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710 새벽]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Notes
Transcript
Sermon Tone Analysis
A
D
F
J
S
Emotion
A
C
T
Language
O
C
E
A
E
Social
찬송 211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본문 마11:20-24
사랑이 충만하신 주님, 오늘도 우리에게 하루라는 시간을 허락하시고 첫 시간에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나아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오늘 거룩한 주일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주님께 최고의 예배로, 최고의 찬송으로, 최고의 감사로 오늘 하루를 거룩히 구별하여 드리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나날들이 늘 은혜에 대한 감사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은혜를 주셨으니 늘 그 은혜를 찬송하며 살아가는 우리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권능을 가장 많이 경험하고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은 고라신과 벳새다, 그리고 가버나움에 대한 책망의 말씀이다. 이 고을들은 다른 어떤 고을보다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능력을 많이 보았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 복음의 말씀을 많이 들었던 곳이다. 하지만 이 고을들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했고, 복음에 대해서도 귀를 닫아버렸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을 스스로 막아버리고 멸망을 자초한 것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완악함을 책망하시고 심판날에 그들이 우상숭배의 도시로 유명한 두로와 시돈, 그리고 죄악의 대명사로 불리는 소돔보다도 더 큰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임을 강력하게 경고하셨다.
우리는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먼저, 첫 번째는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누구나 그 은혜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고라신과 벳새다, 그리고 가버나움은 20절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적을 많이 베풀어 주셨다는 말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고라신에서 어떤 권능을 보이셨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에 자세히 기록된 것이 없어서 추측을 할 수 밖에 없지만은, 반면 벳새다와 가버나움에서는 여러 권능을 행하셨다. 벳새다에서는 소경과 여러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또,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를 남기셨다. 가버나움에서는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셨고,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 주셨으며,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셨다. 또 귀신들린 자와 중풍병자, 각색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이처럼 이 고을들은 예수님의 각종 권능의 이적을 가장 많이 보고 듣고 경험한 지역이었다.
우리는 이적을 기적이라는 단어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고 해석하지만은, 성경기자들은 동일하게 해석하거나 기록하지 않는다. 특별히 요한복음에서는 이적이라는 단어를 자연현상을 뛰어넘는 기적으로 혼동하며 사용할 것을 우려하여 사도요한은 이적이라는 단어 대신 표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표적이란 영어로 sign이다. 이는 존재하는 뭔가가 눈에 보이는 것으로 드러난 것을 말한다. 회사나 은행업무 때 서류에 기입하는 여러분의 서명이 그러하지 않던가? 내가 그 자리에 없어도 나의 서명이 있다면 효력이 있다. 이는 보이는 싸인이 보이지 않아도 실재하는 뭔가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표적도 마찬가지다. 표적의 중요한 기능은 단지 초자연적인 현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이 놀라운 일들 가운데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아도 실재하시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권능을 비춰주고 있다.
본문에서 고라신이나 뱃새다나 가버나움에서 주님은 수많은 표적들을 보여주셨다. 그들은 표적들을 경험하면서 단지 초자연적 현상들에 놀라는 것으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능력으로 행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철저히 냉소적이었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오히려 교만하였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아임을 알 수 있도록, 그래서 많은 이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표적을 많이 보여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에 합당한 반응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표적 중에 가장 놀라운 표적이 무엇인가? 죽으시고 장사되신지 3일이나 지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고, 그 예수를 내가 믿는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큰 표적이 없다. 마12장에서 살펴보겠지만, 하늘로부터 임하는 다른 표적들을 요구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주님은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간 있다가 나온 것처럼 주님께서도 장사되셨다가 삼일만에 다시 부활하실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주님의 표적은 우리에게 은혜이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잠자는 자들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 주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승리의 부활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그러나 이처럼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누구나 은혜에 합당한 반응을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또한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해서 누구나 은혜에 합당한 반응을 하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주변을 가만히 보면,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그 은혜에 합당히 반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배은망덕이라는 말이 꼭 맞을 만큼 받은 은혜와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느 쪽의 사람인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 1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어 받지 말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날마다 크신 은혜로 여러분의 삶을 붙드시고 인도하심을 고백하시는가? 날마다 믿음을 더하여 주시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시며,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심을 확신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합당히 반응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은혜를 기억하며, 그 은혜에 감사하는 삶, 그 은혜의 초청에 답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의 사람처럼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기를 바란다. 만약 우리가 이들처럼 은혜를 헛되이 받게 된다면, 이들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두 번째 교훈은, “예수님을 거부하면 그 끝은 멸망이라는 것”이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아니하고 교만하게 행한, 즉 예수님을 거부한 고을들을 책망하시며 심판의 대상이 되었음을 말씀하신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화 있을 것이다’ 하시며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음부는 죽은 자들이 거하는 지하 세계를 의미한다. 그래서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는 말은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말인 것이다. 그들이 이러한 멸망에 놓이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수많은 표적들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데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날마다 베푸시는 은혜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감사하지 못하며, 당연하게 누려왔기 때문 아닌가? 이처럼 놀라운 은혜를 받으면서도 불구하고 눈 앞의 예수를 믿지 않고 더 크고 더 위대한 표적들을 구했기 때문 아닌가?
이처럼 예수님을 거부하면 그 끝은 멸망이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영원한 멸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요14장에서 말씀하신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께로 이를 수 있는 참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예수님을 말미암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께로 갈 수 없으며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갈 수가 없다. 우리 인생이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가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임을 깨닫고 회개하며,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멸망과 저주 밖에 남지 않는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이 자리에 모인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믿는다고 모인 자들이다. 주님을 구주로 믿는 자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부른다. 교회로서 우리가 이 시간 함께 모여 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자들은 세상과 구별된 자들이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도 짊어지고, 함께 주님의 뒤를 따르는 자들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최고의 것들, 가치관이나 돈이나 명예나 정당한 댓가나 내 꿈과 인생의 목표들을 모두 내려놓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요일2:16 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을 따른다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우리의 눈과 귀가 세상에 머물러 있다면,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우리의 마음 안에 주님 외에 다른 어떠한 주인이 있다면 이는 주님을 합당하게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마6장을 통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는가? 우리의 마음 가운데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온전한 주인이 되시고, 다른 모든 것들을 내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여러분, 이와 같이 내가 사랑하던 것들을 내다버리는 것이 주께서 나를 억압하시고, 강요하시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진실로 사랑하는 자들은 그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기꺼이 다른 것들을 포기한다. 나의 시간이나 나의 공간이나 나의 돈까지도 말이다. 주님은 여러분들을 위하여 기꺼이 자기 몸을 찢으셨고, 하나님께서도 여러분들을 위하여 자신의 지극히도 사랑하시는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셨다. 우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놀라운 사랑을 베푸신 삼위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 우리는 기꺼이 주님을 위해 모든 것들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왜입니까? 우리 주님만이 천국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생명이요 길이며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최고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날마다 측량할 수 없는 구주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최고의 사랑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잠시 잠깐 고난과 역경의 시기를 만날 수 있더라도, 주님의 사랑과 돌보심의 은혜는 멈추지 않는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은혜들을 본문의 말씀처럼 헛되이 받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본문 속의 사람들처럼 영원한 멸망만이 기다릴 뿐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들을 받아 누리면서도 그에 합당한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은혜를 거두어가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심판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베푸신 은혜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기억하며 그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나 같은 죄인까지도 사랑하신 그 은혜를 기억하며 매 순간 주님의 내 마음 속의 최고가 되어야 한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무엇과도 감히 견줄 수 없는 절대적인 분이 되어야 한다. 그 절대적인 분께서 교회에 주시는 말씀이 내 삶과 신앙의 유일한 규범이 되어야만 한다. 그 절대적인 분께서 합당한 경배와 찬송을 받으시는 예배의 자리에 사랑하는 마음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 절대적인 분께서 내 기도를 기다리고 계시기에 그분께 부르짖는 기도가 멈추지 않아야 한다. 주께서 베푸신 놀라운 사랑을 기억하며 날마다 주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말로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베푸셨는데, 이를 헛되이 받는 우리가 되지 않기를, 그 은혜에 합당히 반응하되 감사와 찬송으로, 신실한 예배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나 자신과 우리 양문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