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VS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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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본문은 하나님의 뜻 대신에 자신의 욕망만을 추구한 사울의 모습과 그 결과에 대해 말씀합니다.
1- 욕망은 말씀과 싸운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욕망은 말씀과 싸우려 한다는 것입니다. 15장의 사건을 좀 정리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명하여서 아말렉의 모든 것을 진멸하는 구원역사적이고 영적이고 복음적인 전쟁을 명하셨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릇되게 해석하여 전쟁에서 이기고 그 이후에는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아각왕을 남겨두고 가축 중에서 좋은 것을 남겨뒀습니다. 자신의 업적을 위해서 순종을 포기했습니다. 자기 욕망 때문에 말씀을 왜곡시킨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문맥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욕망이 더욱 노골적으로 튀어나오고 욕망이 자꾸 말씀을 대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4절을 보시면 사울이 사무엘에게 말합니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제 본문에서는 계속 자기가 하나님 말씀을 잘 들었다고 하다가 사무엘이 사울의 왕위에 대해 거론하니까 자신이 범죄했다고 합니다. 백성을 두려워해서 이런 일을 벌였다고 자백합니다. 여전히 백성의 말을 들었다는 거짓말은 덜어내지 못합니다. 이것을 보면 사울의 회개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백성을 두려워했다는 것은 백성에서 선한 정치를 베풀다보니까 실수했다는 것이 아니라 백성 앞에서 뭔가 자신이 위대한 왕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욕심을 내다보니 이렇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25절을 보시면 알 수 있는데,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울은 일단 자기 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고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죄를 사하는 목적은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입니다. 여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는 것은 사울이 남겨뒀던 가축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전쟁의 승리를 자축하는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아, 제가 잘못한 것 맞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그리고 저랑 같이 가서 백성들이 보는데, 일단 우리가 승리했다는 것을 한 번 알립시다. 정치적인 퍼포먼스 한 번 합시다. 그래야 내 왕권이 좀 더 튼튼하게 다져질 것 아닙니까?” 이런 의미입니다.
15장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몇 차례 꾸짖고 있는데 사울은 회개하는 척하면서 여전히 자신의 욕망으로 말씀에 대적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자신의 입지, 자신의 자리가 중요합니다. 26절에 사무엘은 단호하게 선지자로서의 입장을 밝힙니다.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않습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23절에서도 나옵니다. 그러니까 24절에서 범죄했다고 고백하는 사울의 근본적인 정신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겉으로는 회개한 척하지만 본질은 자신의 왕위를 견고히 하려는 욕망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23절과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26절에 반복합니다. 27절에 사무엘은 돌아섭니다. 사울이 사무엘의 겉옷 자락을 붙잡았는데 겉옷 자락이 찢어집니다. 이수일과 심순애라는 소설을 보면 다이아 반지에 눈이 멀어 김중배에게 돌아섰던 심순애가 다시 이수일에게 가서 속죄하고 이수일을 붙잡지 않습니까? 영화 포스터를 보면 막 코트 자락을 붙잡고 있는데 이수일이 매몰차게 그것을 거절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과 사무엘을 볼 때 마치 이수일과 심순애 영화 포스터가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이수일과 심순애 같은 소설에서 나올법한 장면이 왜 왕과 선지자에게 연출이 됩니까? 여기 나오는 겉옷자락이라는 단어 카나프는 날개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이 날개는 구약성경에서 보호의 의미로 자주 쓰입니다. 사울은 자기 욕망에 충실하여 말씀을 어겼기 때문에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보호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27절에 겉옷자락이 찢어지는 장면이 나오고 28절에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준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겉옷자락이 찢어져서 떨어져 나가는데 이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도 찢어서 떨어져나가게 해서 이 나라를 다윗이 다스리도록 하실 것입니다. 이 비슷한 장면이 열왕기상 11장 30절에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죄로 인해 나라를 나누는데 이때 아히야 선지자가 자기 옷을 찢어서 여로보암에게 주면 여러보암이 북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을 말합니다.
어쨌든 욕망에 충실한 사울은 자꾸 말씀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을 겁박하지만 말씀은 끊임없이 사울의 욕망이 잘못됨을 지적하고 거기에 대해 징계할 것을 이야기 합니다. 욕망은 말씀을 복종시키려 하지만 말씀은 절대 굴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욕망에 대해 굳은 태도로 하나님의 권위를 지킵니다.
(적용) 우리 안에 있는 욕망은 끊임없이 말씀과 대적하려 합니다. 계속 내 욕망 안에 말씀을 가두고 말씀은 그저 나의 욕망을 합리화하는 종교적인 이유, 종교적인 수단 정도로 그 권위를 격하시키려고 합니다. 이걸 제일 잘하는 사람이 바리새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을 잘 지키는 척하면서 교만한 태도를 회개하지 않고 자신의 기득권을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을 꾸짖고 비판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절대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성경구절을 잘 외웠을지는 모르지만 종교적인 전통에 충실했을지는 모르지만 말씀에 대적하며 욕망을 따라 살았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는 이 욕망의 실체를 파악하여 우리의 욕망이 말씀을 겁박하지 않고 도리어 말씀이 우리의 욕망을 찔러 쪼개도록 해야 합니다.
2- 결국 말씀은 욕망을 멸망시킨다.
(설명) 그다음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결국 말씀은 욕망을 멸망시킨다고 하는 것입니다. 29절에 보시면 여전히 사무엘은 단호합니다. 사울이 제사를 통해 승리 퍼포먼스를 하자고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무엘이 단호하지만 실은 말씀이 단호합니다. 사울의 욕망을 정당화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중요하다 말합니다. 30절에 사울은 다시 지긋지긋하게 사무엘을 설득합니다. 사울이 지긋지긋하지만 이 사울을 통해 말씀을 대적하는 우리의 욕망이 지긋지긋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때 사울은 자신의 욕망을 굉장히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30절 중간쯤에 보면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라고 말합니다. 그 이후에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한지라라고 말합니다. 사울이 그리는 그림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선지자가 막 하나님이 세우신 왕 사울을 막 높이고 승리를 감사하며 제사를 드리고 사울의 정치적인 입지가 견고해지는 그런 그림을 그리고 있고 사무엘에게 이런 퍼포먼스를 강요합니다. 나를 높여달라고 대놓고 말하지 않습니까? 사울이 끈질기게 욕망을 관철시키고 욕망을 구체적으로 표현합니다. 이게 바로 이야기의 힘인데 만약 성경이 그냥 사울은 계속해서 부탁하였더라 이렇게 썼으면 인간의 악한 욕망이 얼마나 끈적거리고 불쾌한 것인지 우리가 알지 못했을텐데 성경이 스토리로 풀어서 사건을 설명하니까 우리가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끈질긴 사울의 부탁에 사무엘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31절에 이에 사무엘이 돌이켜 사울을 따라가매 사울이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아마 사무엘은 사울을 따라가되 사울과 함께 제사를 드리거나 사울의 공적을 치하하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울이 꿈꾸는 그런 프로파간다에 동원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32절과 33절에 나옵니다. 32절에 사무엘이 아마도 백성들에게 직접 명령을 내립니다. 아말렉 왕 아각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네 어미에게 자식이 없으리라 저주하고 아각을 찍어 쪼갭니다. 네 어미에게 자식이 없으리라 한 것은 단순히 부모욕을 했다. 폐륜적인 말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고대에는 자식이 없는 것이 그 집안의 저주이기 때문에 선지자로서 복음의 원수에게 합당한 저주를 내린 것입니다.
사무엘이 아각을 처형한 것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아각을 처형한 것은 사울의 욕망을 처형한 것입니다. 사울의 의도는 이스라엘 백성이 다 보는 앞에서 아각왕을 능멸하고 웃음거리고 만들어 자기가 멋지게 딱 처형을 하는 그런 것입니다. 고대근동의 왕들은 다른 나라를 침략할 때 이런 식으로 자신의 왕위를 굳건하게 했습니다. 혹은 아각의 목숨을 빌미로 아말렉에게 지속적으로 조공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의 환심을 사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아각은 사울이 왕으로서 입지를 굳건히 다질 수 있는 그런 아이템이었습니다. 그런 아각을 사무엘이 저주하고 그의 손으로 그냥 처행했습니다. 사울의 욕망이 말씀에 의해 처형당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 없는 왕의 최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하는 이스라엘의 왕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욕망을 따르면 아각왕처럼 심판 받을 것을 실물로 교훈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사울왕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전해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적하는 세속적인 왕은 반드시 멸망당합니다. 세속적인 왕의 욕망은 말씀 앞에서 무너집니다.
(적용)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우리 안에는 죄인의 성향과 본성이 잔재하고 있습니다. 자꾸 말씀 더러 우리 욕망에 헌신하라고 말합니다. 말씀에 따르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욕망에 말씀의 권위를 동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대적하는 욕망을 꺾어버리십니다. 욕망의 종말을 고하시고 욕망의 멸망을 선언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 앞에서 우리 욕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꿈이 아무리 화려하고 아무리 근사한 것이라도 그것이 만약 오직 우리 욕망을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은 그것을 꺾어버리십니다. 전쟁영화 같은 것을 보시면 도시 안에서 군인들이 시가전에 실패할 확률이 높으면 부대는 그 도시를 포기하고 그 도시에 비행기를 보내서 폭격을 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의 권위에 복종하여 우리 스스로가 욕망을 제어하고 절제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욕망에 대해 폭격을 선언하십니다. 우리 뿐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위해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과 기도에 부단히 힘써 나의 욕망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열망으로 우리 자신을 채워야 합니다. 욕망은 반드시 멸망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욕망은 계속 말씀과 투쟁하려 하지만 말씀은 꺾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은 꺾으려는 욕망이 하나님에 의해 꺾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서 부단히 나의 욕망을 꺽어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만을 열망해야 합니다. 이번 한주도 우리의 욕망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좇는 한 주 보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