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세가지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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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세가지 반응응 / 믿음, 소망, 사랑은 우리가 가진 믿음의 온전한 반응이다.
[서론]
우리는 지금까지 히브리서를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그 분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다루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며, 우리 믿음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자주 믿음을 오해하곤 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하나님이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주실 것이라는 기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기대, 즉 믿습니다, 믿습니다와 같은 맹목적 믿음은 모든 종교에 존재합니다.
인도에 가면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자신의 자식을 바치기도 합니다.
티벳에 가면 하루 종일 몇 걸음 걸을 때마다 몸을 바닥에 붙여 신에게 기도합니다.
태국에 가면 인도 불상에 금박지를 붙이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매년마다 값비싼 금박지를 사서 그 곳에 붙입니다.
처음에는 손바닥만했던 불상이 워낙 금박지를 많이 붙으니 수백년이 지나면 아이 키만한 불상이 됩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그렇게 자주하면 할수록 자신들의 신이 복을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날 위해 해주실 일을 기대하는 게 아니라, 날 위해 해주신 일을 깨닫고 그것에 반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깨닫는데서 그치면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반응하는 것까지 가야 그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께 반응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예배라고 부릅니다.
주님이 누구시며,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믿는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어떤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계신가요?
우리 모두 주님께 온전히 반응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본론]
히브리서는 크게 두부분으로 나눠집니다.
1장1절부터 10장 18절까지 우리의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10장 19절부터는 그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다룹니다.
19절부터 21절까지는 1장1절부터 10장 18절까지의 모든 내용을 요약 정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시며,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단 3절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물론 원어인 헬라어로 보면 19-25절까지가 모두 한 문장입니다.
그만큼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한 호흡으로 우리의 믿음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도 중요한 말은 한 문장에 다 담으려고 하잖아요?
그런 마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첫 문장에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이라는 말 속에는 강한 애정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제가 설교하다가 ‘사랑하는 성도여러분’이라는 말을 할때가 있잖아요.
정말 애정을 담아서 제가 하고 싶은 말 앞에 이런 표현을 붙이거든요.
히브리서 저자도 설교자다 보니까 이런 말을 여기에 붙이는 것입니다.
그럼 먼저 지금까지 히브리서의 내용을 정리, 요약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시며,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은 무엇인가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성과 사람이라는 인성을 동시에 가지신 분입니다.
그럼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와서 사람이 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을 아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이죠.
21절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제사장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 좋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이유는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대제사장이 어떤 사람입니까?
대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은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주셨고, 대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은 백성들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제사장을 통한 제사는 우리 죄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동물의 죽음과 피를 통해 드린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죄를 어떻게 동물의 죽음과 피로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단지 하나님이 임시방편으로 주신 제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매년 또다시 그 제사를 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인간 제사장이 드린 제사의 한계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좋은 제사, 더 온전한 제사를 기다리게 된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동물제사를 주신 목적인 것이죠.
21절에서 하나님의 집이란 물리적 집이 아닌 바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을 말합니다.
교회가 건물이 아니고 믿는 자들의 모임이듯 하나님의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셔서 지금도 우리들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2000년전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으로 끝난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다시 부활하셔서 하늘에 올라 하나님 오른쪽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그래서 왕으로 여전히 세상 만물을 통치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을 도우십니다.
주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셨을까요?
19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지성소에 들어간다는 말은 하나님을 만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예수의 피’ 때문입니다.
예수의 피가 한 일이 무엇인지 20절에서 더 자세히 설명해줍니다.
20절입니다.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셨다. 그런데, 그 휘장이 곧 그의 육체입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을 만나려면 얼마나 많은 절차가 필요했을까요?
레위기를 보면 흠없는 짐승을 찾아서 데려와야 하고, 그것을 내 손으로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나면 그 다음 과정은 모두 제사장이 대신 해줍니다.
자기가 직접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대제사장이 대신 만나야 합니다.
이처럼 구약의 동물제사의 한계는 우리가 직접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한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물건이 바로 휘장, 쉽게 말해서 커튼입니다.
성막에 휘장은 3개가 있습니다.
입구를 막고 있는 휘장과 성소를 막고 있는 휘장과 그리고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막고 있는 휘장이 있었습니다.
이 휘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함부로 이 휘장 안으로 들어가면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려면 이 휘장들을 모두 거쳐야만 했습니다.
가장 통과하기 어려운 휘장이 바로 성소와 지성소를 가리고 있는 휘장입니다.
왜냐하면 지성소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성소는 오직 대제사장만 일년에 딱 한번 대속죄일에 백성들의 죄를 대신 깨끗케 하기 위해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도 자신의 죄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그 조차도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대제사장도 목숨걸고 지성소에 들어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성소의 휘장은 죄인인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한계를 보여주는 상징적 존재였습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담과 같은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의 피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여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놀라운 일들이 몇가지 일어났습니다.
그 중 하나가 성전에 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완전히 두 동강이 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몸이 찢기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이 찢기셨기 때문에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성전의 휘장도 찢어진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구약시대와 달리 지금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배때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납니다.
또한 성도들과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우리가 이런 특권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 특권을 준 분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이게 지금까지 히브리서가 앞에서 다룬 내용의 요약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며, 우리를 위해 자신의 피를 흘려 새로운 생명의 길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 즉 좋은 소식이며, 우리 믿음의 본질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런 복음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주님은 우리에게 세가지 반응을 요구하십니다.
먼저 22절입니다.
첫번째, 우리는 확고한 믿음과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나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아가야 한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바로 예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이런 고난과 위협이 계속되니까 예배에 빠지는 사람들이 생긴 것입니다.
신앙이 나태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번 빠지는 거 뭐 그게 얼마나 크게 내 믿음에 문제를 일으키겠어?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배 한번 안드리면 어때?
그 다음주에 드리면 되지.
그래서 한달에 한번 예배드리는 사람도 있고, 바쁘거나 일있으면 두달에 한번 드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우리는 과연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겨도 될까요?
지금 히브리서에서 주님은 우리가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계십니다.
나아가야 한다는 말은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나태해지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휩쓸려 간다는 말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수없이 많은 시험과 유혹으로 우리의 믿음을 위협합니다.
날마다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매주 수요일마다 서로 믿음을 격려하고, 매 주일 예배때 모여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노래중에 강산에의 ‘거꾸러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연어는 강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중간 중간에 곰이 공격하는데도 끝없이 올라갑니다.
그러나 거슬러 올라가지않고 가만히 있는 연어는 강물에 휩쓸려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똑같습니다.
나태해지면 신앙은 나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22절은 우리를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마음에다 예수의 피를 뿌려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맑은 물로 몸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님의 피가 뿌려졌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맑은 물로 깨끗이 씻어졌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우리가 새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은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제는 더이상 눈에 보이는 대로, 세상 가치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온전히 주님께 속한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 분의 말씀과 가치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곧 있을 수련회때 우리 교회 최초로 침례식을 거행합니다.
침례식때 침례받는 사람은 물 속에 들어갑니다.
그 때 물 속에 깊이 들어가 우리의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피가 우리 마음에 뿌려져 우리는 이미 새 사람이 되었지만, 그것을 침례식을 통해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행실이 새 사람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의식이 바로 침례식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복음에 대한 우리의 첫번째 반응이 믿음이라면, 이제 두번째 반응은 소망입니다.
23절입니다.
두번째,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우리가 고백하는 소망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소망이 무엇인가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경쟁도 치열하고, 미래는 불안합니다.
무엇을 해야할 지, 무엇을 잘하는 지, 그것도 잘 모릅니다.
현실만 보면 소망이 없습니다.
헬 조선, N포시대, 전염병, 지구온난화 뭐 하나 좋은 소식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나는 잘될거야, 나는 성공할거야, 나는 인정받을거야…
이런 막연한 소망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막연한 소망을 품고 있기에 실패하면 우울증 걸리고, 공황장애오고 하는 것입니다.
저장강박증이라는 병이 있습니다.
물건을 하나도 안 버리고 쌓아둬서 방이나 집이 쓰레기장이 되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원래는 노인층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요즘은 청년들중 이런 저장증에 걸린 사람들이 꽤 많아졌다고 합니다.
이유가 뭘까요?
전문가들은 청년들이 미래에 대해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에게 소망이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초기 기독교시절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와 유대인들의 박해 속에 고통받았습니다.
‘쿼바디스’라는 유명한 영화에 보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고난을 당했는지 나옵니다.
그들은 짐승들에게 먹잇감이 되기도 하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지켰습니다.
터키에 가면 데린쿠유라는 지하동굴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1만명 넘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런 지하동굴이 한 두개가 아닙니다.
그들은 왜 이렇게 극심한 고난을 견디면서까지 신앙을 지키려 했을까요?
바로 이 소망때문입니다.
그들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세워질 것이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곧 올 것이라는 소망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꿈꾸시던 그 하나님 나라를 꿈꾸었기 때문입니다.
냉엄한 현실과 극심한 고통조차 그들의 소망을 죽일수는 없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은 팍팍하고, 어렵지만 우리에게는 영원한 소망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갖는 그런 막연한 소망이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약속하신 소망입니다.
그래서 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거짓말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기에
우리의 소망은 막연한 소망이 아닙니다.
각박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세워져가고 있으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곧 올 것입니다.
이 소망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천이 의심의 성에 사는 절망거인에게 붙잡혀 감옥에 갇힙니다.
그 때 절망거인의 부인인 자포자기가 매일마다 찾아와 크리스천이 절망가운데 자살하도록 괴롭힙니다.
그러나 그 때 갑자기 크리스천은 자신의 가슴 속에 있던 열쇠하나를 꺼내 감옥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 열쇠의 이름이 바로 약속입니다.
약속은 소망의 또다른 이름입니다.
복음에 대한 첫번째 반응이 믿음, 두번째 반응이 소망이라면, 이제 세번째 반응은 사랑입니다.
24절입니다.
세번째, 우리는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서로 격려해야만 합니다.
25절에 보면 당시 사람들은 믿음으로 인해 핍박이 계속되다보니 모임을 갖지 않으려 했습니다.
흩어져서 서로 위험한 상황에 놓이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히브리서는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의 당연한 반응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혼자 하는 게 아니죠.
형제, 자매들이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모습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래서 성도간의 교제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적 가치관에 둘러 싸여 있습니다.
시대적 가치관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나태해지면 그 흐름 속으로 나도 몰래 휩쓸려 가버립니다.
말로는 믿음을 말하지만 실제 삶은 세상 가치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교제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형제 자매들이 서로의 믿음을 격려해야 합니다.
믿는 자들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건히 붙들어 주십니다.
아프리카 속담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고 말입니다.
우리 신앙은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장거리 마라톤입니다.
함께 뛰는 런닝메이트가 바로 우리의 형제 자매들입니다.
함께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놀라운 특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나태해진 마음을 다시 붙잡고 주님 앞에 믿음으로 나아가 예배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만큼 불행한 사람이 없습니다.
소망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무덤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믿음과 소망이 있다면 반드시 형제 자매간의 사랑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서로 모여 믿음을 격려하고,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에 대한 우리의 당연한 반응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으로 충만한 우리 다카포 식구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