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717 저녁] 번제를 통해 배우는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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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11 홀로 한 분 하나님께
본문 레 1:1-17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도다 우리 하나님이 오사 잠잠하지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삼키는 불이 있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판결하시려고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라 하시도다 하늘이 그의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 아멘.
자비하신 아버지 하나님, 이 시간 주의 성도들을 예배의 자리로 불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주께서 우리를 불러주시지 않으면 그 누가 하나님 앞에 능히 설 수 있겠습니까? 도무지 주 앞에 나아갈 자격도 없고, 무능하며, 부족한 저희를 불러 주시고 주의 백성 삼아주시니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 가운데 좌정하시어 주의 백성들이 올려드리는 경배와 찬송을 받아주시오며, 우리의 예배 가운데 온전히 영광을 받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기독교는 예배와 결코 뗄 수 없는 종교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들을 주일에 중단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데에 사용한다. 왜냐하면 예배는 곧 우리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예배가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예배에 대한 지식이 많이 부족한 것도 사실일 것이다. 따라서 오늘은 구약의 제사 중, 번제에 대한 규례를 살펴보면서 오늘날 우리의 예배에 대한 교훈을 말씀드리려 한다. 이를 통해 예배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를 진단해보고, 바른 방향으로 회복하여 앞으로 드리는 모든 우리의 예배들이 하나님 앞에 바른 예배로 올려지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란다. 총 3가지를 말씀드릴 것이다.
첫번째로, 예배는 내가 직접 참여하는 자리이다. 너무 뻔한 이야기이지만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예배는 여러분 개개인이 직접 참여하는 자리이다. 이 말씀을 들을 때, 이런 생각을 하실지 모르겠다. ‘그럼 내가 내 발로 예배당에 나아왔으니 내가 직접 참여하는 것이지’ 하고 말이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 예배는 설교를 하는 목사나 대표기도를 하신 집사님이나 오늘 예배전부터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린 찬양팀같이 순서를 맡은 분들만 참여하는 자리가 아니다. 이 자리의 모든 예배에 참석한 회중들이 각기 맡겨진 직분과 역할에 맡게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리이다. 여러분이 구경꾼이나 관람객이 되어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를 갈망하고,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해 내리워주실 복들을 기대하는 시간이다. 예배는 구경하는 자리가 아니다. 여러분이 주도적으로 예배의 자리에 앉아 예배에 참여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이 오늘 본문에서도 아주 잘 나타나고 있다. 3절부터 9절까지는 소를 번제제물로 하나님께 드릴 때에 관한 내용인데, 이 부분만 예를 들어서 살펴보자. 말씀을 자세하게 보라. 이 본문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등장한다. 하나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제사에 관한 부분들을 맡아 섬기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부류가 있다. 이 부류는 2절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즉, 하나님께 번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찾아온 봉헌자들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배자들이다. 그렇다면 3-9절까지 제사에 참여하는 두 부류의 역할을 살펴볼 것인데, 3절부터 순서대로 살펴보자. 먼저 소를 드리기 위해 제물을 선별하는 행위, 즉 흠이 없는 제물을 선별하는 행위는 예배자가 하는가? 아니면 제사장이 하는가? 예배자이다. 선별된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는 행위는 예배자가 하는가? 아니면 제사장이 하는가? 예배자이다. 여호와 앞에서 수송아지를 잡는다 라고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목을 자르는 행위이다. 이 행위는 예배자가 하는가? 아니면 제사장이 하는가? 예배자이다. 그럼 도축된 수송아지의 피를 회막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리는 행위는 예배자가 하는가? 제사장이 하는가? 제사장이다. 도축된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는 행위는 예배자가 하는가? 아니면 제사장이 하는가? 예배자이다. 제단 위에 불을 붙이고 불 위에 나무를 깔아두는 행위는 예배자가 하는가? 아니면 제사장이 하는가? 제사장이다. 도축된 제물을 불 위에 올려놓는 행위는 예배자가 하는가? 아니면 제사장이 하는가? 제사장이다.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어야 하는 이유는 배설물이 지나가는 내장과 정강이는 부정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를 정하게 물로 씻는 행위는 예배자가 하는가? 아니면 제사장이 하는가? 제사장이다.
3-9절까지 예배자와 제사장의 역할에 대한 차이가 드러난다. 이는 소를 번제물로 드릴 때에나 양이나 염소를 드릴 때나, 비둘기를 드릴때나 동일하게 차이가 난다. 단지 역할의 측면에서 예배에의 참여도를 살펴보면, 제사장은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배에 관한 부분에 대해서만 봉사할 뿐이지, 그 외에 다른 모든 부분들에서는 예배자가 직접 다 준비하고 안수하고 죽이고 그 제물이 번제단 위에서 잘 탈 수 있도록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뜬다. 포를 뜬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번제단 위에서 잘 탈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예배에 있어서 제사장의 역할 분명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드릴 거룩한 제사에 관한 봉사를 맡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제사장 못지 않게 수많은 것들을 준비해야 하고, 직접 행해야 하며, 적극적으로 임해야 하는 수많은 일들을 예배자가 직접 해야 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요점은 예배가 단지 목사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러분들께서 이 자리에 앉아있다고 해서 수동적이 되어서는 안되고 주도적이 되라는 것이다.
주보 다 받으셨는가? 주보를 보면 하나의 공예배를 드리는데 수많은 순서들이 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거나, 찬송을 부르거나, 성경 봉독을 하거나, 대표기도를 하거나, 설교시간 그리고 헌금시간, 축도의 시간등이 있다. 이 순서들은 예배 인도자의 인도 하에 질서 있게 드려지는 공적인 예배이다. 오늘 여러분이 드린 오전예배 시간들을 다시한번 생각해 보라. 여러분은 예배를 어떻게 드리셨는가? 기독교와 예배가 뗄 수 없을만큼 그렇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익히 들어왔고 경험하고 있는데, 과연 여러분은 이 예배를 위해 예배보다 조금 전에 미리 와서 기도로 준비함으로 내가 최상의 예배, 최고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기를 간구하셨는가? 세상의 잡다한 일들, 생각들, 유흥거리들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제하여 버리고, 내가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 삼위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준비하셨는가?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는 마음으로 여러분의 신앙을 사도신경으로 고백하셨는가? 삼위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그 구원의 감격에 기뻐하며 찬송하셨는가? ‘아 인도자 노래 잘하네’ 라는 마음으로,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앉아있진 않았는가? 앞에서 찬송을 인도할 때 너무나도 잘 보인다. 주변에서 찬송을 하던 말던, 그저 구경꾼으로 앉아 계신 분들 잘 보인다. 대표기도자가 우리를 대표하여 기도할 때 그 기도의 한절한절이 나의 기도가 되어 하나님께 열납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참여하셨는가? 성경을 함께 봉독할 때 이 말씀으로 나에게 어떤 말씀을 주실런지 사모하는 마음으로 읽으셨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선포되는 말씀이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적극적이고도 경건하게 받고 있는가? 봉헌시간은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올려드리고, 우리의 시간을 올려드리고, 우리의 모든 것들을 올려드리는 시간이다. 이 시간에 감사함으로 임하기는 커녕 혹 인색함으로 참여하지는 않는가? 축도 시간은 축복기도가 아니라, 강복선언이다. 하나님께서 선언하시는 복을 받는 시간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그대로 순종할 시에 복이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심판이 있으리라는 것을 선포하는 시간이다. 과연 축도 시간에 우리는 들은 바 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삼위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겠다는 마음으로 임하는가? 아니면 아 이제 예배가 끝났다 하는 생각으로 앉아 계셨는가?
요즘은 티비만 틀면 유명교회의 목사들의 설교들을 쉽게 접한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자리가 너무나도 많아졌다. 물론 이것이 감사의 제목이 될 수 있지만, 우리에게 안좋은 영향을 주기도 한다. 유명 목사들의 설교가 은혜가 되는 것 같아도, 그 설교는 여러분들을 향한 설교가 아니다. 그 교회 성도들을 향한 설교이다. 여러분의 고민, 여러분의 처한 어려움,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이 여러분이 소속된 교회의 목사 아니겠는가? 여러분들은 여러분이 소속된 교회에 말씀봉사자가 없어서 다른 교회 목사들의 설교를 듣는가?
상황이 이렇다보니 공예배의 중요성은 점점 훼손되어간다. 내가 굳이 공예배에서 성공하지 못해도 다른 수많은 말씀을 들을 자리가 있으니 말이다. 공예배의 소중함도 사라지고, 공예배의 역할도 약화되고, 그러다보니 굳이 내가 공예배에서 최선의, 최고의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더이상 예배를 준비하지 않는다. 더이상 예배를 사모하지 않는다. 예배가 나의 주중 삶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예배가 나의 기쁨이 되지 않는다. 결국 예배의 관람객, 예배의 구경꾼이 되어버린다. 여러분, 이것이 과연 합당한가? 결코 합당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과연 그러한 준비되지 않은 예배, 정성이 없는 예배, 난잡한 예배를 받으시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러 왔다 하면서도 아무런 준비를 안할 수 있는가?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라. 예배는 공연이 아니다. 예배는 영화가 아니다. 예배는 여러분이 직접 참여하는 자리이다. 봉헌자가 직접 흠이 없는 제물을 준비하고 고르며, 그 제물위에 안수하고, 그 제물의 목을 잘라야하며, 그 가죽을 벗겨야 하고, 그 제물이 잘 탈수 있도록 한결 한결 포를 떠야 한다. 예배에 임하는 여러분들의 마음과 자세가 이와 같기를 바란다. 예배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적극적으로 임하라.
두번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택하신 백성들이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기를 바라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배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어야 한다. 계속해서 너무 뻔한 말씀을 드리는 것 같다. 그러나 첫번째와 마찬가지로 이 또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여러분, 꼭 기억하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자리는 특정한 사람들만을 위한 자리가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모든 백성들이 차별없이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길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대목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 이는 1장 전체를 통해 살펴보아야 하는데, 1-2절에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자 하는 자, 즉 제사에 참여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린다’ 하는 것은 오늘날 헌금과는 조금 다른 의미이다. 왜냐하면 당시 구약시대에는 신약시대처럼 예배가 아니라 레위기에 나타나는 5가지의 제사,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와 속건제와 속죄제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즉 예물을 드리는 것은 곧 예배를 가리킨다. 그리고 예물을 위한 제물은 반드시 들짐승이 아닌 가축이어야 한다. 한글성경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은 번역의 문제이지만, 여기서 나타나는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는, 그냥 길을 가다가 포획해서 잡아온 들짐승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기르는 용도의 가축을 말한다. 이는 무분별하고도 무가치한 제물을 하나님께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반드시 귀하게 길러진 것이어야 하고, 또 그 중에 흠이나 점이 없는, 아주 정한 상태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은 하나님께 드릴 제물에 대해 3가지 유형으로 언급한다. 첫째는 수송아지이다. 당시의 고대근동사회에서 암컷짐승보다 수컷짐승이 훨씬 더 귀했다고 한다. 특별히 송아지는 예나 지금이나 아주 귀한 가축이다. 귀하다는 것은 그만큼 가격이 비싸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 나아온 예배자는 할 수 있는 최선의 제물을 골라 드려야 하는데, 그 첫번째는 수송아지였다. 그러나 형편상 수송아지를 준비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가축 떼의 양이나 염소로도 드릴 수 있게 제정하신다. 그러나 정말 형편이 어려워서 양이나 염소도 준비할 수 없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로도 제사를 드릴 수 있게 제정하셨다. 산비둘기라 해서 야생의 비둘기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야생의 짐승을 제물로 드리라고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이 가진 소유에 비례하여 가장 좋은 것으로, 가장 최선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도록 요구하시는 것은, 이것이 단지 가진 소유에 비례하여 좋은 것을 드리라는 식의 의미가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있는 그 누구라도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라는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모든 권속들이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기를 바라신다. 이사야55장 말씀에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배의 자리로 초청하시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케 하시기 위함이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중요한 예배의 자리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을 초청하시고 불러 모으시는데, 혹여나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는 것을 막고 있지는 않은지? 특별히 중고등, 대학교 자녀들을 두신 부모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들으시길 바란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언약백성들을 예배의 자리로 초청하시는데 혹 여러분이 이를 막고 있진 않으신가? 바르게 예배를 지도하며 하나님 섬기는 법을 가르쳐주어야 할 신앙의 선배인 저와 여러분이 오히려 오히려 학원과 공부에 자녀들을 내몰고 있지는 않은가? 또한 교회의 모든 성도 여러분, 심하게 염색을 하거나 복장이 불량한 젊은 세대들을 향하여, 불편한 시선으로 흘겨보고, 혀를 참으로서 하나님도 하시지 않은 차별을 만들어 내고 있지는 않으시는가? 하나님께서 귀한 아이들도 이 자리에 함께 부르셨거늘, 그 아이가 울때에 우리는 왜 부모가 아이를 빨리 데리고 나가지 않는지 눈을 흘길 때가 있지 않은가?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할수 있는 한 모든 주의 백성들이 주의 존전에 나아와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를 원하신다.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젊은이나 연로한 노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모든 계층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길 바라신다. 하나님께서 이를 원하시는데, 어찌 우리가 이를 막거나 방해할 수 있는가. 모든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 안에서 주시는 복을 누리며, 기뻐 주님께 찬송과 감사를 올려드리는 날, 그 날이 바로 예배임을 기억하라.
마지막으로, 예배는 죄사함의 은혜가 있는 곳이다. 이 마지막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한번 강조하며 말씀드린다. 예배는 죄사함의 은혜, 사죄의 은총이 임하는 곳이다. 구약의 제사는 3가지의 기능이 있다. 물론 레1-6장까지 기록된 구약의 5가지 제사인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와 속건죄와 속죄제, 이 다섯 가지의 제사는 신약에서의 예배를 가리킨다. 따라서 제사의 3가지 기능 역시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아주 밀접한 관계라 할 수 있다. 이 3가지를 반드시 기억하라. 첫번째 기능은 속죄의 기능이다. 죄를 용서받는 것이다.
레위기에 기록된 다섯가지 제사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제사가 바로 번제이다. 왜 번제가 중요한가? 5가지 제사중 가장 먼저 등장하고 있기도 하지만, 민28장을 보면 율법이 주어진 이후로 매일 아침 저녁으로 하루 2번씩 드려져야 하는 제사이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제사 중에서 무엇보다 번제는 속죄의 제사였다. 4절을 보니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여러분 상상해보라. 아침저녁으로 예배자는 자신이 직접 신중하게 고른 희생제물을 데리고 하나님의 성막으로 나아간다. 예배자는 직접 그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를 하게 되는데, 이 때에 그의 죄가 희생제물에게 전가된다. 그 이후 예배자는 그 제물의 목을 잘라내어야 한다. 살아있는 제물의 목을 잘라내기 위해서는 여기저기 피가 안튄 곳이 없을 것이다. 그 뿐인가? 목이 절단된 짐승의 가죽을 벗겨내어야 한다. 또한 그 제물이 불에 잘 탈 수 있도록 반으로 쪼개고, 내장들을 제거하며, 포를 떠야 한다. 제사장들은 그 짐승의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린다. 여기저기 피 투성이다. 누구라도 그 광경을 보면 잔혹하고 참담하게 여길 것이다.
이러한 광경이 주는 교훈이 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의 결과가 이토록 잔혹하고 참담하다는 것이다. 죄인인 내가 하나님 앞에서 당했어야 할 비참한 결과가 바로 이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죄인을 맞아주시기 위하여, 그 더러운 죄를 깨끗하게 씻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으니 그것이 바로 속죄제사이다. 속죄제사를 통해 우리의 죄를 희생제물에게 안수하여 넘기면, 그것이 우리를 위하여 속죄가 되게 하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을 완전한 희생제물로 올려드리심으로서, 모든 신자들의 의를 이루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 구원에 필요한 의를 이루었기에 더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매순간 범하는 죄에 대하여 우리는 애통해 해야 하고 회개하여야 한다. 분명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얻었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직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죄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그 죄를 고백하며 회개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예배를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께 드릴 희생제물의 머리에 안수를 하는 것은 예배자와 제물의 동일화이다. 예배자의 죄를 제물이 대신 뒤집어 쓰고 죽는 것이다. 그 제물을 목을 딴다. 가죽을 벗긴다. 이는 내가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야 함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그 제물의 각을 뜬다. 이는 포를 한점 한점 뜨는 것이다. 희생제물이 하나님의 불 가운데에서 잘 탈 수 있도록 아주 얇게 칼집을 먹이는 것이다. 우리의 회개가 이와 같다. 그 과정이 쉽지 않고 때로 고통스럽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불 가운데 잘 탈 수 있도록 아주 얇게 칼집을 넣어야 한다. 모든 죄악들이 낱낱이 드러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아주 얇게 포를 떠야 한다.
여러분, 제가 어릴 적만 하더라도 주일 낮예배 순서 중에서 말씀을 듣기 전에 함께 회개기도하는 시간이 있었다. 이 때에 십계명을 함께 낭독하면서,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며 말씀에 근거하여 회개기도를 하고, 그 이후에 말씀봉사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사죄선언의 시간이 있었다. 참 좋은 전통이었는데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다. 아마도 예배시간이 많이 길어지기 때문이었으리라. 대형교회들은 주일날 낮예배만 5부, 6부 이상 드리는데 어쩔 수 없는 결과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가 죄사함의 자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번제의 주된 기능이 속죄에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 신약교회들이 드리는 예배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 역시 속죄이다. 한 주간 세상 가운데 살면서 더러워진 마음들, 지치고 상한 심령들이 말씀 가운데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고, 모든 더러워진 것들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하게 씻어 다시금 세상으로 파송받는 시간이 바로 예배의 시간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배의 자리로 나아올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의 삶을 돌이켜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에 앞서 먼저 한주간의 삶을 뒤돌아보시며 회개하고, 이제 올려드릴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산 예배가 되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고 주님의 구원의 즐거움 가운데 온전히 기뻐하는 예배가 되도록, 우리의 마음과 정성과 뜻과 힘을 다하여 가장 최고의 예배, 가장 최선의 예배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시간이 되도록 기도로 준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분명히 말씀드린다. 예배에는 사죄의 은혜가 임한다. 죄를 회개하고 애통해하는 자들에게 분명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죄에 대하여 무뎌졌기 때문이요, 예배를 통한 사죄의 은총에 갈급해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죄에 무뎌졌기 때문에 죄가 죄인줄 알지 못하는 시대이고, 죄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기에, 사죄의 은총에 대해 갈급해하지 않고, 예배 가운데 임하는 속죄의 은혜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여러분의 예배는 어떠하신가? 여러분의 예배 가운데 죄사함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고 있는가?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 앞에서 여러분의 예배를 돌아보길 바란다. 나는 과연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배 가운데, 방관자나 구경꾼이 되어 앉아 있는가? 아니면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택하신 백성들을 예배의 자리로 부르시는데, 혹 나는 초청을 받은 성도들을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지 못하게 만드는 걸림돌이 되고 있지는 않는가? 하나님께서는 차별하지 않으셨는데 나는 내가 가진 편견으로 그들을 차별하고 있지는 않는가? 예배는 회개함과 죄사함의 은혜가 있는 자리인데, 과연 나는 예배에 임할 때에 죄에 대한 고백, 죄에 대한 애통함, 죄를 슬퍼하며 돌이키고자 하는 회개와 더불어 말씀을 통한 죄사함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가? 예배는 죄사함의 은혜가 있는 자리라는 것을 살펴보았는데, 내가 게으르고 악하여 주께서 부어주시는 사죄의 은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 시간 말씀을 기억하며 함께 기도하자. “주여,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예배를 올려드리길 소원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예배에 대해 가르쳐 주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그 예배를 올려드리기를,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예배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찬송 예배합니다[완전하신 나의 주]
거룩하신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혼탁한 세상 속에서 무뎌져 왔던 우리의 모습이었다면 이 시간을 통하여 다시금 좌우에 날선 검처럼 영적으로 예리해질 수 있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예배를 올려드릴 수 있길 원합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바로 그 한 사람 예배자가 될 수 있길 원합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를 가르쳐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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