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710 주께서 구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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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 1:18-25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내가 누구냐?는 항상 역사 속에서 해석이 돼요.
나는 반만년 역사, 단군의 자손이다.
한반도의 자손이다.
위대한 한민족이다.
항상 역사 속에서 해석이 되요.
‘나’라는 존재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나’로 존재할 수 없고, 항상 “어떤 거대한 관계” 속에서의 ‘나’로 해석이 돼요.
그 거대한 관계가 있느냐에 따라 여러분의 정체성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나라를 잃고, 민족을 잃어버리면, 자기 자신도 잃어버려요.
왜냐하면 거대한 관계 속에서 자신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그 거대한 관계가 없어요.
아버지가 없어요.
조상이 없어요.
나는 누구지?
마태복음 1장 1절에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라고 되어 있어서,
어떤 거대한 관계 속에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해요.
아, 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구나.
다윗의 자손이구나.
거대한 관계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아요.
그런데 실제로 예수님은 아버지가 없어요.
18절을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엄마 마리아가, 약혼자 요셉과 잠자리를 갖기 전에, 이미 뱃속에 예수님이 계셨어요.
아버지가 누군지 몰라요.
사생자죠.
그러니까 법적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아니에요.
거대 내러티브가 없죠.
거대한 관계 속에서의 자신이 없죠.
왜요?
아버지가 없어요.
친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라요.
이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유대인들의 놀림거리였어요.
니네들이 믿는 예수는, 아버지가 없잖아?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잖아?
이게 놀림거리였어요.
그런데 마태복음1장 1절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하죠?
족보가 있다.
계보가 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다윗의 자손이다.
약속의 아들이다.
그냥 태어나신 게 아니다.
성경의 예언대로 태어나신 아들이다.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여러분, 태어났는데 친아버지가 아니에요.
친아버지가 누군지 몰라요.
나는 누구지?
예수님의 궁금증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나는 누구지?
나는 누구의 자식이지?
이게 궁금증 아닐까요?
그런데, 예수님의 삶에는 방황의 흔적이 없어요.
내 아버지는 누구지?
나는 도대체 누구야?
라고 하면서 방황하는 흔적이 없어요.
보통 친아버지나, 친어머니를 모르면, 방황의 흔적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진짜 엄마를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게 마련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낳은 부모는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이런 근원적 그리움이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게 없습니다.
마치 자신이 성령으로 잉태되신 것처럼, 그런 근원적 그리움이 없어요.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를, 아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는 육신의 아버지에 대한 간절함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간절함으로 살아요.
이게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태어난 이유를 명확히 알았어요.
21절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죽어야 된다.
내 백성의 죄를 대신 지고 죽는다.
이게 내가 태어난 목적이다.
명확하게 알고 있었어요.
많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기 위해 나는 태어났다.
나는 거대한 사명을 위해 태어났다.
이 사명을 위해 아버지는 나를 낳으셨다.
이런 사명감이 명확했어요.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은 단 한 사람도 이유없이 태어나게 하시지 않았어요.
분명한 목적이 있어요.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우리 삶입니다.
저는 태어나기 전에 거부당한 경험이 있어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자식이었어요.
그런데 태어났습니다.
충격이었어요. 왜 날 낳으셨을까?
그런데 하나님은 저를 이유없이 태어나게 하시지 않았어요.
슬픔 가운데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게 하셨어요.
아무도 이유없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잉태때부터 순조롭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세요.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태어나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왜 친아버지를 모르면서도 방황하지 않았을까?
그를 붙잡고 있었던 강력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걸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에게 그걸 보여달라고 기도해보세요.
저에게 허락하신 뜻을 보여달라고 기도해보세요.
왜 날 낳으셨어요? 라고 기도해보세요.
왜 저를 이 땅에 보내셨냐고 기도해보세요.
그리고 아버지, 저는 그 뜻을 몰라도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뜻대로 저를 인도해주세요. 라고 기도해보세요.
이번에 진행하는 수련회가 그 계기가 되면 좋겠어요.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강력하게 붙잡았던 그 권능이 임하는 수련회가 되면 좋겠어요.
아무도 의미없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분명한 목적과 이유가 수련회를 통해 발견되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도해요.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수련회를 위해서
*임원 선출을 위해서
묵상
왕의 탄생은 비정상적이다. 그는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다.
요셉의 두 가지 선택
조용히 파혼
마리아가 돌에 맞아 죽게 하는 것
하나님의 명령은 “둘 다 사회적 낙인이 찍힌 채 평생을 살아야 하는 선택”이다.
예수님의 호칭 3가지
그리스도(메시아)
예수
임마누엘
성육신의 필연성
원죄 : 타고난 죄가 없으면 성육신이 필요하지 않다.
원죄가 없는 사람이라면, 자범죄만 짓지 않으면, 지옥에 갈 필요가 없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성육신 없이도, 모든 사람은 구원 받을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성육신은 “선재하시는 메시아가 인간성 안으로 들어오시며, 초역사적인 분이 역사의 흐름 속으로 들어오시는” 아주 놀라운 일이다.
성육신은 “종말론적 사건”이다.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이다.
그런데 이 마지막 때에 구원받을 자들이 “모든 민족”으로 확장되었다. 이는 이미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말씀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는 시작과 끝으로 이루어진다.
성육신의 의미
(1) 계시로서의 성육신 :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가장 잘 보여주시는 분이시다.
(2) 우리 수준에로 오심의 성육신 : 맞추심(accommodation) -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계시하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것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고 바른 관계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친히 우리 수준에로 내려 오셨다.
(3) 하나님의 참 형상인 진정한 사람 드러냄으로의 성육신 : 그리스도는 완전한 이상형의 인간상을 구현시키신 분이시다. 우리는 타락으로 인해 잃어버린 우리 본연의 인간다움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바라본다.
Lexham 신학 개론 예수의 성육신
성육신 교리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시간 속에서 인류의 죄를 사하고 부활의 능력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기 위해 완전한 인성을 입으신 것을 뜻한다.
Lexham 신학 개론 예수의 성육신
이사야는 메시아를 가리켜 임마누엘(사 7:14),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라고 불렀다. 이사야는 이후에 메시아의 호칭을 “전능하신 하나님” 혹은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도 불렀다(사 9:6). 이와 같이 다니엘도 “인자 같은 이”라는 표현으로 메시아를 표현했다. 이런 표현을 통해 다니엘은 왕의 보좌에 앉으신 분 혹은 경배받기에 합당하신 분으로 메시아를 묘사했다(단 7:13–14, 27).
Lexham 신학 개론 예수의 성육신
마태복음은 그리스도를 성령의 사역을 통해 성육신하신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한다(마 1:23).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전능성과 무소부재성에 대해 직접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제자들이 선교 사역을 수행할 때 재림 때까지 함께하실 수 있는 분이다(마 28:18–20).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왕, 예수 그리스도.
사역
18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게네시스(계보, 출생, 삶)은 이와 같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을 받고, 함께 모이기 전에, 자궁에서 발견되었다. 거룩한 영으로부터.
*예수님의 삶은 특별했다. 반대로 말하면 순탄하지 않았다.
19 그러나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웠다. 그래서 그를 폭로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를 몰래 풀어주고자 하였다.
*요셉은 마리아의 죄를 숨겨주고, 마리아를 조용히 풀어주려고 하였다.
20 그런데 그가 이것을 고려하고 있을 때에, 보라! 주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서 그에게 말하기를,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너는 마리아를 데려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그에게서 낳아질 자는, 거룩한 영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이다.
*타이밍이 절묘하다. 미리 이야기하지 않고, 사건이 터지고, 마리아에게도, 요셉에게도 어려운 선택의 상황이 도달하였을 때, 주의 사자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요셉의 선택과 다른 명령을 하신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요셉은 어머니 마리아를 데려와야 한다.
21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부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 백성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 여호와가 구원하신다.
*예수의 이름은 곧 그가 할 일과 연결된다. 그는 백성들의 죄들로부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실 것이다.
22 이 모든 것이 일어난 것은, 주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선지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였는가?
23 보라! 처녀의 자궁에서 잉태할 것이다. 그리고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다. 번역하면,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처녀의 자궁에서 잉태할 것
*아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24 요셉이 잠으로부터 깨어나서, 주의 사자의 명령대로 행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내를 데리고 왔다.
*꿈은 계시인가?
25 그리고 그는 그녀를 알지 않았다. 아들을 낳을 때까지. 그리고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불렀다.
*누가복음 1장에서는 주의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났다. 이때는 꿈이 아니라 실제로 나타났다. 마리아는 이때 아들의 이름이 ‘예수’라는 것을 알았다.
주석
마태는 예수님의 합법적인 가계를 요셉의 라인을 통해서 세워나가려고 시도하고 있다.
후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사생아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마태는 이것을 기적으로 표현한다.
아마도 예수님의 합법적인 가계를 요셉의 라인을 통해서 세워나가려고 시도했던 마태의 관심을 반영하는 결과일 것이다. 즉, 마리아의 아들 예수님에게 어떻게 이전에 등장하는 족보의 인물들이 연결되는지를 설명하려는 마태의 신학적 관심인 것이다.
18절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의 잉태(참조 20절)가 되어졌다고 하는 사실은 누가복음에 의해서도 강조되어있다(1:35). 구약성경, 특별히 창조와 생명을 주는 장면(창 1:2; 겔 37:1–14 등)에서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사역의 대리인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신적인 주도권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메시아 시대(사 11:2; 42:1; 61:1; 욜 2:28 등)를 여는 데 있어서 성령의 역할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사야 11:2 (NKRV)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이사야 42:1 (NKRV)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이사야 61:1 (NKRV)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19절
구약성경의 율법에서 결혼 전 부정한 행동에 대한 형벌은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이었다(신 22:13–21). 그러나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신명기 24:1에 근거해서 이혼이 법제화 되었다(참조, 5:32; 19:3이하). 의로운(다시 말해,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었던 요셉은 공적인 재판을 필연적으로 야기하게 될 부정한 행동에 대한 고발조치를 통해서 법에 따라 행동할 수 있었고 어쩌면 또한 그렇게 행동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 마리아를 드러내고(똑같은 일반적이지 않은 헬라어가 골 2:15에서 그리스도를 통치자들과 권세들 앞에서 ‘구경거리로 만들었다’라고 할 때 사용되었다[NEV, NIV])싶지 않았던 요셉은 당시 허락되었던 또 다른 방법인 두 사람의 증인 앞에서 사적인 이혼을 하기로 결심한다(미쉬나 Sotah 1:1, 5).
20절
이 꿈들 가운데 세 번은 주의 사자(참조, 2:13, 19)가 등장하는데 이 천사는 28:2에 가서 다시 등장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정교한 천사론이라든가 동시대 유대교에서 발견할 수 있는 혁신적인 계시와 같은 것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단지 구약의 영적인 세계의 흔적을 볼 수 있을 뿐이며,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 ‘주의 사자’는 종종 하나님의 가르침들을 그의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존재이다
21절
예수 : 주께서 구원하신다.
그들의 죄로부터의 구원이라는 것은 구약성경에 표현된 희망(예를 들어, 사 53장, 렘 31:31–34; 겔 36:24–31)과 후대의 메시아적 기대(솔로몬의 시 17:28–29, 41등)의 요소를 담고 있으나 아주 현저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가 다소 불쑥 튀어나온 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이 메시아를 그 당시 독자들이 기대했던 민족을 해방시켜줄 해방가로서 기대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이것은 마태복음에서 계속해서 펼쳐지는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하기 위한 배경으로 기능하게 된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유대인들의 기대감을 깨뜨리는 말이다.
공부성적으로부터의 구원을 기대했는데, 죄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전혀 반갑지 않고, 관심가지 않는 이야기가 된다.
22-23절
통상적으로 이샤(issa, ‘여인’, ‘아내’)가 사용되어야 할 이사야 7:14의 문맥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아마도 이사야는 일반적인 결혼 안에서 발생하는 아이의 탄생과 다른 출생을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 이같은 이유 때문에 칠십인역은 파르테노스(parthenos)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 같다. 따라서 이것이 필연적인 번역은 아닐지라도 충분히 가능한 번역이 되는 것이다. 두 번째 반대는 이사야 7:14은 아하스의 통치시대에 근접한 역사적 상황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지 먼 훗날 완성될 메시아 시대를 내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문맥이 근접한 역사적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은 14–17절에서 분명히 나타나있다. 그러나 종종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이 그런 것처럼 그 예언은 보다 더 넓은 맥락에서 분명해지기에 특정한 하나의 사건에 제한될 필요는 없다. 이사야 8:8에서 ‘임마누엘’의 주제가 재차 도입되고 있고 구원자로서 한 아이가 태어날게 될 것이라는 주제가 반복적인 주제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9:6–7; 11:11이하) 7:14이 이사야의 전체 안에서 발전해가는 메시아 주제를 위한 길을 예비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분명히 칠십인역의 번역자들이 특이할만한 파르테노스(parthenos)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그 단어가 일반적인 출생보다 특별한 것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어 알마(alma)의 선택으로 이 단어를 선택했다는 것과 상징적이 이름인 ‘임마누엘’이 사용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 번역자들이 옳았다고 하는 것을 시사한다.
초점은 예수님이 실제로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가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임재를 인간들에게 가져왔다라고 하는 그의 역할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가 바로 예수님의 실제 이름과 연결되어져 있는데, 인간을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분리시킨 것이 바로 죄이기 때문에 죄로부터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구원받은 느낌 : 초월자가 연결되는 느낌.
우리가 뭔가를 성취하면, “나 자신을 초월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것이 구원의 느낌이다. 그러나 일시적이다.
예수님은 초월자이신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죄를 완전히 해결하셨다. 이것이 진정하고 영원한 구원이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임마누엘)이 되셨다. 그리고 예수님의 임재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28:20에서의 확신이 이 구절과 함께 마태복음의 신학적 골격을 형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