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前進)하는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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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15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신앙(信仰)한다는 것은 진공상태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은 앞으로 나아가든지, 뒤로 후퇴하든지 둘 중에 하나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두 세력 사이에서 어느 한 세력이 나에게 득세하여 나를 소유하고,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신앙의 진보를 이루든지, 아니면 죄의 지배를 받아 하나님에게 멀어지든지. 둘 중의 하나 입니다. 그래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지대란 있을 수 없고, 어떤 정지상태란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 신앙의 '대치된 두 세력'을 두고 히브리서 기자는 독자를 향해서 경고와 격려의 내용을 반복해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메시지의 패턴은 구약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서를 보면,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전해주신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들이 있습니다. "너희를 다 심판 할 것"이라는 거예요. "너희 나라를 갈기갈기 찢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메시지 뒷부분에 가면 하나님은 "내가 너희를 찢고 다시 싸맬 것"이라고 하시면서 자기 백성을 향한 위로와 격려를 함께 전하셨습니다. 왜요? 이게 바로 진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심판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다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을 향해 전심으로 나아오기를 바라시는 것이죠.
히브리서를 시작하면서 말씀드렸다시피 당시 성도들이 놓인 상황이 그렇게 녹록치 않았습니다. 어디 그 당시 뿐 일까요. 오늘날에도 참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게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수 많은 유혹과 쾌락 속에서 정결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날마다 영적전쟁를 치루는 삶입니다.
그래서 더욱 더 우리를 일깨우는 경고의 메시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경고'의 내용만 따로 떼어서 강조하게 되면 큰 혼란만 야기하고, 그렇다고 반대로 '격려' 하는 부분만 강조되면 "괜찮구나, 내가 지금 할 하고 있구나"하면서 나태함과 안일함에 빠지게 되어서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히브리서는 성도를 향해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자리로 가지 말라고 경고 하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예비되어 있는 완전한 곳이 있음을 격려합니다.
우리 함께 6장 9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9절은 히브리서의 수신인들이 타락하여 돌이킬 수 없는 자리에 이른 자들보다 나을 뿐 아니라 구원에 가깝다고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3가지 시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의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이루신 것입니다. 미래의 구원은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한 자리에 이르게 되는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구원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이것을 성화 혹은 영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구원은 과거의 구원에서 미래의 구원을 향하여 가는 성도의 "어떤 상황에서도 참고, 견디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현재의 이러한 믿음의 삶이 우리가 과거의 구원을 이미 받은 자요 미래의 구원을 또한 누릴 자임을 증명하는 증거가 됩니다.
앞에 나오는 5장12절을 보면 젖을 먹는 자와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자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젖이란 자신의 마음에 합당한 말씀만을 받는 자를 말합니다. 저장 기능과 소화기능이 아직 발달하지 못해서 유동식만을 먹습니다. 그러므로 의의 말씀이 그에게 다 소화가 되지 않습니다. 걸리기 때문입니다. 단단한 음식을 소화시킨다는 것은 지각을 사용하여 선악을 분변하는 것이라고도 했는데, 상식으로 이해되는 말씀 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지각을 사용하여 상식을 뛰어넘은 말씀조차도 성령 안에서 지혜를 힘입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무슨 말씀이든지 다 받아 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아브라함의 경우를 예로 들었습니다. 나이가 많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지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는 자신의 육체가 늙어 가는 것보다도 더욱 확실함을 믿고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참고 기다려서 아들 하나와 무덤에 딸린 밭 한 떼기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약속의 성취로 보기는 어렵잖아요?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진정한 약속의 성취는 후일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는 그것을 보고 즐거워했다고 요한복음 8장에서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지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 여전히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 머물고 있는 사람. 여기서 초보라고 하는 것은 하찮다는 의미가 아니고 기초가 되는 것이란 의미입니다. 오래 예수를 믿어도 항상 자신이 구원받은 것만으로 만족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죄에서의 해방 만을 위함이 아니라 온전한 데로 나아가게 하려 하심입니다. 이 도의 가장 기초가 되는 부분을 넘어설 수 있을 만큼 제대로 배우고 익혀서 자신의 것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온전한 데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열심히 뛰는데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늘 제자리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의 경주에 있어서도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자꾸 그리스도인들이 도의 초보에 관한 같은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저절로 미끌어지게 되는 환경에 살고 있습니다.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다시 앞으로 나아가지만 우리가 완전한 데로 나아갈 것을 힘써 추구하지 않는다면 다시 도의 초보를 반복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결코 자신이 선 자리에서 그냥 서 있음으로 자족하거나 안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인생은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해도 완전한 데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의 기초를 분명히 닦은 이들은 완전한 데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과거가 어떠하든지 현재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상관이 없이 우리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