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This automated analysis scores the text on the likely presence of emotional, language, and social tones. There are no right or wrong scores; this is just an indication of tones readers or listeners may pick up from the text.
A score of 0.5 or higher indicates the tone is likely present.
Emotion Ton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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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g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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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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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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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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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guage Tone
Analyt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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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f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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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nt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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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l Tone
Open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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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cientious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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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ra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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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reeable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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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al 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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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Anger
Disgust
Fear
Joy
Sadness
Language
Analytical
Confident
Tentative
Social Tendencies
Openness
Conscientiousness
Extraversion
Agreeableness
Emotional Rang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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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야고보서는 말씀을 듣는 것을 넘어 그 말씀을 실천하라는 윤리적인 명령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믿음은 반드시 행동을 동반하게 되어 있다고 말하며 행동과 삶이 따라오지 않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힘주어 말하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가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행함의 열매가 거의 대부분 관계에 대한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성내지 말아라, 차별하지 말아라, 비방하지 말아라, 연약한 자를 보호하라는 등
우리 믿음의 열매를 우리가 날마다 마주하는 수 많은 관계들과 연결짓고 있습니다.
사실 야고보서 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의 많은 서신서들이 관계의 문제를 다루며, 그들이 온전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에 대해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왜 이렇게 관계에 주목하고 있는 것일까요?
관계를 대할 때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세가지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께서는 관계를 소중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관계적이신 분이십니다.
먼저, 하나님 자신이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이 하나이신 삼위일체이십니다.
하나님은 한분이시지만, 분명 이 세 위격이신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님 간에는 구분이 있으며 이 세분은 서로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맺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그러므로 또한,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서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유일하게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창세기 1장에서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만들어집니다.
이 사람 간에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과 같은 성격의 인격적인 교제가 가능합니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뿐 아니라 서로 서로 관계를 맺는 존재로 만들어졌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실로 관계 안에 속해있으며,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 또한 인간이 자기 스스로 온전하게 되는 존재가 아닌,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이 만드신 땅에서 다양한 관계를 맺고 사는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에게 있는 다양한 관계에 대해서 4가지로 정리했습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
나와 나 자신의 관계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
나와 세상과의 관계
우리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의도하신 이 모든 관계를 소중히 여기며, 올바로 섬길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이 모든 관계를 올바로 할 수 있는 힘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 우리의 친밀한 사랑이 모든 관계를 바로 볼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로 인해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나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닌 내가 되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탐심이 이 모든 관계를 어그러뜨리고 망가뜨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지, 하나님의 본래 의도대로 이 모든 관계들을 회복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며 십자가에서 그 값을 다 치르게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우리를 살리기 위해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주셨고,
아들 예수님은 아버지를 사랑하며, 우리를 사랑하기에 아버지의 그 뜻에 기꺼이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뜻을 전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졌던 온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던 온 선지자의 강령이
바로 하나님을 온 존재로 사랑하는 것이며, 내 자신과 내 이웃을 또한,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사람을 통하여 그릇된 관계들을 다 회복하려는 것입니다.
먼저, 내가 나 스스로를 하나님의 눈으로 보며, 소중히 여기고,
나를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똑같이 소중히 여기며, 그들을 섬기고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따라,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더 드러내는 세상과의 관계 회복하려고 하십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서는 관계를 소중히 여기십니다.
온 땅을 창조하신 창조주께서 이렇게나 관계를 소중히 여기신다면, 우리도 마땅히 관계를 소중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바로 이 모든 관계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하는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깨진 관계가 회복되기를 기뻐하며, 회복된 관계가 더 깊어지기를 바라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공동체가 마땅히 모든 관계의 회복을 바라고 갈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 회복된 공동체가 관계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관계를 깨뜨리는 일들을 행한다면, 그것은 실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신분과 정체성을 잃는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 신약성경의 서신서들 중에 많은 경우 이 관계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나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관계의 문제를 다루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우리가 오늘 살펴보고 있는 야고보서 또한, 교회 안팎의 관계 문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이 관계를 지켜나가야 하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2.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관계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야고보서는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쭉 다루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갈등을 잘 해결하는 것이 관계를 지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관계를 지킨다는 말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한 영혼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 소중한 마음으로 한 영혼의 필요를 채우는 것을 강조하며 특별히 화를 내는 것과 다투는 것에 대해서 단호히 경고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성내는 것이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하나님 중심에서 온 것이 아니라 나를 최고로 여기는 자기 중심적인 마음에서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성급한 말과 불의한 분노를 피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경청의 자세가 부족하고, 말에 자제력이 부족하면, 화를 잘 내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관계를 하다보면 화가 나는 감정이 올라올 수 있습니다.
그 감정 자체가 잘못됐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불의한 일을 보고 화가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화를 어떻게 해결하는 가에 따라 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화가 올라올 때, 잘 해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지금 화가 왜 나는가? 그 원인을 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여기서 말하는 화는 자기 중심성에서 나오는 이기적인 분노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분노의 기저에는 하나님을 향한 불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의 결핍에서 옵니다.
그저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고, 자신의 기대와 생각과 기준에서 벗어날 때, 불같이 화가 나는 것입니다.
이런 자기 중심성에서 나오는 분노는 절대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기저에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지혜를 신뢰하며, 내 생각을 낮추는 겸손함이 없이, 내가 더 옳다는 생각과 판단들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대우 받고자 하는 생각, 내가 손해보면 안 된다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분노가 표출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선악과를 따먹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분노의 표출의 크고 작음을 떠나
우리가 분노가 일어나는 그 순간,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순식간에 하나님을 망각해버립니다.
하나님을 망각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망각합니다.
그리고 악에게 자신을 내어줍니다.
또 그 분노가 내 혀를 통해 상대방에게 발산이 되는 것이 또한 문제입니다.
야고보서는 특히나 우리의 혀, 곧 말에 대해서 조심하고 또 조심할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특별히 혀를 불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왜 불로 표현했을까요?
최근 우리나라에서 큰 산불이 나서 많은 분들이 피해를 입고 어려움을 입었던 사건을 기억하시나요?
크나큰 산불을 진압하는데만 해도 어마어마한 물이 부어졌고, 수많은 인력이 투입되었습니다.
간신히 불을 잡긴 했지만, 산불이 준 피해는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산불은 어마어마한 피해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이 어마어마한 산불의 시작은 조심하지 않고 버렸던 아주 작은 담배꽁초 하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혀를 불로 표현한 이유는 마치 작은 불이 큰 화재의 첫 시작이 되듯, 우리의 작게 시작된 부정적인 말과 저주의 말들과 비방하는 말과 성내는 말들이 자신과 공동체에 정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하나님께서는 함부로 판단하는 말을 한다거나, 누구를 비방하는 말을 하는 것, 또 누구를 저주하는 말을 하는 것들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야고보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한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 똑같은 입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사람을 자신의 알량한 기준과 편협한 생각으로 비방하는 것을 즐겨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올바로 서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을 저주하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 하나님의 마음을 압니다.
그렇기에 자기 중심적인 마음에서 시작되는 나의 이기적인 탐심으로 다른 사람을 비방하지 않습니다.
내 생각을 내리지 못하고 고수하면서 관계가 깨지든, 말든 상관없이 퍼붓는 말 속에는 아무런 사랑이 없습니다.
이것은 그 당사자가 없이 뒤에서 하는 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이기적인 분노가 우리의 혀를 통해 밖으로 표출되기 시작할 때부터 미움과 다툼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툼에는 아무런 선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우리 속을 분탕질 하는 사탄의 모든 거짓과 속임과 악을 내버리고,
우리를 창조하셨으며, 구원하셨으며,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진리의 터 위에 서서 그 말씀을 적극적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어떤 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것 잘해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말도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해 기꺼이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관계를 소중히 여기시기에 우리의 혀에 재갈을 물리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에 합한 이러한 말과 행동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믿음으로부터 나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지 안간힘을 써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함과 사랑의 충만함 속에서 기꺼이 그렇게 하고자 하는 열망이 샘솟습니다.
또한, 우리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철저히 인식하고, 주님께 애통한 마음으로 도움을 구하는 것을 통해서 주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합니다.
그렇기에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분노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중요한 지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분노를 주님께로 가져갈 때, 관계가 깨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다시 돌아보고,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로 조정하는, 오히려 더욱 긴밀한 관계로 가는 선순환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진정한 관계가 가능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다툼이 우리 안에 있는 정욕 즉, 자기 중심으로부터 온다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지 않을 때, 다툼이 옵니다.
그렇기에 내가 분이 날 때, 그 분노를 바로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입을 꾹 닫고, 이 분노를 주님께로 가져가는 것이 현명한 자세입니다.
주님께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묻는 것이죠.
주님 제가 정말 화가 납니다.
왜 이렇게 화가 날까요? 저의 잘못된 중심이 무엇입니까?
제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께 엎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주님께 나아오는 자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시고,
하나님 한 분만으로 완전히 만족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의 뜻대로 관계를 하기 원하는,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끝없이 부어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를 통해 그 관계를 타고 사람들에게 흘러가게 하십니다.
분노를 내서 깨질뻔 한 관계가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관계를 소중히 생각하시며,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는지 더 알게 됩니다.
아내와의 예
분노가 나는 대상과의 관계를 주님께로 가져갈 때, 주님께서 놀랍게 관계를 회복하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 부어지는 위로부터 난 지혜를 이렇게 얘기합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들의 특징은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지키고 품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혜는 성내는 것과 반대로 의의 열매를 거둡니다.
사실 성내는 것 뿐 아니라 누구를 비방하는 것, 차별하는 것, 시기하는 것 등 관계를 깨뜨리는 모든 것들에 대한 원리가 동일합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의 동기가 하나님 중심인가 아니면 자기 중심인가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기를 기뻐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 있는 자에게는 이 말씀이 부담이 아니라, 우리가 당연히 기쁨으로 순종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알고 믿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삶의 기준인 것을 압니다.
그렇기에 그 말씀을 실천합니다.
실천할 당시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것이 죄된 행동에서 벗어난 모든 회복의 시작이며, 우리의 행함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 참된 복이 흘러가게 되는 시작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관계를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관계를 사랑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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