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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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서를 섬기는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잠깐이마나 같이 복음을 함께 나누고자합니다.
여러분은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이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을 가진 분이 계셨습니다. 누구일까요? 네 맞습니다. 바로 손양원 목사님이셨습니다. 당시 애양원이라는 시설이 있었는데, 이 애양원은 나병, 즉 한센병에 걸린 환자들을 치료하고 수용하기 위해 만든 시설이었습니다. 이곳에 손양원 목사님은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봉사하기 위해 이곳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 애양원에서 목사님은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셨습니다.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한센병은 체액을 통해 전염될 수도 있는데 목사님은 환자의 상처에 난 고름을 입으로 빨아 빼냈다고 합니다. 엄청난 행동인 것이죠.
그리고 목사님이 보여주신 사랑의 가장 절정은 목사님의 두 아들이 죽었을 때였습니다. 목사님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 두 아들은 여순사건 때 누군가에 의해 총살을 당합니다. 저는 부모가 아니기에 부모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식을 잃은 부모의 모습은 정말 비참하고 세상을 다 잃은듯한 모습임을 봐왔습니다. 한 명의 자식만을 잃어도 이럴텐데, 손양원 목사님은 한꺼번에 두 아들을 잃어버리셨습니다. 그렇기에 얼마나 더 비참하고 고통스럽겠습니까?
여기 계신 부모이신 우리 선생님들이라면 어떠시겠습니까? 부모가 아닌 분들이라도 내 부모님, 그리고 내 형 누나, 동생 그리고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를 당했다면 어떠시겠습니까? 그 사람을 찢어 여러번 죽여도 시원치 않은 마음일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든다고 해서 우리는 비난 할 수 없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그 살인자를 그렇게 하셨어도 우리는 그게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살인자를 죽이지 않고 “내 두 아들을 총살한 이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합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나의 원수를 내 아들로 삼겠다니. 정말 우리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손양원 목사님의 엄청난 사랑에 그 살인자는 회개하고 변화되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손양원 목사님의 양아들이 됩니다. 이 양아들의 아들, 즉 손양원 목사님의 양손자는 목사가 되어 현재에도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의 삶이 살인자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한 사람의 삶이 완전히 뒤바뀔 수 있었던 능력은 무엇일까요? 바로 손양원 목사님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 살인자의 삶 뿐만 아니라 이 사람의 전 인격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사도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기 전 당시 이스라엘의 분봉왕 아그립바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로마의 총독 베스도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도 여행을 다녔습니다. 유대 지도자들과 이방인들에 의해 각종 핍박을 받았으며 목숨이 위태해지는 상황에도 처하게 됐었습니다. 심지어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갈 때에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나 성령께서 자기 앞에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성령님의 말씀은 결국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잡히고 맙니다. 바울은 아무 죄도 없음에도 유대인들에 의해 잡혔지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로마의 총독 앞에서도, 가이사에게 상소하며 분봉왕 아그립바 앞에 섰을 때에도 바울은 복음을 전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마다, 특히 유대인들 앞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마다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자신이 회심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잘 아다시피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히브리인 중 히브리인이요. 율법에 열심이 있던 바리새인 중 바리새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시작으로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중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변화됩니다. 그냥 단지 예수님을 만났고 말씀을 들었지만 그의 모든 전인격과 삶이 변화가 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박해자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길을 걸어갑니다. 바로 이 바울의 회심 이야기를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에 말했습니다. 그가 이 이야기를 한 이유는 자신은 예수님을 박해했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너무나도 사랑하시기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세우셨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의 생각으론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박해자를 사도로 세울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사랑은 그것보다 훨씬 크십니다. 자신을 박해하지만 너무나도 사랑하시기에 바울을 만나셨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자신이 들은 복음이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나 감사해서 목숨을 조금도 아끼지 않는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삭개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였습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 제국이 각 지방의 주민들의 세금을 걷기 위해 세운 사람인데, 주민들이 암시장을 만들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시장을 만들었기 때문에 로마 정부 입장에서는 아주 난처하여 세리를 통해 세금을 걷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리가 정부에서 걷으라고 했던 세금의 양보다 더 많이 거둬도 로마 정부는 눈감아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세리에게 돈이 많았겠습니까? 바꿔서 말하면, 세리들이 이룬 상당한 부는 그의 가족과 친구들을 로마 제국이라는 외세에 팔았기 뗴문에 가능했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인들에게는 세금을 착복하는 이 세리가 어떻겠습니까? 너무너무 밉고 아주 악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당시 세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땠냐면 유대인들의 미쉬나라는 책을 보면 세리들은 너무나도 혐오스러운 존재로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동물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죄가 아니기 때문에 세리에게는 거짓말을 해도 괜찮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즉 세리와 동물은 동급이라는 것이죠. 적어도 유대인들에게는 이 세리는 사람이 아닌 짐승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에 올라가야 했다는 사실은 그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환영받지 못한 존재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군중 속에서 키 작은 사람이 내 앞에 서려고 하면 그 사람이 앞에 서더라도 내 시야에 방해가 되지 않아 비켜주지만 삭개오를 위해서는 그 누구도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앞으로 나가려고 할 때마다 사람들은 그의 얼굴에 엉덩이를 대고 그를 저지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삭개오는 나무에 올랐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않던 이 삭개오에게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무에 올라탄 삭개오를 올려다보시며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머물러야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삭개오는 너무 신이 나 나무에서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삭개오를 만나는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수군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저 사람이 누군지 모르시는건가? 저 사람을 돈을 사랑하고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짐승과 같은 세리인데 말이야.” “맞아. 저 사람은 죄인이야 죄인. 예수님은 죄인의 집에 머물겠다고 하신거란 말이야.” 이렇게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아셨음에도 삭개오의 집에서 머무십니다.
정확하게 삭개오의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성경이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는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삭개오의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님. 보시옵소서.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제가 누구의 것을 속여서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그렇게 순종하도록 명령하셨다는 기록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삭개오는 레위기에 나와있는 보상에 관한 요구 이상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율법에는 재산의 절반을 나누라는 내용이 없습니다. 삭개오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그의 마음에는 돈을 사랑하는 마음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향한 관대함이 넘쳐 나누고 싶은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가 나누어준 것은 그래야 했기 떄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고 싶었기 떄문입니다.
이 삭개오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삭개오는 단지 예수님을 만났을 뿐인데 그의 모습이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세리에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어 이웃을 위해 자신이 그토록 애착하던 돈을 나눠주고 싶어서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로 삭개오를 만나주신 예수님의 사랑이 그를 변화시켰습니다.
사랑하는 울산동해교회 교사 여러분. 바로 이것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 그 자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그 시간. 예수님을 박해하러 가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든, 사람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고 오히려 짐승 취급하던 죄인의 집에서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을 전혀 모르고 있었을 때, 심지어 우리가 예수님을 직접 대적하고 예수님을 향해 욕을 할 때 조차도 그분은 우리를 향한 사랑을 한 순간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만나 그분을 알 수 있도록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게 됐더라도 우리는 매번 예수님을 배반하며 예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양의 습성을 알고 계십니까? 양은 눈이 어두워 앞이 잘 보이지도 않고 심지어 귀까지 어두워 소리도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자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더 나아가 양은 넘어지면 혼자서 일어날 수도 없고 고집도 쎄서 목자가 이끄는 길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양은 구렁텅이에 빠져 죽게 됩니다. 이 양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시길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런 우리를 바꾸시기 위해 자신이 직접 양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기뻐하셨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즐거워하셨지만 목자의 말을 듣지 않는 양처럼 되셔서 구렁텅이에 빠져 죽음 가운데에 있던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만나주셨으며 우리가 그분을 따르기를 원하지 않을 때에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는 복음을 되새기며 우리의 마음이 다시 복음으로 가득해지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여름 사역을 위해 기도하는 이 자리에서 제가 “교사는 이런 이런 자세로 섬겨야 합니다”라는 것으로 말씀을 전하지 않고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한 이유는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듣는 것이 정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복음이 우리 마음 속에 있어야 우리 아이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 안에 있는 복음을 우리 아이들에게 전할 때에 아이들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교사 여러분. 이번 여름 사역을 통해 함께 복음을 들으며 아이들과 함께 변화되며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위로를 받고 함께 성장해가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부서의 아이들이, 우리 반의 아이들이 정말로 변화되길 원하는 교사분들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손양원 목사님을 통해 살인자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처럼 그 아이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그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모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그 아이를 변화시킬 수 있는건 돈을 사랑하는 삭개오처럼 그리고 예수님을 박해했던 바울처럼 그리고 우리가 변화된 것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습니다.
이 시간 함께 찬양하길 원합니다.
‘주는 완전합니다’ 함께 찬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