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고백:십일조
01-28-07 신앙고백: 십일조 [말 3:7-말 3:12]
제가 이곳에 온지가 벌써 1년하고도 3개월이 지났습니다. 지난 시간 동안 돌이켜 생각해보면 한번도 헌금에 관한 직접적인 설교를 할 기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한 해가 지나고, 또 새해가 시작된 이 시점에서, 어떻게 우리가 이 한해 더욱 알찬 믿음 생활을 하고 하나님의 은총가운데 살아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이 헌금에 대해서도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올 한해 벧엘를 다시 새워가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요구되는 것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도로서의 기본적인 신앙을 다시 점검하고 말씀을 통해서 배우고 또 변화되어서, 우리가 성장하고, 또 그 가운데 주님의 뜻을 실천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 하나가 바로 헌금생활입니다.
이 헌금생활은 우리의 신앙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기준이 됩니다. 혹자는 부정하고 싶을 것입니다. 어떻게 돈이 신앙을 표현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께 드러내는 가장 직접적인 표현이 헌금이기에, 다시말하면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양과 염소를 바칠것도 아니요, 곡식을 태울 것도 아니요, 그 수단은 돈이기에 어쩔수 없이 돈이라는 것이 신앙을 표현하는 헌금의 수단이 될 수 밖에 없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성경은 어떻게 우리의 헌금생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지 그 점을 함께 생각해봅시다. 오늘은 그 중에서 특별히 성경이 가장 강조하고 있는 십일조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봅시다.
여러분 혹시 미국의 흑인교회, African American church 에서 예배드려 본 경험이 있습니까? 그러면 간혹 tv를 통해서 미국 흑인교회의 예배 모습을 보신 적은 있으실 것입니다.
이 흑인들은 어떻습니까? 아주 emotional 합니다. 그래서 이 예배시간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설교자가 설교 할 때도, 설교자가 한 마디 하면, 회중석에서 성도들이 두 세마디를 합니다.
우리 한국식으로 말하면 옳소, 그래요, 맞습니다, 그렇게 하십시다, 나갑시다. 그럽니다.
Ye brother, preacher, let's go.
막 그냥 떠듭니다. 그래서 이 예배가 아주 exciting 합니다.
한 흑인 교회에서 일어났던 일인데요, 흑인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시면서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절름발이가 되었습니다. 이제 교회는 일어나서 걸어야 합니다.”
그랬더니 한 흑인 성도가 “걷게 하소서. Let it walk.” 그랬습니다. 그러자 다른 성도들이 일제히 Let it walk, Let it walk, 그랬습니다.
그러자 이 목사님도 계속 말씀하시면서 오늘 교회는 너무나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나 없습니다. 이제 교회는 달려가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달려가야 합니다. 그러자 또 그 성도가 “달려가게 하소서”, Let it run. Let it run, 그랬습니다. 그러자 전부다 일제히 Let it run, Let it run, 그러는 거예요.
이 목사님이 계속 설교를 진행하면서 이제 세계 복음화의 과제는 우리 눈 앞에 다가왔습니다. 우리가 전 세계를 가슴에 품고 세계복음화를 위해서 교회는 달려가는 것 정도로 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이제 날아가야 합니다. 그러자 성도들이 뭐라고 그랬을까요? 그렇습니다. “날아가게 하소서. Let it fly. Let it fly.” 막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자 이 목사님이 우리가 전 세계를 복음화 하고 예수님의 명령이 땅 끝까지 전파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가 선교에 헌신해야 되고 특별히 십일조와 헌금생활에 헌신하셔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 오늘 십일조와 헌금생활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그랬습니다.
그러자 아까 그 말을 시작했던 흑인 형제가 갑자기 조그만 목소리로 “걷게 하소서. Let it walk, Let it walk.”
아직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렇습니다. 돈 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어보시면 이 돈에 관한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돈과 재물과 관계되는 이야기를 참 많이 하셨습니다. 한 주석가는 복음서의 예수님의 교훈의 6분의 1은 돈과 관련된 교훈들이고, 특히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3분의 1은 돈과 관련이 되어 있다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달란트의 비유, 또 포도원 품꾼의 비유, 일만 달란트의 빚진 자의 이야기,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 불의한 돈으로 친구를 사귀는 이야기, 부자 청년의 이야기, 잃어버린 동전 등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이 돈과 관련된 이야기들입니다.
우리에게 참 많이 알려진 “기도”의 저자 리차드 포스트 라는 영성 운동을 하시는 목사님도 이런 말을 하셨어요. “돈에 대한 그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하나님께 대한 그 사람의 신앙상태를 알 수 있다.” 참 우리가 부정하고 싶지만, 돈이 영성의 척도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과연 그런지 성경을 통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오늘 보시는 이 말라기는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고 약 90여년이 지난 후 유다백성들이 또 살만해지니까 또 다시 영적 타락가운데 죄를 범하는 가운데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라기의 기록목적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위함입니다. 성경에서 관계의 회복이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있는 죄를 제거하는 과정입니다.
백성들은 제일 먼저 성적으로 타락하게 되어서 이혼과 이방인과의 통혼으로 도덕적으로 또 영적으로 타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공의에 도전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불신으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이것이 오늘 보시는 1, 2장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본 3장에서는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함이라는 죄를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7절을 보십시다.
(7)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제일 먼저 우리가 이 십일조 문제를 생각할 때 중요한 것은 이 십일조의 중요성에 대한 무지입니다. 이 유다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죄성은 그들의 헌금생활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께서 정하신 규례인 십일조와 헌물을 제대로 지키지 않음으로써 또 다른 형태의 죄악을 저질렀는데, 더욱 심각한 것은 그들 자신이 십일조를 어긴 죄에 대해서 머가 잘못인지를 분명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9절에서도 아담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파기하고 죄를 지은 후 하나님께서는 찾으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똑 같은 형태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의 규례를 어긴 후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게로 돌아오라.”
하지만 무지한 그들이 반문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돌아가야 합니까?”
분명 하나님께서는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의 규례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십일조 사건이래, 언약의 백성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주어진 이 십일조의 규례에 대해서 무지함을 통탄하고 있습니다.
창 14장을 잠깐 봅시다.
[창 14:14-창 14:20]
(14)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 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자 삼백 십 팔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15)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16)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 왔더라(17)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18)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19)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20)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이 창세기 14장은 소위 팔레스타인 땅에서 요단강 동쪽 편으로 있었던 4명의 왕이 그돌라오멜 이라는 사람을 맹주로 해서 요단 강을 건너 이스라엘 땅, 가나안 땅을 침범하는 데서부터 그 스토리가 시작됩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을 침략해 들어와 다섯 개의 도시를 초토화시키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도 포로가 되었습니다. 조카가 포로가 되었는데, 아브라함도 가만히 있을 수 없죠. 자, 창세기 14장14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삼백십팔 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조카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헤브론 지역에 있었던 아브라함도 일종의 도시 국가의 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의 군대, 자기가 길렀던 일종의 사병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삼백십팔 명을 데리고 많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그들을 데리고 이스라엘 저 북쪽의 단까지 쫓아갔습니다.
15절에 보시면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일종의 기습작전을 감행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밤중에 쳐들어 오니까 아브라함의 군대가 얼마인지 모르는 당황했던 사람들이 이제 막 서로 좌충우돌 하는 과정에서 아브라함이 승리한 것입니다. 기적적인 전쟁의 승리를 얻었던 것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전쟁에 승리한 개선 장군이 되어 돌아옵니다. 개선의 퍼레이드를 펼치면서 그가 돌아오게 됩니다.
17절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18절에 보시면 그를 맞이하고 환호하던 행렬 가운데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는 예루살렘의 왕이기도 했습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라함을 축복합니다. 19절 축복했어요. 개선 장군 아브라함을 축복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빌었을 때 20절에 보시면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감격해 하며 그가 얻었던 전리품에서 십분의 일을 바쳤더라.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십일조 사건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당연한 응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린 이유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마땅한 응답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에 승리했습니다. 그 자체도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개선의 여로에서부터 만났던 살렘 왕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이 다시 아브라함을 축복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무얼 깨달았을까? 아! 나는 축복을 받는 자로구나. 왜냐하면 이때 특별히 등장했던 멜기세덱 이라는 사람은 왕이었을 뿐만 아니라 제사장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제사장이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제사장은 한 마디로 말하면 쉽게 어떤 사람이라고 연상이 됩니까? 제사장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에게 축복을 받았다는 것은 무얼 의미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고 있구나. 그래서 내가 전쟁에 승리했고 또 승리하고 돌아오는 우리를 맞아주면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서 그들을 환영하고 있는 이 풍성한 대접을 받으면서 아브라함이 무엇을 느꼈을까요?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있다. 그리고 이 축복에 대한 깨달음과 동시에 하나님께 십분의 일을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일조 사건의 출발점은 축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만남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지금도 만나고 있습니까?
이 아브라함의 십일조 사건이 바로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의 규례입니다. 이 규례를 아브라함의 자손들인 유다백성들이 당연히 지켜야 함에도 그것을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십일조를 범하는 것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심지어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8절 보십시다.
(8)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7절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 백성들의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느냐?”는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합니다.
이는 신명기 14:(22)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레 27:(30)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라는 분명한 규례에 대한 불순종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규례에 대한 불순종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 때 비로소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세번째는 불손종과 순종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규례를 우리가 불순종하면 어떤 결과가 있고, 또 순종하면 어떤 결과가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9절, 10절을 보십시다.
[말 3:9-말 3:10]
(9)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10)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어떤 교회 목사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께서 목회하시는 교회에서는 십일조 교인들이 몇 명이나 되십니까? 그러자 그 목사님이 빙그레 웃으면서 100% 다 십일조를 합니다.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깜짝 놀래서 다시 물었어요. 아니 전 교인이 다 십일조를 한다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한 70% 정도는 교인들이 교회에 십일조를 하고, 나머지 30%는 하나님께서 직접 거두어 가십니다. 그러시는거예요.
하나님께서 직접 거두어 가시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어요. 당장 눈앞의 현실로 나타나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곰곰이 뒤 돌아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정확하신 분입니다.
언젠가 우리 임용웅, 임기옥 집사님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하나님께서 참 정확하신 분이시라고요. 어떻게 십일조를 안 하면 정확하게 그 만큼의 손실이 다른 곳에서 생기는지,,,하나님은 참 정확하시다고요. 경험해보신 분들은 아마 경험해보셨을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10절 보십시다.
(10)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한 젊은 청년이 십일조에 관한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도 십일조를 내자 결심을 했습니다. 그 청년이 당시의 한 달 월급이 2000불이었어요. 십일조 200불! 조금 부담이 되는 것 같았지만 결심을 했으니까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한참 내다 보니까 드디어 이 사람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한 달 수입이 5000불이 되었습니다. 얼마 내야 할까요? 500불. 조금 아까운 기분이 있었지만 그래도 냈습니다. 사업이 잘되요. 엄청나게 바쁩니다. 이제 한달 수입이 3만불이 조금 넘는 겁니다. 얼마 내야 됩니까? 3000불이죠. 3000불 내는 것 쉽지 않죠? 3000불 내려니까 넘 아까운 생각이 드는거예요. 한달에 3000불 일년이면 얼마야? 도저히 낼 수가 없었어요. 이 사람이 그래도 순진해요. 그래서 목사님을 찾아 왔습니다. 목사님 제가 십일조를 서약하고 결심한 이래로 지금까지 실천해 왔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한 달 수입이 3만불이 되고 나니까 3000불 낸다는 것이 부담이 됩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혹시 십일조 서약을 cancel하면 안 될까요?
그러자 이 목사님이 웃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cancel은 안 되고요 형제가 십일조를 쉽게 낼 수 있도록 제가 도와드리면 안되겠습니까?” 했습니다. 그러자 청년이 어떻게요? 했어요.
그러자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형제가 옛날처럼 한 달에 2000불만 벌도록 제가 기도해 드리죠.
여러분, 내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축복이 증가한다는 것, 그것은 동시에 십일조가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 생활이 멉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축복하신다. 나와 함께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우리의 응답과 감사가 함께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십일조는 우리가 성취 것들의 원인이 바로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취와 우리의 성공이 우리의 것이 아니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비롯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십일조는 그저 단순히 돈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여러분, 헌금하기가 왜 어렵습니까? 아깝죠, 돈? 왜 아깝습니까? 이 돈이 어떤 돈인데 내가 어떻게 땀 흘리고 내가 어떻게 열심히 일해서 벌었는데…..
그런데 내가 일할 수 있었던 건강, 누가 주셨습니까? 나의 지혜,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주께서 건강을 주시고 주께서 지혜를 주시고 주께서 여건과 환경을 마련해 주시고 주께서 도와주셨다면 나의 삶은 전적으로 그 분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 아니예요?
나의 성공의 원인, 나의 성취의 원인, 누구 때문입니까? 하나님 때문 이예요. 그것을 기억하자마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아브라함은 나는 그냥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구였어. 그러나 도구로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입니까?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주신 본래의 이유였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너는 축복의 근원이 되리라. 그런데 축복의 근원이라는 말이 정확한 말이 아닙니다. 더 정확하게 옮기면 축복의 통로라는 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쓰신 것에 불과해요. 내가 쓰임을 받았다. 나 같은 사람도 쓰임을 받았다. 얼마나 기뻐요? 그것만으로도 감사하죠. 감격이죠.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하셨고 하나님이 하셨고 그러나 다만 나를 도구로 쓰셨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이어야 합니다.
종종 십일조를 반대하는 사람 가운데 십일조가 신약적이 아니다 복음적이 아니다 반대하는 분이 있어요. 왜냐하면 율법이 폐기되었다면 십일조도 폐기되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할 것은 율법 이전에 이미 십일조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모세시대 전의 아브라함때 이미 십일조는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에도 보시면 그 율법의 형식만 붙들고 있었고 율법의 진정한 정신을 잃어버린 바리새 인들을 책망하시는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를 언급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것도 버리지 말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 볼 수가 있습니다.
십일조의 정신의 핵심은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십분의 십 전체를 드리는 것입니다.십분의 일을 구체적으로 드린 것은 이 전체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1858년 영국으로부터 독일로 건너와 유학하고 있었던 한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의 딸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 열심인 학생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공부하다가 좋지 않은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하루 하루 시름 시름 앓았습니다. 친구의 초청으로 뒤셀도르프에 있는 친구의 별장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의 집의 복도를 걷다가 우연히 한 장이 그림을 봅니다. 렘브란트의 에크호머라는 그림이었습니다. 에크호머, 이 사람을 보라. 빌라도의 법정에서 채찍을 맞고 가시 면류관을 쓰고 고난 받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그리고 그 그림 아래는 짧은 글귀가 있었습니다.
“나 너를 위해 내 몸을 주었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주느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집에 돌아오자마자 이 자매는 그 그림에서 받았던 감동과 자기 헌신의 결심을 한 편의 찬송시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찬송가 185장입니다.
내 너를 위하여.
오늘 우리의 신앙고백은 무엇입니까?
기도하십시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저희들의 무지와 저희들의 연약함을 고백합니다. 주님 불쌍히 여기시고 함께 하시옵소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주님의 몸을 주었건만 우리는 무엇을 드렸는지 생가하게 하옵소서.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