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710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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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의 결과
욕심의 결과
중등부 친구들! 다들 잘 지냈나요? 오늘도 함께 예배당에서 만나 너무나도 반갑습니다.
오늘로써 7월 둘째주를 우리가 맞이하게 되었죠? 이제 다들 시험도 보고 슬슬 방학을 맞이할 때가 온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지난주에도 보니까 날씨가 너무 더워졌더라구요. 원래 또 방학을 하는 이유중에 하나가 너무 더운 날에 우리 친구들이 공부를 하기에 힘이 드니까 잠깐 쉬면서 더위를 피하고 그래서 더욱 이후에 공부에 매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도 있잖아요?
그러니 다들 같은 마음이겠지만, 빨리 방학을 맞이해서 쉬기도 하고, 가족들과 여행도 가고, 그리고 이번달 말에 있을 수련회도 함께했으면 너무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전도사님은 지난주에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다녀왔어요. 누나가 살고 있는 전주로 가서 조카도 만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오고 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공부할때는 그렇게 안가던 시간이 왜 이렇게 빠른지 모르겠더라구요. 그래서 정말 한주가 순식간에 가서 잠깐 즐겼는데 벌써 여행이 끝나버렸습니다.
아마 우리 친구들도 이런 경험을 많이 해봤을거에요. 그러면 드는 생각들이 있죠. ‘아 좀더 여행이 길었으면 좋겠다.’ 혹은 ‘좀더 방학이 길었으면 좋겠다.’
전도사님도 똑같은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그런데 친구들, 만약 그 생각을 그대로 옮기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전도사님이 여행갔다가 돌아오지 않고 몇주간 더 있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오늘 친구들과 함께 만나지도 못하고, 친구들이 말씀을 들을 수가 없게 되겠죠?
또 친구들이 방학을 더 길게 보내고 싶어서 학교를 한주 더 안가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학교를 결석하고 큰일이 나게 되겠죠.
이렇듯 우리에게 허용된 방학과 같은 좋은 것들을 우리에게 허용된 것보다 더 얻고싶어 하는 마음들, 우리는 이걸 뭐라고 할까요? 바로 욕심이라고 하죠.
우리가 방금 예를 들었던 것 말고도, 먹을 것에 대한 욕심, 더 자고 싶은 욕심 등등 우리 친구들을 유혹하는 욕심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욕심들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욕심을 조절하고 그러한 마음에서 벗어나야 하겠죠. 아마 이것에 대해서는 모든 친구들이 잘 알고 있을거에요.
하지만 친구들, 동시에 이런 이야기도 들어보았을거에요. ‘Boys, Be ambitious!’ 무슨 뜻이죠?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야망이 뭐에요? 사전을 보면 ‘크게 무엇을 이루어보겠다는 희망’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좋게 적혀있기는 하지만, 사실 엄밀히 말하면 이것 역시도 욕심의 한 일종이라고 할 수 있어요. 내가 가진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큰 것을 이루어보겠다는 마음이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친구들의 머릿속이 복잡해질거에요. 욕심은 나쁜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또 욕심을 가지라고 하기도 하고. 대체 어디에 맞춰야 할까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오늘 말씀을 우리가 함께 보아야 할 것 같아요.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욕심에 관한 것이거든요.
그래서 함께 말씀을 보면서 욕심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첫 구절에 뭐라고 말씀이 등장하죠? 바람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와서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이스라엘 진영으로 떨어뜨리셨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단 먼저 우리가 보아야할 것은 메추라기라는 동물입니다. 우리 친구들이 들어보았는지 모르겠는데, 아마 이 사진을 보면 알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사진 한번 보여주시죠.
네 요게 바로 메추라기라는 새인데요, 아마 우리 친구들이 이 새는 몰라도, 옆에 알은 잘 알 것 같아요. 바로 메추리알이죠. 우리가 자주 먹는 메추리알을 생각하면 어때요? 작죠? 그런 것처럼 메추라기는 보통 새보다는 작은 몸집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새를 구워먹게 된다면 보통 그 고기가 손바닥 안에 들어올 정도로 크기가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큰 고기는 아니라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메추라기를 한마리가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메추라기들을 몰고 오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영 사방에 메추라기가 두 규빗 길이로 쌓였다고 말씀은 말하고 있어요.
여기서 그럼 두 규빗은 어느 정도냐, 바로 우리의 팔뚝길이가 한 규빗이라고 합니다. 성인 남자의 팔뚝이니까 전도사님정도 팔뚝길이를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그런데 한 규빗도 아니고 두 규빗정도 내렸다고 하면 어떻겠어요? 엄청 많은 메추라기 고기들이 생겨났다고 생각할 수 있겠죠.
그렇다면 이런 일들이 왜 생기게 되었을까요? 그건 우리가 앞의 이야기를 보아야 할 것 같아요.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홍해를 건너서 가나안을 향해 광야길을 걷고 있었어요. 그런데 너무 배가 고픈거에요. 우리가 지난주에 보았듯이 광야는 아무것도 없이 덥고 춥기만 한 곳이었기 때문에 다른 어떤 식량들을 찾기가 힘들었죠.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에게 만나라는 것을 주십니다. 만나를 주시면서 배고픔을 달래도록 하신 것이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처음에는 감사했던 만나가 질리기 시작한거에요. 솔직히 말해서 매일 똑같은 음식만 먹으면 어때요? 질리게 되잖아요.
그래서 백성들이 또 원망을 하기 시작한거에요. 애굽에 있을 때에는 고기도 먹고 여러가지 것들을 먹었는데, 여기 오니까 만나밖에 없어. 우리에게 고기를 줘!
물론 만나만 먹으면 힘들 수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다시 또 고기를 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 백성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냐면요, 민수기 11장 18절에서 20절을 읽어줄게요.
또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몸을 거룩히 하여 내일 고기 먹기를 기다리라 너희가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좋았다 하는 말이 여호와께 들렸으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실 것이라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스무 날만 먹을 뿐 아니라
냄새도 싫어하기까지 한 달 동안 먹게 하시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중에 계시는 여호와를 멸시하고 그 앞에서 울며 이르기를 우리가 어찌하여 애굽에서 나왔던가 함이라 하라
그래서 오늘 말씀에 나왔던 것처럼 하나님은 엄청난 양의 메추라기를 백성들에게 내려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32절에 보면 사건이 생깁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추라기를 너무 많이 모으기 시작했던거에요. 두규빗이나 메추라기가 쌓였으니까 엄청나게 담기 시작한 것이죠.
그래서 저녁 밤부터 그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 메추라기를 쓸어담기 시작하는데, 어느정도였냐면 적게 모은 사람도 열 호멜을 모았다고 말씀은 말하고 있어요. 여기서 나오는 호멜은 약 200리터 정도 된다고 합니다. 200리터가 어느정도냐면요, 사진 보여주시죠.
여기 나온 드럼통이 바로 200리터입니다. 그러니까 이 드럼통 10개만큼을 메추라기를 쌓았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적게 모은 사람이었다고 하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엄청나게 메추라기를 쓸어담았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진영 사면에 펴 두었다고 나와있습니다. 즉 그 고기들을 햇빛에 말려서 보관하려 했었다는 것입니다.
자 우리 친구들이 이 말씀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나시나요? 와 너무 많이 모은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친구들은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혜로운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사실 광야와 같은 곳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한번 많이 들어왔을 때 최대한 많이 쟁여놓는 것이 본인에게 유리한 것이라고 다들 생각할 거에요. 그렇기에 합리적으로만 생각한다면 그 백성들이 지혜로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33절에 보시면 그 고기가 이 사이에 씹히기도 전에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큰 재앙으로 치셨다고 말씀은 말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 백성들이 고기를 맛보기도 전에 바로 하나님이 내리신 재앙으로 목숨을 잃게되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 백성들이 죽게된 것은 무슨 이유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은 아까 보았던 말씀의 뒷부분을 보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16장 16절에서 18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죠? 한 사람에 한 오멜씩만을, 먹을 만큼만 거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오멜은 1에서 2리터 정도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보통 먹는 패트병이나 우유곽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거에요.
그정도면 어떻겠어요? 각자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 한끼로 먹고 충분할 정도의 양일거에요. 그렇다면 그 의미는 무엇이겠어요? 딱 그날 먹을 것만 먹고 절대로 남기거나 저장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백성들은 어떻게 했어요? 그 말씀을 어기고 100배를 더 넘는 무시무시한 양을 축적하고 저장하려고 했죠.
게다가 하나님이 이렇게 많은 메추라기를 주셨던 이유가 뭐였어요? 백성들이 자꾸 하나님께 반항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벌로서 행하셨던 것이었어요.
그런데 반성하는 모습은 커녕 오히려 더 욕심만 부리기 시작했죠.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마 이런 생각이 들거에요. ‘물론 그 백성들이야 과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미래를 대비하고자 했던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미래를 대비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말씀으로 보았듯이,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서 애굽의 곡식을 저장해 흉년의 때에 그것을 견디도록 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이 말씀에서는 이렇게 행동하신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보다도 그 자신의 욕심이 더욱 컸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인류가 생산물을 저장하기 시작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바로 자신들의 미래가 불안정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곡식이 많더라도 갑자기 다음날 곡식이 없어질 수도 있고, 가축들이 많더라도 갑자기 다음날 다 죽어버릴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있기 때문이었던 것이죠.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는 어떠했을까요? 불안감을 느껴야 했을까요? 그렇지 않죠. 왜냐하면 그들에게 양식을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노력하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은 절대로 하나님께서 스스로 멈추시기 전에는 사라질 수가 없었죠.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백성들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루 필요한 것만을 얻어도 그 다음날에 또 동일하게 필요한 양식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기만 했다면 굳이 많은 메추라기를 말리고 하는 수고를 하면서까지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백성들이 그렇게 행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바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부족하고, 반대로 그들 마음속에 있는 욕심이 자라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했던 것이죠.
결국 그러한 욕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불순종으로 나타났고, 불순종은 결국 그들을 죽음으로 이끌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은 마치 광야를 걷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불확실함으로 가득합니다. 우리 앞에 어떤 일이 닥칠지 전혀 알 수 없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가진 능력으로 욕심을 발휘해서 많은 것을 얻어놓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지혜로운 행동이라고 생각하며 말합니다.
남들이 힘들어하고 할 때 오히려 우리가 더 많은 것을 차지해야 하고, 남들이 지쳐 쓰러져 있을 때 더 먼저 앞서나가는 것이 불확실한 미래를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지혜라고 말하는 것이죠.
하지만 그건 진리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 역시도 광야의 길을 걸어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만나와 같은 양식을 내려주시며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삶을 살아가는 가장 지혜로운 길이란 욕심을 부려 남보다 많이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길입니다.
욕심을 부리며 남을 밀어내고, 남을 밟고 일어나 가장 높은 곳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일의 우리를 채워주실 것을 믿으며, 우리 주변의 어려운 이들과도 함께 나누며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할게요. 오늘 우리가 메추라기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전도사님이 욕심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욕심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기본적으로 욕심이 있어야 남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욕심이 나쁘냐고 물어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답을 하자면 꼭 그런 것은 아닐 겁니다. 더 말씀에 적합한 삶을 살기위한 욕심, 더 많은 친구들을 전도하고자 하는 욕심들도 있을 수 있죠.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욕심의 목적에 있을 것 같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불안한 미래 속에서 남들보다 앞서고자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면 그러한 욕심들은 모두 내려놓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전도라고 할지라도 말이죠.
사실 아무리 좋은 욕심이라도 웬만하면 조절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좋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이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우리에게 일용한 것만을 가져갈 그 노력만 행하면 됩니다. 그 이외의 것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채워주십니다.
우리 모든 중등부 친구들도, 우리의 모든 앞길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욕심을 부리며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것에 감사하며 만족할 수 있는 우리 모든 친구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함께 찬양하도록 할게요. 함께할 찬양은 온전케되리 라는 찬양입니다. 광야와 같은 삶 속에서 우리를 채워주시는 주님을 의지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함께 찬양하며 나아가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주님의 모습을 함께 바라보았습니다. 주님. 세상은 욕심을 가지며 남들보다 앞서는 것이 마치 좋은 것이고 지혜인 것처럼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주님이 함께하심을 고백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것을 믿고 의지하며 우리에게 있는 잘못된 욕심을 모두 내려놓고 오로지 주님이 주신 말씀 안에서, 주님이 주신 일용한 것들에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언제나 함께하시며 인도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