36절 말씀을 보라.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만일 율법교사가 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발견했다면, 깊은 죄책감을 느끼어 자신의 무능력함을 겸손히 인정해야 한다. 율법은 언제나 그런 사랑을 베풀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희생적 사랑을 단 한 가지도 실천할 수 없으며, 또 자신이 율법의 요구를 영원히 충족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율법은 언제나 완전함을 요구한다. 신명기 말씀에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야고보서 말씀에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라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율법교사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고 하신 말씀을 듣는 순간, 곧바로 주님의 용서와 은혜를 구했어야 옳았다. 율법이 계명에 복종하는 사람에게만 영생을 허락하는 것이라면, 율법 아래에서 어느 누구도 영생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없다.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인 완전함을 요구하기 때문에 죄를 지은 자는 그 누구도 율법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 심지어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채워진 성도라고 할지라도 율법이 요구하는 사랑을 온전히 실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영생을 누리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내가 한게 아니다. 내가 이룬 것도 아니다. 오직 은혜이다.
특별히 이 비유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더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이 비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이 부상당한 여행자를 돌보시는 것처럼 죄인들을 극진히도 사랑하신다는 점이다. 사마리아인은 증오의 대상인 유대인을 돌보는 일에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바쳤다. 하지만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사마리아인이 베푼 긍휼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한하시고 놀랍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를 내주사 죄인을 위해 죽게 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완벽하게 드러내신 본보기가 되신다.
만일 율법교사가 자신의 무능함과 죄악을 고백하고, 자신은 도저히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행할 수 없노라고 인정했다면 주님께서는 그에게 영원한 긍휼과 은혜와 용서와 사랑을 부어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율법교사는 끝내 예수님의 비유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을까? 스스로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긍휼을 구했을까? 저자 누가는 즉각 예수님의 다른 사역으로 관심을 돌린다. 그 말인즉, 대중 앞에서 예수님과의 논쟁에서 패한 율법교사는 더 이상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끝까지 그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율법교사와 같이 오늘 본문의 비유를 단순하게 선행으로만 이해하는 자들은 계속해서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와 영생을 얻기에 합당한 자격이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더욱 더 선한 일에 열심을 낼 것이다. 자기 의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저들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단순하게 이웃을 향한 선행에만 국한 시키고, 나의 이웃을 향하여서만 관심과 사랑을 베풀려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물론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 속에 선행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든다면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만 그친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했던 진정한 교훈을 놓친 셈이다. 이 비유는 우리의 죄와 무능함을 고백하고, 우리를 위해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은혜와 긍휼을 구해야 함을 말해준다. 히7:25 에 “자기를 힘입어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는 말씀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생의 유일한 원천이 되신다. 율법을 기준으로 나의 무능함과 죄악됨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간절히 바라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생을 허락하실 것이다.
여러분, 아직도 나의 의와 노력, 나의 행위로 나는 구원받을만한 사람이라 생각하는가? 우리는 결코 우리의 의와 노력과 행위로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고, 율법을 통하여는 우리의 죄악만이 드러날 뿐이다. 영생과 구원에 관하여 우리의 공로는 조금도 들어있지 않으며 오직 전적인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근거한 은혜이다. 사마리아인이 죽어가던 여행자를 불쌍히 여겼던 것처럼, 주님 앞에 엎드리어 “주여 나는 온전히 율법을 이룰수 없나이다. 나의 온 능력을 동원하여도 율법의 작고 사소한 것 조차 온전히 행할 수 없나이다. 그러니 오직 주의 은혜만이 필요합니다.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주 안에서 사랑하는 양문교회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이 나의 무능함을 진실되이 고백하는 자에게 주님의 긍휼과 자비로 우리를 싸매 주실 것이다. 우리를 치유하실 것이다. 주님의 한량없는 사랑이 우리 위에 계속해서 부어질 것이다. 이렇게 주님 앞에 간절하게 엎드려져 주님의 긍휼을 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기도제목 :
1. 우리는 죄인입니다. 아무 공로 없고 아무런 의가 없는 무능한 죄인일 뿐입니다.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던 여행자와 같이 아무 소망없이 죄의 결과인 죽음만을 바라보던 죄인입니다. 주여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율법교사와 같이 나의 의를 자랑치 못하게 우리를 굴복시켜 주옵소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바라보게 하시고, 그 은혜만을 간절하게 바라는 우리 되게 하여 주옵소서.
찬송 337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