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 받으신 심판자

사도신경 해설 시리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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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1 – 심판대 앞에서 정죄 받으신 예수님
(설명) 오늘은 사도신경 네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살펴볼 문장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입니다. 사도신경은 전 세계 많은 교회들이 고백하는 거잖아요. 매주 마다 고백하는 건데 이 본디오 빌라도는 매주 주일 마다 전 세계로부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욕을 먹고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닙니다. 제 개인적으로 제일 괘씸한 사람이 예수님을 판 가룟유다고요. 이놈이 사도신경에 들어갔으면 좋았을텐데, 또 예수님에 대해 거짓 증언한 바리새인들 대제사장들 그리고 빌라도가 헤롯왕에게 예수님을 넘겼다가 다시 빌라도에게 넘기잖아요. 헤롯왕도 잘못이 커요. 그런데 왜! 본디오 빌라도만 나쁜 놈으로 말할까요? 본디오 빌라도 입장에서는 ‘나만 나쁜 놈이야?’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사도신경은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는 말은 라틴어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제가 학교 다니던 시절에 라틴어는 귀찮아서 안 배워가지고 라틴어를 하나도 모릅니다. 책에서 읽은 걸 이야기 하는 거예요. 라틴어로 이 부분을 보면 본디오 빌라도의 치하에서 고난을 받았다는 말도 됩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은 거랑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은건 다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으면 본디오 빌라도만 나쁜놈이고 본디오 빌라도의 치하에서 고난을 받았으면 이 예수님을 재판한 그 재판이 본디오 빌라도의 책임아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 사도신경은 왜 예수님을 고생시킨 수많은 나쁜 놈들 중에서 본디오 빌라도만 이야기 할까요? 본디오 빌라도의 치하에서 예수님의 재판이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재판했기 때문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의 재판은 죄를 가려내는 심판대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죄가 없으시죠. 본디오 빌라도도 예수님이 무죄하다고 인정했어요. 오늘 여러분 성경 본문 읽은 것처럼 사람들의 만족을 위해 예수님께 사형을 선고했어요.
예수님은 죄가 없어요. 그런데 왜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았을까요?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지상의 심판대에서 심판을 받으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늘의 심판대에서 무죄로 입증 받아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거예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다 죄인으로 태어나요. 우리는 지상의 심판대의 기준으로 봐도 완전하지 못해요. 급하면 무단횡단도 하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하늘의 심판대에서 우리를 보면 어떻겠어요. 우리는 철저한 죄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하늘의 심판대에서 무죄로 선고 받아야 하는데 불가능 하단 말이에요. 그래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하늘의 심판대의 기준으로 봐도 무죄하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세운 지상의 심판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뒤집어쓰셨어요. 완전 낮아지고 낮아진 상태에서 하늘의 심판대보다 더 낮은 심판대에서 죄인으로 취급 당하셨어요. 죄가 있다고 취급하는 것을 두 글자로 정죄라고 하는데요.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낮고 낮은 지상의 심판대에서 정죄 받으셨기 때문에 뼛속까지 죄인인 우리가 저 높은 하늘의 심판대에서 무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거예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지상의 심판대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뒤집어쓰셨습니다.
그럼 본디오 빌라도가 잘했을까요? ‘본디오 빌라도가 재판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셔서 우리가 구원 받았으니까 본디오 빌라도는 착하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건 아니죠. 오늘 본문이 분명히 말하죠. 본디오 빌라도는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해하고 그렇게 한게 아니라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그랬다고요. 잘한게 아니죠. 오히려 자기 정치 생명을 위해 무고한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든 악랄한 정치가입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악랄한 정치인의 정치행위조차 예수님의 구원사역에 필요한 무대장치로 쓰신다는 거예요. 사도신경 첫 번째 시간에 사회 질서도 하나님이 다 만드셨다고 한 거 이야기 들었을 거예요. 사람이 그 사회질서를 나쁘게 써도 하나님의 계획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거예요.
(증명) 당시에 명절이 되면 죄수 한 사람을 풀어주는 그런 전례가 있어요. 우리나라도 특별 사면이 있어서 이게 맞다 아니다 논란이 있죠. 예수님이 재판 받으실 때 특별 사면을 받기로 한 사람이 있었어요. 바라바라는 사람이에요.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을 저지른 사람인데 지금으로 치면 유대인의 독립을 꿈꾸는 정치사범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쨌든 빌라도가 백성들한테 물어봅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내가 볼 때는 죄가 없고 유월절에는 죄수 한 명을 풀어줄 수 있잖아 그니까 내가 예수를 풀어주면 되겠니? 바라바를 풀어주면 되겠니?’ 유대인들이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래서 본디오 빌라도는 죄를 지어서 잡혔던 바라바를 풀어주고 죄가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 사형에 처합니다.
이거는 굉장히 상징적인 이야기예요. 예수님이 아니었으면 누가 십자가에서 죽었을까요? 바라바가 십자가에서 죽었겠죠? 바라바가 십자가에서 죽는 건 당연한 판결이예요. 지상의 심판대의 기준으로 봐도 바라바는 벌 받을 죄인이예요. 그런데 천국의 기준으로 봤을 때 털끝만큼의 죄도 없으신 예수님이 바라바 대신에 십자가형에 처하셨어요. 딱 이 이야기 안에서 보면 예수님이 바라바의 형벌을 뒤집어 쓴 것처럼 보여요.
이 바라바는 누구일까요? 이 바라바는 여기 있는 저와 여러분입니다. 상징적인 이야기예요. 우리는 지상의 심판대의 기준으로 봐도 완전하지 않을 수 있어요. 이 세상의 도덕 기준에서 볼 때도 완전하지 않을 수 있어요. 이런 우리가 천상의 심판대에 서서 재판을 받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천국에 발가락 하나도 못 내 밀어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천상의 기준으로 볼 때 흠 없고 완전한 분인데 지상의 심판대에서 죄인이 되셔서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뒤집어쓰신 거예요. 그래서 지상의 심판대에서도 완전하지 않을 우리가 천상의 심판대에서 완전무결한 의인이 됩니다. 예수님의 의로움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었어요.
(적용)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죄인이었지만 의인이 된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잘 들어보세요. 죄인으로 살아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의로운 사람으로 살아라는 것도 아니에요. 죄인이었다가 의인이 된 사람으로 살아야 해요. 무슨 말이냐면요. 내가 지금은 의인으로 사는데, 그건 내가 잘나서 그런 게 아니에요. 나도 한 때는 죄인이었어요. 내가 지었던 죄로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으면 다 끝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나 대신 심판 받으셔서 지금은 의인이에요. 내 능력으로 된 게 아니니까 너무 감사한 거예요. 그래서 나는 그게 감사해서 다시는 죄인처럼 살지 않도록, 죄 짓지 않도록 노력하며 살아야 해요.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나에게 죄를 짓고 나쁜 짓을 하면 ‘죄인이라서 저렇구나’하고 생각하는 거예요. 물론 나에게 피해가 오면 화도 나고 나를 보호해야 하지만 저 사람이 나에게 나쁜 짓을 하는 이유는 죄인이라서 그렇구나 저 사람도 복음을 알았으면 저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는 거예요.
(전환문장) 그 다음으로 사도 신경 네 번째 문장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감당하셨다는 거예요.
본론2 – 십자가에서 저주 받으신 예수님
(설명)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셨는데, 혹시 예수님께서 저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으세요? 제가 어려운 질문 하는 거 아니죠. 들어본 적이 있어요? 없어요? 자 구체적으로 어디에 그런 말이 있나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여러분 성경 찾을 줄 아니까 안 찾으셔도 되고요. 제가 읽어 드릴 테니까 잘 들어주세요. 갈라디아서 3장 13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여기서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 받았다고 했어요. 그리고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 하셨다고 합니다. 속량을 값을 치렀다는 뜻이거든요. 그니까 원래 우리가 율법의 저주를 받아야 하는데, 누가 대신 받았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어요. 예수님이 율법의 저주를 받았다는 증거가 뭐예요. 바로 십자가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나오듯이 나무에 달린 사람은 저주 아래에 있는 거예요. 신명기 21장 23절에 나옵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이 모든 정보를 다 종합해봅시다. 하나님이 율법이라는 것을 정하셨어요. 그런데 이 율법을 어기면 죄예요. 죄는 지으면 무조건 심판 받습니다. 율법을 100% 지켜야 죄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율법을 99.85% 정도 지키면 죄가 있는 걸까요? 없는 걸까요? 죄가 있는 거예요. 좀 지저분하고 유치한 비유를 들어볼게요. 생수병이 있어요. 제가 아주 깨끗한 변기에 가서 맑고 맑은 변기 물을 티스푼으로 떠서 넣었어요. 자 이 생수병에 있는 물은 깨끗합니까? 더럽습니까? 더럽단 말이에요. 변기에서 떠온 물을 생수에 넣었잖아요. 율법의 저주는 이런 거예요. 조금이라도 율법을 어기면 바로 심판 율법을 도저히 다 지킬 수가 없어요. 이게 율법의 저주입니다. 누구도 이 저주를 피할 수 없습니다. 이 저주는 심판을 부릅니다. 영원한 지옥형벌입니다. 율법의 장벽을 뛰어넘을 방법이 없어서 지옥의 늪으로 빠질 수밖에 없어요.
이 율법의 저주를 해결할 방법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 누구의 십자가도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천상의 기준으로 봐도 완전무결한 분입니다. 그 분이 십자가에 달리셨어요. 아까 이야기한대로 신명기 21장 23절에 보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 거예요. 예수님은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저주 받을 수 있는 조건을 완성하셨어요.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하신 율법, 그 율법을 지키지 못한 자들에게 필연적으로 쏟아지는 저주, 그 저주를 십자가에서 받아내셨습니다. 그 저주의 절정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절규하시잖아요. 하나님께서 여기 있는 우리를 버리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을 저주하시고 예수님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은 엄청난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셨다는 것은 동시에 예수님이 그 저주를 해결하신 것을 말씀하는 거예요. 그 저주를 이기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거예요. 예수님이 그 저주를 해결하셨다는 증거는 바로 부활이죠. 부활은 다음 주에 살펴볼 거예요. 어쨌든 예수님은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저주 받으시고 또한 그 저주를 이겨내셨습니다.
(적용) 우리를 대신해서 율법의 저주를 극복하신 분이 계시기 때문에 율법이 우리에게 결코 저주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지킴으로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율법대의 가르침을 지키면서 사는 것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리게 됩니다. 그 율법의 가르침은 결국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우리를 안내합니다. 율법의 가르침을 간단하게 잘 정리한 것이 십계명인데 이것도 언젠가는 설교할 거예요. 사도신경 끝나고 주기도문하고 십계명합니다. 몇 년 뒤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 때 잘 듣도록 합시다. 어쨌든 우리의 죄 때문에 율법이 저주를 뱉어낼 수 밖에 없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율법의 저주를 십자가에서 받아내셨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이 주는 좋은 것들만 누릴 수 있게 되었어요.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복어를 먹을 때 그걸 저 같은 일반 사람이 요리해서 먹으면 어떻게 될까요? 복어에는 테트로도톡신이라는 독이 있어서 그냥 먹으면 큰일 납니다. 복어 한 마리 독으로 성인 33명이 죽을 수 있어요. 복어 요리는 맛있고 몸에도 좋지만 안에 독이 있어서 일반 사람이 요리하면 안 됩니다. 아무나 그 독을 제거할 수 없어요. 하지만 복어를 요리할 수 있는 전문가가 있으면 복어요리를 먹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도 비슷한 이유예요. 모든 사람이 지켜야 구원받을 수 있는 율법은 좋은 것이지만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그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그 율법이 저주가 되었어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율법의 저주를 십자가에서 제거하셨기 때문에 구원 받는 건 물론이고, 전문가가 손질한 복어 요리를 먹듯이 저주를 제거한 율법의 유익함을 얻을 수 있어요. 율법의 유익함은 우리가 율법을 통해서 예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율법의 저주를 완전히 극복하고 율법을 통해 감사하며 예수님을 닮아가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결론
오늘은 사도신경 네 번째 문장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를 통해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상의 재판에서 봤을 때도 죄가 하나도 없으신데 지상의 심판대에서 우리 대신 정죄 받았습니다. 죄 있는 죄인으로 취급당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시고 십자가에서 심판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감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대로 살아가지만 율법의 저주를 받지 않고 율법을 통해 더욱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가게 되었습니다. 이번 한 주간도 우리 대신 정죄 받으신 예수님, 율법의 저주를 해결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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