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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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시피, 영상장비를 설치하기 위해서 여러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근래에 방문하는 교회 중 한 교회에서 눈에 띄는 표어를 보았습니다. “예배 회복"이라는 문구가 현수막에 적혀 있었습니다.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거리두기가 완화 되면서 오프라인으로 모여서 예배하는 것을 회복하여야 해서 그러한 표어를 적어두지 않았나 합니다. 그리고 잠시 생각했습니다. 온라인 예배에서 오프라인 예배로 가는 것이 “예배의 회복"이라는 말인가?
사실 “예배 회복, 예배 회복 운동"이라는 말은 코로나 이전에도 너무 많이 들었던 구호였습니다. “예배 회복"이라고 외친다는 것은 무엇을 전제하기 때문일까요? 예배가 무너졌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배 회복"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그렇다면, 예배가 무너진 상태는 무엇이고, 또 예배를 회복한 상태는 무엇일까요? 그 둘의 정의를 분명히 알고 그런 구호를 사용하고 있는지 저는 의문이 듭니다. 물론, 정확하게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요.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예배 회복" 혹은 동의어로 사용 될 수 있는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 과연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는 정확하게 알고 있는지 여부는 매우 궁금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참된 예배"에 관해 우리에게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여호수아 마지막 장의 말씀을 통해서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 상고하고자 합니다.
<전환문> 참된 예배란 무엇일까요?
1.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의 기억이 있어야 합니다.
1.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의 기억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절 부터 13절 까지는 여호수아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형식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2절에서 보시면,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로 시작합니다. 이 것은 마치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할 때 쓰는 형식과 같습니다. 상상을 해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을 모으고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십니다.”라고 말할때 사람들의 태도는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자리에서 일어섰거나 혹은 엎드리질 않았을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체적인 행동이 나와 있지 않아서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극이나 영화같은 곳에서 비슷한 상황을 볼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극에서는 어떤 사람이 두루마리를 들고 “어명이요” 하면, 모두 다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임금님의 말씀에 대한 존경과 경외의 표현이지요. 마친가지로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말씀 입니다.”라고 말하면 웅성웅성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갑자기 조용해지고, 하나님 말씀에 대한 어떤 경외감을 표현했을 것입니다.
사실 24 장은 예배의 한 장면 입니다. 보통 우리 기독교 예배에서 예배의 시작을 알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쯤 전통적으로 앉은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경외의 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온 귀를 집중해서 그 말씀을 듣습니다.
어찌 되었던, 24장에서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 백성을 모으고 예배를 드리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의 태도와 마음가짐 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 말씀의 내용입니다. 2절에서 13절까지의 내용은 과거, 즉 아브라함의 조부 나홀 부터 시작하여 현재 가나안 정복까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어떻게 일하셨는지에 관한 것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셨는가를 상기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우리를 위해 일하신 것,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예배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배학자인 로버트 웨버는 예배를 정의하기를 “예배는 기억이다. 예배는 재연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셨는지 기억하고, 그 것을 재연하는 행위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하셨습니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기독교의 예배와 타 종교의 예배와 다른 점입니다. 타 종교는 무엇을 예배하고 왜 예배합니까? 대부분의 경우 자신들이 원하는 것들을 해결하고자 예배합니다. 불교에서는 108배라는 고행을 통해서, 탑을 빙빙 도는 것을 통해서 연못에 동전을 던지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소원을 이루려는 목적으로 그들의 예배를 합니다. 가나안의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자들은 어떻게 예배했습니까? 자신의 몸을 칼과 채찍으로 피를 흘리며 자해하면서 비가 오기를 기원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효녀 심청이 같은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바다를 잠잠하게 하기 위해서 인신 제사를 드리기도 합니다. 즉, 타 종교의 모든 예배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목적으로 예배합니다.
하지만, 기독교 예배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예배는 오직 이미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교회 공동체가 기억하여 그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분만을 영원히 섬기기로 결심하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예배의 본질과 목적을 분명히 이해하고 예배하십시오.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 이러한 기독교의 기억의 예배가 변질되었습니다. 원래 한국이 가지고 있던 샤머니즘이고 무속신앙적인 기복신앙이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예배의 본질을 흐렸습니다. 그래서, 각종 이상한 예배들이 기독교 형식을 입고 우리의 신앙을 좀 먹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개업 예배는 어떻습니까? 개업 예배를 왜 드립니까? 사업 잘 되게 해 달라고 그 사업장을 위해서 하는 행위 아닌가요? 기복적이고 샤마님적이죠. 우리나라의 고사 지내는 것을 대신해서 개업 예배가 된 것입니다. 예전에 어느 분이 보험 회사 같은 것을 개업했습니다. 그리고 개업 예배를 드리고 위해서 했던 행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보험 설계사 책상에 앉아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장사 잘 되게 해 달라는 기복적인 행위 였지요. 또 이사 예배는 어떻습니까? 새로 이사하면 의례히 이사 예배를 드립니다. 이 이사 예배는 무당들이 새로 이사간 집의 악귀를 몰아 내고 좋은 귀신을 들이기 위한 행위가 기독교식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 집에 귀신들을 물리치고 예수라는 새로운 신을 모시는 행위로써 이사 예배를 드리는 것이지요. 예전 제가 순복음을 다닐 때 저희 집이 이사하거나 다른 집이 이사하면, 꼭 이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럼, 꼭 문지방이나 냉장고 쌀독을 붙잡고 기도하시는 분이 곳곳에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사 오면서 가져온 인형들에 귀신이 붙었다고 내다 버리기까지 했습니다. 굉장히 샤머니즘적이지요. 수능 100일 작정 예배는 또 어떻습니까? 또 추도예배는 어떻습니까? 저희 어머니는 아무리 성경을 읽고 생각해 봐도 추도 예배는 성경적이지 않다고 해서 저희 아버님 기일에 추도 예배를 따로 하지 않습니다. 다만 가족이 모여서 예배 할 뿐입니다.
우리는 모든 곳에 “예배"라는 말을 붙입니다. 정말 함부로 붙이는 것이지요. 예배는 기억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그 진리를 기억하는 것이 예배 입니다. 그러한 기억의 예배를 통해 참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환문> 그럼, 또 참된 예배란 무엇일까요?
2. 예배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2. 예배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여호수아가 14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결단을 촉구합니다. “그러므로"라고 시작하는 14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여호와만 섬기라", 예배의 요소 중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결단입니다. 과거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은혜를 기억하고, 앞으로도 영원히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결단이 있어야 참된 예배입니다.
여호수아는 14절 부터 이 신앙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1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여호수아는 누구를 섬길지 한 신만 선택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가 있습니다. 바로 누구를 섬길 것인가? 입니다. 기억의 예배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은혜를 주셨으니 오직 하나님만 예배하겠다는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업 예배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개업 예배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사업 잘 되게 해주십시오.” 입니다. 물론 “이 사업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 주십시오"라는 매우 애매한 물 타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개업 예배를 드리고 나서의 결론은 “예배로 시작했으니 사업이 잘 될거야"라는 매우 근거 없는 희망입니다. 이사 예배에서도 “예배를 드렸으니 이 집에서 행복하고 하는 일이 잘 풀릴거야”라는 또 다른 희망입니다. 수능 100일 예배는 매우 확실하게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메시지가 전혀 없지요. “100일이나 예배 했으니 좋은 대학을 갈꺼야”라는 희망입니다.
지금 까지 언급한 예배 중에서 다른 신을 발견하셨습니까? 바로 번영의 신입니다. 사업의 번영, 개인의 안락과 성공이 바로 그 신입니다. 만일 참된 예배라면, 그 예배에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개업 예배에서 “사업이 잘 되고 안 되고는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다만, 이 사업체에서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습니다.”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류 강도사님도 아마 매일 아침마다 그러한 기도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응답으로 매주 목요일마다 하는 큐티 모임이 시작 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 전에는 각종 잡녑과 욕심과 헛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지만, 예배를 드리는 중에 “나는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습니다.”라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요. 오늘 본문에서 여호수아가 매우 이상한 말을 합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만 섬기겠다" 결단하고 나서 이런 말을 합니다. 19절 말씀입니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만 섬기겠다 결단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이라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여호수아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들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거룩이란 “구별, 구분"을 말합니다. 영어로는 “Holy” 혹은 “set apart”라고 하지요. 즉,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과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즉 창조주와 창조물은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만드셨습니다. 그 분의 온갖 지혜로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너무나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창조물인 우리 인간은 그 크신 창조주인 하나님을 결코 다 알지 못합니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 뒷 다리를 손으로 만지면서 코끼리의 모습을 상상한는 정도로만 알뿐입니다. 그러한 제한적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 섬길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대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능력이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질투한다는 것은 그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에 생기는 부정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그 사랑하는 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희생하시면서 까지 우리를 구원하셨겠습니까? 우리가 자식으로서 부모의 그 큰 사랑을 다 이해 하지 못하듯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그 큰 사랑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들만 사랑하시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독차지하고 있는 우리가 다른 신들에게 한 눈을 팝니다. 그 모습을 보는 하나님은 얼마나 질투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질투하기까지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결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동시에 돈을 사랑하고 명예를 사랑하고 기타 등등 나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사랑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사랑하기도 합니다. 이유는 하나님은 요술램프의 지니이기에 사랑합니다. 길거리에 자판기와 같아서 사랑합니다. 즉,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 것은 하나님과 다른 신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다른 것을 사랑하면 안됩니다. 자신을 한번 돌아 보십시오.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고 섬길 수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돈과 명예와 소원 그리고 마음의 안정을 하나님이 주실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예배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능력이 없습니다.”
이러한 두가지 이유로 우리는 완벽하게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속성과 비교되는 인간의 성향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합니다.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하니
하나님과 구분되는 인간은 언제나 다른 곳으로 한 눈을 파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루를 사는 동안 얼마나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만 사랑하고 섬기고 있습니까? 만일 하나님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 하나님은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재앙을 내리시고 멸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 예배 때마다 결단하고 결심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습니다.”
우리는 매번 결단하고 결심해야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섬길 수 있는 그러한 연약한 존재입니다.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매 예배 때마다 하나님만 섬기겠다 결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입니다. 기독교 인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고, 우리의 삶의 중심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배는 우리의 신앙과 삶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억하게 하는 행위이고,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하신 그 구속 사역을 재연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여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노라 결단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드리는 참된 예배입니다.
예배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을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