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에게는 중보자가 필요합니다.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96 views
Notes
Transcript
우리에게는 중보자가 필요합니다 (출 20:18-21)
뭇 백성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출애굽기 20:18–20, NKRV)
오늘은 “우리에게는 중보자가 필요합니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말씀으로 주신 십계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린 후에 부인할 수 없는 ‘현상’ 즉 오늘 본문은 천둥소리, 번개 나팔로 소개하고 있는, 부인할 수 없는 ‘표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율법들이 모든 백성에게 공표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바로 ‘두려움입니다.’
“18절에, 백성은 그것을 보고 두려워 떨며, 멀찍이 물러섰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을 창조하신, 즉 우리가 보는 그 모든 것이 바로 무에서 유가 되었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존재하는 것으로 그 모든 것을 “발생, 즉 창조”하신 하나님께 이러한 표적들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러한 모든 현상들은 사실은 너무나 유한하고 연약한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는 두렵고 떨리는 일임이 분명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이라면 말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본질, 그 속성 그대로를 감당하고 받아들일만한 존재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그분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만 가능하며 받아들이게 되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구약의 하나님, 구약 성경의 하나님’만을 생각해 볼 때면, 참 하나님 그분의 존재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압도적인’분으로, ‘두렵고, 죄와 벌에 대한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우리를 파단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으로만 오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분명히 창조주 이시며, 더 나아가 그 모든 것을 다스리고 판단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성경을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절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신명기 16장 20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새번역으로, ‘당신들은 오직 정의만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만 당신들이 살고..”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시편 9장 8절은 하나님께서, “그는 정의로 세계를 다스리시며, 공정하게 만 백성을 판결하신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를 보아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아멘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저는 본문을 통해 그 정의로 모든 것을 판단하시는 두려운 그 정의의 하나님, 즉 하나님의 단면적인 모습만을 바라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19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탄식을 보면,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면, 우리는 죽습니다..” 그래서 모세, 당신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시오. 우리가 당신의 말을 듣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놀라운 하나님의 표적에 나타는 영광속에 두려움에 찬 나머지, 이와 같은 탄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에게, 중보자가 필요하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중보자’란, 그 기독교적 정확한 의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서 그 관계를 성립시키고 화해를 가져오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단순한 중보기도라는 단어에서 의미하는 그 중보의 의미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중보자란 ‘관계를 성립시키고 화해를 가져오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모세’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그 두려움에 찬 탄식 속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 함께 오늘 본문 2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당신들을 시험하시려고 나타나신 것이며, 당신들이 주님을 두려워하여 죄를 짓지 못하게 하시려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자주 나타나는 단어 이 ‘시험’이라는 단어 즉 “ TEST ”는 불완전함, 결함을 포함한 어떠한 것의 ‘본질’을 확인하려고 시험을 거치다..라는 원어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시작한 후로부터, 끊임없이, 이 테스트, 시험으로 그들의 본질을 점검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과연 하나님이라는 분이,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그 자신의 법대로 자신의 피조물들을 공의로 판단하시며 심판하시기 위해서만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입니까? 그래서 그 두렵고 떨리는 기적과 표적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압도하기 위해서 오늘 이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까?
저는..그렇지 않다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내가 끊임없이 너희의 연약함을 시험, 즉 TEST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준 그 율법을 그대로 준행할 힘이 없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모세’와 같은 중보자..를 주었다라는 것입니다.
너희에게는 ‘중보자가 필요하다.’나의 사랑과 은혜를 대신하여 전해줄 자, 나의 뜻 가운데 너희를 인도해내야 할 중보자, 모세, 그가 내가 너희에게 허락한 중보자이다.
여러분 그 하나님의 은혜로운 중보자가,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하나뿐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멘이십니까?
그러나 여러분, 우리를 위한 중보자가 있으면 즉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가 용서되었기에, 이제부터 내 뜻과 내 마음대로만 살아도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전히 당신들을 시험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때로 두려워서라도 죄를 짓지 못하게 하시려고 이렇게 임재하시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싫어하십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율법과 은혜는 이렇게 공존한다라는 것입니다. 함께 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단면적인 모습만으로 하나님을 오해하고 곡해해서는 안된다라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 즉 정의로우신 죄와 함께 하실 수 없는 하나님 이십니다. 그래서 그 율법을 온전히 지킬 힘이 없는 우리에게 중보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율법의 마침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힘으로, 그분과의 교제 속에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유일한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저 어릴적에 참 ‘거짓말’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부모님께, 말입니다. 제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있는 그대로 고백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왜, 핑계를 조금 대자면, 엄격한 부모님이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아 내가 솔직하게 고백하면 용서하지 않으실거야..무조건 매부터 맞고 고통스러울거야..”
거짓말은 끊임없는 거짓말을 낳고, 불안을 낳고, 더 큰 죄를 짓게 만들고, 더욱 숨어들어, 마치 곰팡이가 생기듯이, 독버섯처럼 제 삶을 옭아매기만 한 것입니다. 수치심, 두려움과 고통스러운 삶으로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통 스러운 삶은 바로 관계의 단절로 이어디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됨으로, 내 가족과 이웃과의 삶 역시 단절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청소년부 담당을 하면서, 교사분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주로 아이들과 어떤 이야기들을 하느냐..라고 말입니다.
사실은 예배 마치고 카페 같은 곳에 가서 이런 저런 한담(뭐 한주 어떻게 지냈어? 뭐 연예인 이야 기등)을 하다 집에 보내는 실정이라 하더랍니다.
그래서 제가 마침 가정교회 컨퍼런스도 다녀오고, 정말 건강한 교회의 목장 모임을 탐방하고 여러가지로 고민하던 중이라, '자! 이제 우리 청소년도 목장모임 흉내라도 내봅시다..'라고 교사분들께 말씀을 드리고
목장 모임의 폼을 가지고 모임다운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한달조금 넘었는데요..
우선 같이 교회에서 함께 밥을 먹구요, 그 다음 밖으로 나가지 않고, 교회 안에서, 둘러 앉아 모임을 시작합니다. 교사가 아닌 아이들의 대표기도로 문을 엽니다.
그 모임 시작으로써 매주 그날 설교 본문을 가지고 두 단어를 뽑아 2행시 짓기 아이스브레이크를 합니다. 어색함을 깨기 위함이죠, 그럼에도 사실 저는
그 2행시 게임을 통해 아이들이 그날 들은 설교말씀을 한번쯤은 더 기억해주길 하는 바람으로 만든 거였습니다.
한번은 아이들의 성경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즉 정체성에 관한 설교를 하고, 그날 이행시를 '자신'이라 정해주었는데,
한번 들어보십시오, 한 아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에요. 자: 자유로드롭을 타면, 신:신을 만날 수 있다..헐..설교와 전혀 상관이 없는, 아주..쌩뚱맞은..
또 한 아이는 자:자신을 믿으면, 신:신외에는 두려울 것이 없다..세상에, 중학생이, 이런 철학적 언어를 쓸줄이야..
저는 사실 바로 올라와서 예배준비를 하느라, 아이들과 함께 모임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일요일 모임은 교사들에게 맡겨두는 상황이라,
제가 그래서 매주 모임 후기, 피드백을 문서로 요청을 드려서 받습니다.
아무튼 이 애둘이 그날 1,2등을 차지했습니다. 항상 재밌는게 뽑히거든요, 근데요, 설교와 전혀 상관이 없는 이 아이들의 생각이요, 참 귀엽고..사랑스럽고,
재밌게 참여해주는 것이 감사하더랍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들을 통해 아이들의 기질이나 성격을 알아갈 수 있는 것이라, 더욱이 감사한 것 같습니다.
너무 고마워서 저번주에 2행시 게임 한달 모아서 또 전반기 출석율 합산해서, 아주 거하게 선물줬습니다. 일등이 4만원 상당입니다. (제 사비 털어서 말입니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바로 이제 진지한 나눔을 위해 그날 설교를 토대로 질문을 정해줍니다. 한번은 두려움과 슬픔에 관한 주제로 설교했는데,
'자신이 지금껏 지내오면서 혹시 과거에 슬펐던 일이 있다면 한가지만 나누어줄래요?' 괄호열고 너무 무겁거나 진지하지 않기.라고 적어주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진지한걸 못견뎌해서..하..
그런데 한 아이가 이렇게 고백을 하는 것이에요, "자신이 어렸을 때, 부모님이 심하게 다투는 것이 너무 슬펐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모임 피드백 문서를 보고 알게 된 사실인 것입니다.
그 아이의 고백도 저의 마음을 울렸지만, 더 나아가 그 모임을 주도한 교사의 고백이 한번 제 마음을 울리는 것입니다.
그동안 오랫동안 보아온 친구인데, 대략적 형편은 알고 있었지만, 아이에게 직접 그 고백을 들으니까..자신의 마음이 너무 아프더랍니다..
그리고 그동안 아이를 위해 많이 기도해주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며, 이 아이를 위해 더욱더 기도하겠노라..다짐했답니다..
여러분, 한 아이의 솔직한 고백속에, 교사가 변하구요, 더욱이 그 교사의 고백을 들은 제가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함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정교회, 목장의 힘이라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의 모습이 이러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야고보서 5:16절에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의인이 간절히 비는 기도가 큰 효력을 낸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면 때로 이 문제투성인 삶, 병든 삶을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치유와 회복, 그리고 감사와 순종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바로 ‘정직함’을 회복함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정직함, 말입니다. 더 나아가 회개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이 ‘정직함’을 회복할 수 있는가..
바로 내가 ‘안전함..’을 느낄 때입니다. 내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에 대한 안전함, 사랑과 인정, 끝없는 ‘용납, 받아들여짐..’속에 우리는 그 모든 거짓됨, 불의, 죄 가운데서 회복할 용기와 힘을 얻는 것입니다.
안전한 품,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이해하시고 용서하시길 원하시는 참 하나님의 본성을 이해할 때, 그 본성이 투영된 분,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끝없는 은혜, 용납하심, 죄인을 위해서 오신 그분의 사역을 기억 할 때, 우리가 안전함..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여려분, 오직 예수님의 힘, 주님의 힘으로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힘을 얻는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는 참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에게는 중보자가 필요하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서 그 관계를 성립시키고 화해를 가져오는 역할을 하는 사람
바로 그 중보자의 힘을 빌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의로운, 즉 공의에 찬 두려운 하나님, 그리고 “그 율법의 단면적인 모습”만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오늘 본문 그대로 ‘두려움에 질식당해, 죽을 것입니다..’ 그 두려움에 압도당한채, 영적 침체에 빠질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우리의 영원한 중보자가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길 원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한번 바라 보십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바로 우리가 그 주님을 닮아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또 한사람의 중보자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19절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주님 두렵습니다. 그래서..“당신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시오..” 우리가 듣겠습니다..아멘.
우리는 진지하고도, 단호하게..“예수님 내게 말씀해주십시오..제가 듣겠습니다..”
나의 피난처 되시는 예수님, 내가 당신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주님 이 새벽에 다시 한번 주님의 음성을 제게 들려주십시오. 제가 듣겠습니다. 제가 순종하겠습니다. 그 사랑의 음성이면 충분합니다. 주님..제게 말씀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나타난, 그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 다시 한번 되새기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한 중보자가 되시기전, 그분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어떤 대가를 지불하셨는지..그분이 받으신 그 형벌은 곧 우리의 형벌이었고, 그분의 죽음은 곧 우리를 대신한 죽음이었음을 다시 한번 깨닫고,
우리의 안전함, 우리 평안의 근원, 유일한 이유가 되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들으며..
담대히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 단면적인 하나님, 그 공의의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가 얼마나 때로 낙담이 되고, 두려움에 떠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모습을 오해하지 않도록,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께 담대히 나갈 수 있는 은혜를 이 시간 허락해주십시오.
그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제 삶을 지배할 수 있도록 먼저는 그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이 시간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오늘 하루도 그 피난처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 그 힘을 빌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