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를 아는 자 - 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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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 2. 죄 용서 3. 용서를 아는 자 - 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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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사도신경 11번째 시간입니다. 여러분 이제 사도신경이 끝이 보여요. 사도신경이라는 큰 산을 등반하느라 정말 고생 많았어요.
오늘은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에 대해 함께 나누려고 해요.
어쩌면 오늘 말씀 나눔은 여러분의 마음을 어렵게 만드는 시간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듣기 싫은 내용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일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죄"에 대해 다루는 시간이기 때문이에요. 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달갑지 않고 또 마음이 어려워진다면, 그것은 좋은 시그널이에요. 여러분 마음 속에 계시는 성령님의 일하심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이 고백을 통해 죄가 무엇인지, 이 고백은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그리고 죄를 용서 받고 받지 못하고에 따라 어떤 결과가 있는지에 대해 함께 살펴볼거에요.
이 고백을 통해 ‘나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고, 그런 나를 위해 일하고 계셨던 성령님께 감사합니다.’ 말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해요.

인류 최초의 죄

성경에서 나오는 인류 최초의 죄는 무엇일까요? 맞아요. 여러분이 눈으로 대답해주고 있는 것처럼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것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사탄의 말을 들음으로 발생한 사건. 그것이 인류 최초의 죄에요. 그런데 성경은 이들의 이러한 행동이 ‘죄'라고 기록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죄'라는 표현은 그들의 아들인 가인과 아벨의 기록이 있는 창세기 4장에서 처음 등장해요.
‘죄'는 표적을 빗 맞히다. 길을 잃다. 라는 뜻이에요.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질은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 길을 잃어버리는 것을 말해요. 우리가 순간 순간 죄를 짓는 이유도 나를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지 않고, 그 것이 나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시대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에게 “쉐마!” “들으라!!”라고 계속해서 외쳐 오셨어요. 하지만 그 때도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듣지 않고 나만의 생각 속에 살아가고 있어요. 그렇게 우리는 나만의 생각으로 길을 찾고 헤매고 있어요.
나만의 생각에 집중하게 만드는 이 죄는 원죄와 자범죄 두 가지로 나뉘어요.
원죄는 인류가 지은 첫번째 죄를 의미해요. 아담과 하와의 그 행동은 그들에게만 영향을 미치지 않았어요.
그들만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길을 잃어버린 그 순간부터 죄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어요.
나비효과죠. 그들의 입장에선 한번 실수 한거였어요.
그런데 그 영향이 어마어마하게 모든 인류에게 미치고 있어요.
원죄는 모든 죄와 또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계를 오염시키는 부패를 양산해 내고 있어요. 하나님이 만드신 이 아름다운 세상을 오염시키는 주범이 바로 원죄. 죄의 뿌리에요.
자범죄는 원죄로 인해 인간 내면에 만들어진 오염되고 썩어버린 부패한 본성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모든 죄를 말해요.
틀어 막을 수 없어요. 나도 모르게 계속해서 이 죄는 흘러 나와요. 어쩌면 나라는 사람 자체가 활동하고 걸어다니는 모든 것들이 죄를 뿌리는 행위일지 몰라요.
원죄와 자범죄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죄를 뿌리고, 그 죄를 통해 세상을 오염시키는 사람이 되고 말아요.
삶 자체만으로도 세상을 오염시키고 죄로 물들게 하는 것이 우리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이 죄들을 해결할 수 없잖아요. 그렇다고 계속해서 죄를 뿌리고 살 수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를 위해 성령님께서 그 안에서 일하기 시작하셨어요.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라는 이 고백은요.
단순히 내 죄를 용서해주세요! 가 아니에요. 죄 용서를 바라는 고백과 함께 용서 해주셨음을 감사하는 믿음의 고백이에요. 온통 죄덩어리인 우리가 어떻게 용서를 받을 수 있었겠어요.
여러분 안에서 끊임없이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시는 바로 그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이에요.

죄를 용서 해 달라는 고백

사랑하는 여러분.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는요. 해야 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어요. 이 두 가지가 없으면 우리가 하는 회개와 죄 용서를 구하는 모든 행위는 종교적 행위밖에 되지 않아요.
첫번째, 죄의 심각성을 아는거에요.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제대로 인식하는거에요.
만약 죄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요. 아주 큰 문제가 생겨요. 이 죄가 별거 아니라 생각하는거에요. 계속해서 나의 죄를 축소하려 해요.
“모두가 이 정도 죄는 짓고 사는 것 아닌가? 왜 유별나게 그러지? 그냥 살아도 괜찮잖아.”라는 생각을 하면서 결국 죄 용서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어요.
왜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냐면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문화의 영향 때문이에요.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 살아가려면요. 법을 잘 이용해서 죄를 지으면 되거든요.
세상을 잘 살아가려면 내가 지은 죄를 들키지만 않으면 되잖아요.
때로는 묵비권을 행사하면서 아무 말도 안하고 잡아 때고 버티기도 하면서, 변호사를 선임해서 죄를 축소하면 되거든요.
죄를 지었어도 들키지만 않으면, 그리고 그 것이 나의 성공을 이끌어준다면 세상은 괜찮다고 우리에게 말해요.
모두가 다 그렇게 살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문제가 없다고 우리에게 말해요. 그렇게 우리의 환경을 만들어요.
죄 용서의 의미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요. 죄책감을 덜기 위해 마음에 평안함을 주는 노래를 듣거나 책을 읽어요. 아니면 불멍 혹은 물멍을 하면서 마음을 덜어내요. 여러분 유튜브 찾아보세요.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피아노. 기타 등의 음악이 넘쳐나요.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들으며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내며 나의 죄를 축소 시키는데 집중해요.
이러한 현상은 로마 카톨릭에도 나타나요. 로마 카톨릭은 죄를 대죄와 소죄로 나눠요.
대죄는요. 알면서 의도적으로 저지른 심각한 잘못을 뜻해요. 만약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즉각 상실되어 지옥으로 간다고 이야기 해요.
소죄는요. 비교적 가볍고 흔한 잘못이에요.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하지 않기 때문에, 이 정도의 죄는 괜찮다라고 가르쳐요.
세상과 로마 카톨릭이 죄를 바라보는 인식이 똑같은거죠. 여러분 이게 말이 되나요? 죄의 크고 낮음이 어디있어요. 죄는 죄에요. 죄를 크고 낮게 구분하는 것은 그저 죄에서 벗어나고 싶은, 죄책감을 덜고 싶은 인간의 욕심일 뿐이에요.
죄의 심각성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알아야 해요. 그래야 죄를 용서해달라는 고백을 할 수 있어요.
여러분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어땠어요? 정확하게 모든 상황이 기억나지 않는다 해도 그 때의 감정, 벅참 그리고 감사함은 분명히 기억할 것이라 생각해요.
그것이 바로 죄의 심각성을 아는 사람이 드리는 기도와 고백이에요.
두번째,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는거에요.
우리는 기회만 주어지면 죄를 짓는 존재에요. 로마서를 보면요. 바울이 이렇게 탄식하고 있어요.
내 육체에는 또 다른 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내 마음과 싸워서 나를 아직도 내 안에 있는 죄의 종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 나는 얼마나 비참한 사람인가요?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구해내겠습니까?”
우리가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라 생각하는 바울조차도, 그 마음 속에 있는 죄된 본성 때문에, 자신의 의도와 마음과 다르게 계속해서 죄의 종이 되어가고 있다고 탄식했어요.
그것처럼 우리 인간은 기회만 되면 죄를 짓는 존재에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어요.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중요해요. 죄를 피해가기 위해 그 자리를 피하는 것도 중요해요.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정하는거에요. 나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라고 솔직하게 나 자신에게 고백하는거에요.
진짜 죄인이라는 인식이 없으면요. 내가 진짜 죄인이라 생각하지 않으면요. 용서를 구하지 않아요. 형식적인 기도가 될뿐이에요.
그냥 나의 마음은 편하기 위한 읊조림이 될 뿐이에요. 세상 사람들이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는 음악을 찾아 듣고, 책을 읽는 것처럼요. 기도는 하나의 방편이 될뿐이에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또 용서를 구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어요. 자존심 상하거든요.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사실 큰 용기가 필요해요. 내가 죄인인 것은 머리로 알겠어요. 그런데 마음으로는 그게 인정이 되지 않는거에요. 그래서 용서를 구하는게 힘들어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마음 속 깊이 고백하지 않으면요.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내 육체 안에 있는 또 다른 법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을 걸거에요.
“아니 살다보면 그럴 수 있는 것 아냐? 사람이 어떻게 죄를 하나도 안 짓고 살아가? 그래 나 죄인이지. 그래서 뭐. 어떻게 하라고.”
또 다른 법은 우리에게 죄에 대한 정신승리자가 되도록 만들거에요. 그리고 나 편한데로 살아가게 될거에요.
이러한 삶을 살지 않기 위해, 또 이러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인식. 깨달아야 해요"

죄를 용서 받지 못하면

이 두 가지. 죄의 심각성을 진심으로 깨닫고,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마음으로 고백하지 않으면 우리는 죄를 용서 받을 수 없어요. 용서 받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일단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없게 돼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하나님과의 자연스럽고 풍성했던 교제가 막히게 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자연스러운 교제를 이어나갈 수 없게 될거에요.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휘장을 찢고 하나님이 계시는 성막의 안쪽까지 우리가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셨잖아요. 대제사장만 들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던 그 자리에 우리가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는데요.
만약 우리가 죄를 용서 받지 못하면요. 이 사실들을 제대로 고백하지 않고 그렇게 신앙생활을 계속해서 이어 나간다면요.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찢어버리신 그 휘장을 우리가. 내가 바늘과 실을 들고 가서 한땀 한땀 꿰매고 있는 것과 같아요. 마음껏 하나님 앞에 나오라 찢어버리신 휘장을 우리가 보수하고 있는 것과 같아요.
“우리에게는 적당한 거리가 좀 필요한 것 같아요. 하나님 앞에 가기는 할게요. 죄를 고백하긴 합니다. 그런데 그래도 우리 좀 거리를 두면 좋을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막혀버린 하나님과의 교제는 우리의 마음을 굳게 만들거에요. 그리고 하나님을 찾지 않도록 할거에요. 서서히 천천히 멀어지도록 만들거에요.
굳어진 마음은 결코 하나님을 찾을 수 없어요. 굳어진 그 마음을 하나님으로 인해 깨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요.
죄를 용서 받지 못하면 우리는 오늘 읽은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똑같은 사람이 될거에요.
그리고 우린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가지 못하게 될거에요. 무늬만 그리스도인이 되면, 바리새인과 같은 머리로만 하나님에 대해 아는 사람이 되면요.
모든 사람이 우리를 향해 “교회를 다니나 안다니나 똑같이 사네. 내가 오히려 쟤보다 낫겠다. 무슨 교회 다니는 사람이 저렇게 이기적이야?” 라고 말할 것이 분명해요.
내가 죄인이라는 인식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하는 죄 용서의 기도를 하는 사람의 특징이 있어요.
남을 판단한다는 거에요. 왜냐하면 어쨋든 나는 죄를 고백했고 용서 받았다고 생각하거든요. 똑같은 죄를 계속해서 반복해서 짓고 살아가면서 깨닫지 못하고, 일단 나는 회개 기도했어. 라고 생각하거든요.
종교적 열심은 있지만 그 마음에 복음이 없기 때문에 남을 정죄하기 시작해요. 용서 받지 못했으면서 용서 받은 줄 알고 착각하거든요.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이 그랬어요.
기도할 시간이 되어 사람들이 성전 뜰로 들어와요. 당시 성전은 유대인들의 삶의 중심이었어요. 성전이 바로 유대 사회의 질서 그 자체였어요. 그리고 각자 자리에서 기도를 하기 시작하죠.
그들이 모여 기도를 하는 이 성전 뜰은 모든 것들이 구분되어지는 곳이었어요.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제사장과 비제사장 그리고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들이 구분되어 지고, 구분 지어진데로 사람들이 각자의 모양대로 기도를 하기도 하고, 시간을 보냈어요.
기도 시간이 되었어요. 사람들이 기도하기 위해 모여들기 시작했어요. 많은 사람들 앞에 한 사람이 등장해요. 그는 사람들 안으로 파고 들어 저 앞으로, 아주 잘 보이는 장소로 가요. 그의 발걸음에는 거침이 없어요. 아주 자신감 넘치는 발걸음으로 그리고 어깨를 딱피고 고개를 빳빳하게 하고 앞으로 걸어가요.
사람들은 그 사람을 주목해요. 그리고 그 사람이 하는 기도를 듣기 시작해요. 그 기도는 다음과 같아요. 잘 들어보세요.
“주 나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를 이 학교에 앉아 있는 자들 사이에 있게 하시고, 길모퉁이에 앉아 있는 자들 (환전상과 상인들)과 함께 있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아침 일찍 일어납니다. 그리고 저 사람들도 일찍 일어납니다. 저는 율법의 말씀을 위해 일찍 일어나고, 저들은 허망한 것들. 비본질적인 것들 위해 일찍 일어납니다.
저도 일하고 저들도 일합니다. 저는 일하고 보상을 받습니다. 하지만 저 사람들은 일하고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합니다.
저는 매일 열심히 달립니다. 그리고 저들도 달립니다. 저는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 곳을 향해 달립니다. 하지만 저 사람들은 멸망을 위해 달립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기도와 좀 다르죠? 우리가 읽은 바리새인의 기도 그 본문을 고대의 교부들이 해석한 내용이에요. 여러분 이 기도가 어떻게 들렸나요? 바리새인의 이 기도가 여러분에게 어떻게 다가 왔나요? 바리새인은 지금 자화자찬 하고 있어요. 감사하는 형식을 빌려 아주 교활하게 자신을 높이고 있어요.
여러분 성경을 볼래요? 그의 기도를 보면요. 하나님의 어떠한 행위도 드러나지 않아요. 자신의 삶을 위해 일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에 대해 말하지 않아요. 그는 자신만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자신만 본질적인 것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라고 생각해요.
바리새인은 지금 따로 서서 기도하고 있어요. 우리는 여기에서 “따로"에 주목해야 해요. “따로"는 문자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기도했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결국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기도한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의 기도는 자기 자신을 칭찬하는 자화자찬의 내용 밖에 없었던 것이죠.
이것이 바로 죄에 대한 심각성을 갖지 못한 자.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자의 기도에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은요. 내가 죄인임을 진짜 고백하지 못하고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사람은요. 죽어서 영원한 하나님과의 단절을 맞이하게 되어요. 끔찍한 고통을 영원토록 경험하게 되겠죠.
여러분 인생에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아픔은 무엇이 있었나요? 코로나로 인해 많이 아프고 힘들었던 적도 있을 것이고, 혹은 다른 몸살이나 질병으로 많이 아팠던 경험들도 있을거에요.
저는 신대원 1학년 때 걸렸던 요로결석이 제가 느꼈던 고통 중에 최고의 고통이었어요.
미련하게 요로결석인지도 모르고 진통제 먹어가면서 교회 대청소를 하고 주일 사역을 했어요. 아무리 진통제를 먹어도 찢어지는 통증이 가시지 않았지만, 또 정신력으로 버텼어요. 그리고 주일 사역 후 월요일 새벽에 기절하듯이 넘어졌어요. 그리고 병원을 갔더니 요로결석이라는 판정을 받았어요.
그 때의 고통을 다시 되풀이 하고 싶지 않아서 지금은 물을 엄청 마시고 있어요.
우리가 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제가 경험했던 요로결석보다 혹은 여러분이 경험했던 그 아픔보다 더 크고 강렬한 고통을 맞이하게 될지도 몰라요.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우리가 죄를 인식하고 고백하기만 하면요. 그 즉시 죄를 용서 해주세요. 무늬만 인정하고 하는 기도가 아닌 진짜 마음 속 깊이 우러나오는 고백의 기도를 한다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요.
죄를 고백하고 용서 받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에요. 성령님의 도우심이에요.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일하심 중 하나가 바로 우리가 죄를 자백할 수 있도록 돕는거에요. 성령은요. 예수님을 진심으로 받아드린 그 사람의 심령에 반드시 임재하거든요. 딱딱하고 굳어버린 마음을 부수고 녹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 자리에 앉게 되어요.
휘장이 찢어진 것은 단순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용서의 자리를 보여주신거에요. 용서의 자리를 경험하려면 세상 사람들이 하는 죄를 축소시키고 은폐시키는 방법을 사용해서는 절대 안돼요. 죄를 부인하고 묵비권을 행사하면 할 수록 우리는 손해를 봐요.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잖아요. 있는 그대로를 말해야 해요.
하나님이 아시는 모든 내용을 다 고백해야 해요. 그래야 진정한 용서와 감사가 주어지게 될거에요.
죄를 깨달아 가며 느끼게 되는 그 불편한 마음과 죄책감은요. 죄를 용서 받았을 때 누리는 설명할 수 없는 그 기쁨을 경험하게 하는 출발점이에요. 하나님의 선물과도 같아요.
죄 용서에 대한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평안함을 누리기 위해 우리는 절대 죄를 축소해서는 안돼요. 그대로 다 고백 해야 해요.
하나님이 주시는 죄에 대한 용서는요. 십자가에 달려 처형 당하시면서 죗값을 치루고 주신 용서에요. 그냥 간단하게 “그래 내가 봐줄게"하는 그 정도가 아니에요. 목숨을 걸고 버려가면서 까지 우리에게 주신 그 사랑이 바로 용서에요.
오늘 본문에 그 용서를 정말 잘 아는 한 사람이 등장해요.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마음 깊이 아는 사람이 등장해요. 바로 세리에요.
그도 바리새인처럼 따로 멀찍이 떨어져서 기도해요. 그런데 장소가 달랐어요. 바리새인은 모두가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리였다면, 세리는 성전 뜰 바깥쪽에 섰어요. 그는 자신의 모습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에요. 하나님께 감히 다가갈 자격이 없다라고 스스로를 생각했어요. 그렇게 멀리 선 그가 한 행동과 기도는 정말 단순했어요.
가슴을 치며 한탄하며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이 고백은요. 나는 의롭지 못하며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라는 뜻을 갖고 있어요. 그는 하나님 앞에 하나만을 구했어요. 그가 구한 것은 하나님의 자비였는데요. 이 자비는 바로 “속죄의 은혜"였어요. 그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말할 때 고백했던 단어는 “욤 키푸르"였어요. 이것은 속죄일. 죄를 용서 받는 날에만 쓰이는 단어였어요.
그의 기도를 다른 사람들이 들었다면 아마 “그래 너 죄인 맞아. 너 우리 배신자잖아. 당연히 너는 죄인이지"라고 했을거에요. 세리가 이렇게 기도 했던 것은 동족을 향한 미안한 마음 때문에, 또 사람들에게 미안한 감정을 갖고 있어 이런 것들을 보여주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에요.
그의 기도에는 어떠한 인상적인 말도, 심오한 믿음의 진술도 없어요. 정말 간단해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속죄의 피로 나의 죄를 덮어주시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용서해주옵소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기를 원합니다!”
그는 성전 뜰의 끝부분에 서서 이런 기도를 했어요. 성전 뜰의 이 끝부분은요.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서는 곳이었어요. 그는 성전 뜰 끝에 서서 “나는 가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감히 나아가 기도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실제로 그와 같은 마음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은 두 사람의 기도를 말씀하시며 한 사람만 의롭게 되었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의롭게 된 한 사람은? 바로 세리죠. 모두가 죄인이라 말하고 스스로도 나는 죄인이며,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이 없다고 고백했던 세리를 향해 예수님은 “정당하다"라고 말씀하셨어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척 했지만 사실은 나를 위해 기도했던, 자신의 행위와 모든 것들을 사람들 앞에서 멋지게 읊어댔던 바리새인을 향해 예수님은 “부정하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세리를 향해 “정당하다. 의롭다"라고 하셨던 이유는 그가 어떤 삶을 살았던지 간에 그의 중심에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자신이 지은 죄를 아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이죠.
그에 비해 기도도 하고, 금식도 하고 또 십일조를 드리며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살았던 바리새인을 향해서는 “부정하다”라고 말씀하셨죠.
바리새인은 정말 멋진 신앙과 믿음을 가진 사람 같아 보였어요. 하지만 그의 모든 신앙과 열심은 자기 자신을 더 높이기 위한 것들이었죠. 즉, 그의 마음엔 겸손보단 교만이 가득차 있었던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죄 사함을 받았으나, 여전히 죄의 본성을 따르는 자신을 발견하고 애통했던 자는 의롭다 하는 평가를 받았어요. 세리는 비록 자신은 구원받을 수 없는 이방인 로마의 하수인이 되어 동족을 배신하고 살아가고는 있으나,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용서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고 죄인이고 배신자라 말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렇게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회개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에요.
바리새인과 세리 중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요?
모두에게 인정받고 주목받는 믿음의 사람? 하지만 속마음은 죄로 가득한 사람?
주목 받지는 못하지만, 그저 공동체의 일원이지만 속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용서의 기쁨으로 가득찬 사람?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함으로 우리 가온누리 공동체 일원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죄 용서의 기쁨을 아는 이들이 되기를 소망해요.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며 숨겨진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 그리고 평안함을 누리는 한주가 되길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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