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사망을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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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몸이 다시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 2. 죽음 3. 부활 4. 영생 5. 신앙은 사망을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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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모두가 기다렸던 날이지 않을까 싶어요. 사도신경 12번째 시간이자 마지막 날이에요.
진짜 큰 산을 등반하느라 고생 많았어요. 제가 부족해서 제대로 나누지 못한 부분도 있고 또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도 있었겠지만, 사도신경의 의미를 살펴보았다는 것 자체가 참 은혜이고 감사한 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매주하는 이 고백이 단순한 문장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의 마음과 믿음을 진심으로 고백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래요. 하나님을 향한 저와 여러분의 고백은 과거에 경험했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아니라,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고백이라는 것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오늘은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이에요.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영생에 대한 이야기에요. 또 이해할 수 없는 그래서 치열하게 답을 찾아가야 하는 내용들이에요. 죽음, 부활 그리고 영생에 대해 하나씩 살펴 보면서 우리의 고백을 오늘 마무리 하도록 할게요.

죽음

우리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에요. 아니 사실은 죽지 않는 존재로 만들어졌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의 공급이 원활하다 못해 넘쳤거든요. 하나님에게서 오는 은혜가 넘치고 또 흘러 넘쳐서 우리는 죽음을 모르는 존재들로 만들어졌어요.
하나님을 만나고 내려왔던 모세의 얼굴에 빛이 너무 강해서, 사람들이 쳐다도 볼 수 없었다고 성경은 말해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으로 인해 충만한 사람은 바라볼 수도 없는 빛이 가득 해 진다는 것이죠.
우리는 죽을 수 없는, 아니 죽음은 우리와 상관없는 것이었어요.
인간흙으로 빚어진 육체와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신 영이 결합된 존재에요. 죽음은 이 영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을 말해요. 이 때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드리지 않은 자는 지옥을, 받아드린 자는 천국을 가게 되고 몸은 재료인 흙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우리 죽으면 그대로 끝일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 뿐만 아니라 세상의 사람들도 죽음 이후에 무엇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다양한 사후 세계에 대한 자신들만의 생각들을 내놓았어요. 이 것의 의미는,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는지 정확히 알수는 없으나 어렴풋이 있지 않을까? 하는 무의식적인 생각들을 갖고 있다는 것이죠.
왜 사후 세계에 대한 고민과 생각들을 갖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잃어버렸으나, 죄로 인해 끊어졌으나 우리 안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기 때문이에요. 세상 사람들은 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또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은 같이 묻어버리는 순장을 실행하기도 했고, 사람 모양의 인형들을 만들어 같이 매장하기도 했어요.
하나님을 아는 사람도 그리고 모르는 사람도 죽음 이후에 무엇인가 있다! 라고 생각한 것이죠.

몸의 부활

성경은 우리에게 죽음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어요. 천국과 지옥에 관한 부분도 있지만 예수님처럼 우리가 다시 부활한다. 다시 살아난다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말해요.
혹시 여러분. 부활하는 것에 대한 상상을 해본 적 있나요? 우리가 죽었다고 부활한다고 하면 어떤 모습 일 것 같아요?
여러분 부활은요. 그냥 막연하게 죽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는 것을 말하지 않아요.
에스겔을 읽다보면 마른 뼈 환상이 등장하는데요.
그것을 보면 흩뿌려져 있던 마른 뼈들이 일어나요.
뼈다귀들이 덜덜덜 떨리다가 갑자기 막 날라 와서 조각들이 맞춰지고 사람의 모습을 갖추고 끝나지 않아요.
모양을 갖추고 나면요.
그 위에 혈관과 근육이 붙기 시작해요. 그리고 피가 돌아요. 심장이 다시 뛰게 되는 것이죠.
정말 다시 살아나는 것이죠.
죽으셨다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요.
부활의 모습을 어느정도 유추할 수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에스겔 마른뼈 환상과는 다른게, 완전히 썩어져서 뼈만 남았던 것은 아니었고, 몸에 살과 뼈는 남아 있었어요.
동굴이 서늘했기 때문에 부패도가 심하지는 않았을 수 있겠다 싶겠지만, 똑같이 삼일만에 다시 살아났던 나사로의 몸에서 냄새가 났던 것처럼 예수님에게도 부패가 진행되어 냄새가 났을거에요.
다시 살아나서 제자들과 사람들 앞에 나타난 예수님은요. 죽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어요. 먹을 것도 드실 수 있었어요.
하지만 못이 박히고 창에 찔린 자국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어요. 찢어지고 뚫려버린 모습이지만요.
예수님의 모습은 거룩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어요.
아까 말한 것처럼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내려왔을 때 그의 몸에서 광채가 났던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여전히 찢어지고 뚫려버린 모습이었다 해도, 거룩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을 거에요.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이러한 질문을 던져야 해요.
“그럼 나는 어떤 모습으로 부활하는 것인가? 거룩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부활하긴 할텐데, 언제의 나의 모습을 보일 것인가?”
이것에 대해 질문을 던졌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들이 내린 답이에요.
가장 젊고 예쁘고 멋있을 때의 몸으로 부활한다!
왜 요즘 바디 프로필 많이 찍잖아요. 나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극한까지 운동하고 굶고 식단 조절 하잖아요. 그 날을 위해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극한까지 몰아가죠. 저 사람들의 대답처럼 ‘가장 젊고 예쁘고 멋있을 때의 몸으로 부활’하는 것이면 우리 모두는 지금부터 운동해서 바프를 찍어야 해요.
정말로 가장 젊고 예쁘고 멋있을 때의 몸으로 부활한다면, 우리는 내 생각에 가장 아름답고 멋졌던 때가 언제일까? 생각하며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면서 지금의 나에게 집중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에요.
사람마다 나의 가장 멋있고 좋은 기준이 다르죠. 그렇기 때문에 ‘가장 젊고 예쁘고 멋있을 때의 몸으로 부활’이라는 답은 틀렸어요.
피터 럭크만 이라는 이단이 있는데요. 이 사람은 아주 자신있게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는 33살의 모습으로 부활한다!” “내 생각에 천사들은 33살이다!”라는 궤변과 근거 없는 말을 했는데요.
그가 33살이라는 나이에 꽂힌 이유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나이가 33살이기 때문이에요. 진짜 단순하죠. 정말 어이없는 대답인 것같아요.
또 여러 이야기들이 있지만 의미 없는 이야기들이에요.
여러분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부활하게 될까요?
사실 이 질문은 맞는 질문이 아니에요. “나는 어떤 모습으로 부활할까?”라는 질문이 아니라, “몸의 부활은 무슨 뜻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옳은 답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해줘요.
여러분 몸의 부활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솔직히 우리 죽으면 우리의 영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되잖아요. 아픔도 슬픔도 없는 진정한 기쁨이 가득한 천국이라는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게 될텐데, 왜 굳이 몸의 부활을 경험해야 하는 것일까요?
왜 몸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성경은 하고 있을까요?
이 것을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해요.
굳이 우리에게 몸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요.
우리의 신앙.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은 육신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우리의 이야기, 하나님의 구속의 이야기는 한번 지나가고 마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거든요.
우리가 육신으로 살아가면서 죄만 짓는 것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도 하고 또 믿음으로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심고 뿌리기도 해요.
죄인이라는 육신으로 살아가는 우리이지만, 육신으로 심은 것들이, 정말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 그 신앙 가운데 심은 것이라면요.
우리는 반드시 신령한 몸으로 다 부활하게 되어요. 예수님께서 부활 하셨을 때 보여주셨던 그 거룩하고 아름다운 또 경이로운 모습처럼요.
“나는 어떤 모습. 몇살의 나이의 몸으로 부활할까?”가 아니라,
“어떤 모습으로 살아 나던지 거룩하고 신령한 모습. 경이로운 모습으로 내가 살아 날 것”이다. 라고 우리는 믿고 살아야 해요.
여러분이 믿음으로 심고 뿌린 것은 결코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거든요. 영으로 뿌린 열매는 반드시 영적인 열매를 맺어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과 공부가 이해가 되지 않아도, 사역이 정말 힘들고 지쳐도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뿌린 영적인 뿌림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무조건 어떤 형태이든지 열매를 맺어요. 그 열매를 맺는 모습. 그 열매를 뿌리던 모습으로 우리의 몸은 부활해서 거룩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갖게 될거에요.
몸의 부활은 ‘내 인생에 리즈 시절로의 부활’이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갖게 될거에요.

영생

죽음과 몸의 부활에 대해 나누었어요. 마지막 영생이에요. 어쩌면 죽음, 부활 보다도 더 와닿지 않는 부분이 영생일 수 있어요.
유한한 인생. 끝이 있는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이기 때문에 “끝이 없다”라는 개념이 공감이 되지 않는 것이죠. 그런데 이 ‘영생’은요. 먼 미래의 이야기가 절대 아니에요. 현실감 없는 어떤 추상적인 개념이 절대 아니에요.
영생은 다른 말로 ‘구원’으로 바꾸어 쓸 수 있거든요.
요한복음 3장 36절이에요. 함께 읽어볼까요?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아멘”
여기를 보면 영생이라는 단어가 2번 등장 하는데, 이 영생은 구원과 같은 개념이에요. 그러니까 영생은 우리가 죽은 이후 그리고 부활하고 나서야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영적인 구원이 아니에요.
영생은 바로 지금 이 세상. 현실을 살아가면서 누리는 축복과 능력을 이야기 해요.
다시 말해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고 성령님과 함께 살아가며 누리고 있는 모든 삶에서의 은혜와 기쁨은 영생의 삶과 같다는 이야기에요.
영생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일어나게 되는 그 삶에 대해 이야기 해요.
오늘 본문은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이야기에요.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 지났어요. 그동안 부패가 진행되었고, 냄새가 나기 시작했어요. 어떤 말로도 방어할 수 없는 정말 말 그대로 완벽하게 죽었어요. 나사로가 죽은 뒤 예수님은 그 소식을 듣고 찾아오세요. 죽음 앞에 좌절하고 있는 마리아와 마르다를 찾아오신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세요.
23절이에요.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이 말씀에 대한 마르다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어요. “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압니다.”
“지금이 아닌 나중에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을 내가 압니다.”
“그런데 그 것이 지금 내 앞에 닥쳐온 이 사망의 절망에는 아무런 대답이 되지 못합니다.”였어요.
마르다의 이러한 대답은 우리의 모습과도 같아요.
마르다도 우리도 믿음이 있어요.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고 또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그러한 믿음이 있어요.
그런데 자기 생각대로 열심을 내어 살고 또 실패하고 넘어져요. 마르다가 그랬어요.
심지어 예수님을 책망하기도 했어요.
“아 예수님! 나 바빠 죽겠는데, 마리아는 예수님 말만 듣고 있잖아요. 쟤 좀 어떻게 해봐요!!”
이거 딱 우리 모습이에요. 내 힘으로 뭐하다가 안될 때, 기도하는데 들어주지 않으실 때 우리는 불평하죠. 막 따지기도 하죠.
마르다도 우리도 믿음이 있어요. 때론 우리의 결단과 헌신 등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을 감동시킬 때도 있어요. 그리고 내 스스로의 의와 생각으로 넘어지기도 해요.
“지금이 아닌 나중에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을 내가 압니다.”
“그런데 그 것이 지금 내 앞에 닥쳐온 이 사망의 절망에는 아무런 대답이 되지 못합니다.”라는 이 대답은 우리가 예수님을 잊고 살아가면서, 그 분에게 던지는 말과 같아요.
“부활이. 영생이 내 앞에 닥쳐온 이 사망의 절망을 해결하지 못합니다!”라는 마르다의 질문에 예수님은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세요.
25-26절이에요. 우리 성경을 보고 함께 읽을까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지막에 뭐라고 하시죠?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하시죠.
이에 대한 마르다의 대답은요.
“아 네. 그럼요. 주는 그리스도이고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잖아요.” 심드렁해요.
예수님이 늦게 오셔서 오빠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늦은 것도 속상한데 갑자기 다시 살아난다고 하니 마르다의 마음이 편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있으니까 “뭔 소리에요!”라고 무례하게 하지 않고 “아 네”라고 하고 있어요.
그녀의 심드렁한 대답을 들은 예수님께서 이제 마을로 들어가요. 그리고 나사로의 무덤으로 곧장 걸어가세요.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향해 외치세요.
사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것을 3번이나 말씀하셨어요.
11장 4절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다."
11장 11절 “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간다.”
11장 23절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을 주목하지도 그리고 기억하지도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고 우리는 사망 가운데 잡혀 살아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이에요. 예수님께서 분명히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지만,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본적도 들은적도 없기 때문에 그 의미가 크게 와닿지 않았던 것이에요.
그리고 ‘사망’ ‘영원한 헤어짐’이라는 그 감정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를 잡았어요. 예수님의 그 어떠한 말씀도 들리지 않는 것은 당연해요.
예수님께서 죽음을 부정하기 위해 다시 살 것이다! 라고 말씀 하신 것이 아니에요. 나사로의 죽음을 믿을 수 없어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라고 외치셨던 예수님이지만, 나사로 무덤 앞에서 죽은 나사로를 보며 눈물을 흘리며 우시거든요. 다시 살아날 것을 아셨고, 하나님의 영광이 될 것을 아셨지만 죽음 자체가 너무 슬프셨던거에요.
“나사로야 나오라!”라는 예수님의 외침에 나사로가 정말 무덤 밖으로 나왔어요. 죽었던 그 모습 그대로. 죽은 사람에게 입히는 수의를 입은 체로 걸어나왔어요.
이 사건은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어요. 파장이 엄청났어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이 사건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기로 마음 먹기까지 했거든요.
나사로의 부활은 “사망과 영원한 헤어짐”이란 감정에 잡혀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절망하고 무너져내려 슬퍼하고 있던 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어요. 그 충격과 놀라운 기적 속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야가 아닐까. 하는 마음과 함께 그 분을 믿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은 기적에만 집중해서 예수님을 믿기 시작해요.
예수님은 왜 나사로를 살리셨을까요? 죽음까지 다스리는 엄청난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일까요?
아니에요. 예수님이 나사로 부활 사건을 통해 그들에게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정말 강력한 메시지가 있어요.
“신앙은 사망을 이긴다”라는 것이에요. 신앙인은 사망의 슬픔과 절망을 이겨야 하며, 이길 수 있다! 는 것을 전하고자 하셨어요.
우리 11장 25-26절을 다시 읽어볼까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여러분 이 문장 잘보면 사실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아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다.”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죽어도 살 것이다. 라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죠. 이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쉬고)
이 말씀에서 말하는 죽음은 육적인 죽음만 말하지 않아요. 사망은 영적인 문제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에요.
즉. 믿음. 신앙은 사망을 이긴다. 다시 살아난 기적에 집중하고 놀라고 있는 그들과 우리가 놓쳐버렸던 메시지에요.
“신앙은 사망을 이긴다”
사랑하는 가온누리 청년부 여러분. 영생이라는 개념은 추상적이고 또 이해할 수 없는 어떠한 관념이 아니에요. 지금 나의 삶과 동떨어진 절대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영생은 구원이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은혜와 위로 그리고 회복을 의미해요.
예수님은 나사로 부활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세요.
“사망의 한계를 뛰어 넘으라”
이 길이 아무리 좁고 힘들어도.
내 안에 있는 다른 법이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고 넘어지고 죄인으로 만들어가고
너무나 빠르게 끝날 것 같은 허무함과 허탈함이 계속해서 몰려 들어와도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와 영원히 사는 삶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
우리가 걷는 이 삶이 힘들고 어렵고 또 좁아 보여도. 한발을 내딛는 것 조차 힘든 순간이라 해도
세상은 절대 우리를 건드릴 수 없으며, 죽어도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다시 산다.
이 것을 기억하고 믿으며 살라.
“사망의 한계를 뛰어 넘으라.” 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셔요.
여러분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어요.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우리가 창조 때의 모습을 회복하기 전까지 우린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살리시겠다 말씀하셨어요.
영적으로 영원히 하나님과 사는 것을 넘어 몸의 부활. 거룩하고 신비롭고 또 아름다운 그 모습을 회복시켜 주겠다.
몸의 부활 이후에는 지금과는 다른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현실에 집중하지 마라.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 나를 통해 구원을 얻은 것. 그것이 영생의 시작이었다. 지금도 죽어서도 너는 나와 함께 할 것이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저와 여러분의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고백이에요.
여러분 사도신경은요.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어떠한 문장들이 아니에요. 또 그렇게 살아가라고 압박하는 문장들이 아니에요.
바르게 그리고 아름답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돕는 고백이에요.
사도신경 어떻게 마무리 하죠? “아멘”이라고 하죠. 아멘의 뜻은 “진실로 그러하다.”에요. “진짜 맞습니다. 동의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매주 하는 신앙의 고백. 사도신경우리에게 신앙 고백은 반복해서 훈련하는 것임을 알려주고 있었어요.
신앙 갖고 끝나는 것이 아닌,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을 향해 바르고 올바르게 걸어가고 있는지 나의 삶을 계속해서 돌아보는 고백이에요.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사도신경처럼 “아멘”으로 끝이 나요.
하나님께서 책임지는 인생임을 믿습니다.
나는 부족하고 매일 넘어지고 쓰러지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이런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내가 믿습니다.
내 안에 살아계셔서 삶을 바꾸고 변화시키고, 두려움을 희망과 소망으로 바꾸어가시는 성령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신앙은 나를 향한 위협과 낙심, 고난 그리고 사망을 이깁니다.
아멘. 진실로 그러합니다. 진짜 맞습니다. 동의합니다. 그렇게 살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었어요. 고백이에요. 고백이어야 해요.
나를 향한 위협과 낙심 고난 그리고 사망을 이긴다! 이 메시지저와 여러분에게 새겨지고 남아 하루를 살아내는 힘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또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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