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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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교자 2. 비난의 이유 3. 인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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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본문에는 한 공동체가 등장합니다.
이 공동체는 참 괜찮은 공동체 인 듯 합니다. 함께 모여 나를 구원해주신 예수님께 감사함을 표현합니다. 서로를 아껴주고 돌아보며 또 격려하며 위로하고 또 그 모습에 도전을 받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이 공동체의 모습은 참 좋습니다.
그런데 조금 집중해서 이 공동체를 살펴보니 좀 이상한 모습이 보입니다. 겉모습은 참 친해보이지만 사실 그들 가운데 보이지 않는 벽이 있습니다. 굉장히 사무적인 관계처럼 보입니다. 서로를 향한 축복과 위로가 뭔가 거리감이 있어 보입니다. 함께 하고는 있지만 어색합니다.
어색함에 대해 알기 위해 좀 더 집중해서 공동체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들은 한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겉으로는 한 공동체였으나 내부의 사람들은 여러 모양으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공동체가 갈라진 이유는 바로 겉모습만 번지르르했던 신앙인들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동역자들과 함께 모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함께 모여 서로의 것을 공유하며 가족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못마땅한 마음이 들기 시작합니다. 모임에 불참하는 것을 넘어 이제는 그들을 향해 불쾌함을 표시하고 적대감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헛된 것을 믿고 왔다고 말하며 사람들을 무시합니다.
결국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지금까지 지켜왔던 전통과 율법으로 인함이다! 라고 말하며, 공동체를 흔들어 놓습니다.
열심히 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흔들고 무기력하게 만들어 갑니다. 그렇게 자신들만의 생각으로 공동체를 큰 어려움으로 몰고 갑니다.
이렇게 공동체에 어려움을 가져왔던 사람들의 정체는 제사장을 포함한 유대교 개종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다양한 일들을 통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개인적인 믿음과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지켜왔던 그리고 가장 익숙했던 율법들과 전통들을 두고 새로운 공동체에 들어왔습니다. 자신들을 옭아매고 힘들게 했던 율법을 더 이상 지키지 않게 되었고, 또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있기에 처음엔 참 즐거웠을 것입니다. 율법과 전통에 매이지 않고 자유함 속에 신앙 생활을 하며 살아갈 수 있었으니까요.
율법과 전통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점점 그들 마음 속에 거부감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보이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보이고 나에게 익숙한 율법과 전통으로 눈이 자꾸 돌아갑니다. 평생을 해오던 자신들의 전통과 습관을 내려 놓으니 참 어색합니다. 그 어색함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율법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율법을 지키는 삶은 참 어렵고 힘들지만 그래도 나에게 가장 익숙한 것을 하며 살아가니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새로운 주인인 그리스도를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구원의 메시지. 하나님의 진리를 거부하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갑니다. 배교하기 시작합니다.
특정 종교를 믿는 것만이 배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의와 열심을 갖는 것 역시 하나의 배교입니다.
본질이 아닌 비본질에 집중하고 나에게 익숙한 전통을 따르는 것 그리고 그것을 새로운 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도 하나의 배교의 모습입니다.
제사장들을 포함한 유대인 개종자들은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도. 진리를 붙잡는 것에 실패했습니다. 다시 유대교로 돌아갔습니다. 율법과 전통. 죽은 행실을 붙잡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자신들만 유대교로 돌아가면 참 좋은데, 교회 공동체를 흔들어 댑니다. 흔드는 것도 모자라 그들을 비난하고 무시하면서, 또 그리스도를 향한 모든 열심과 마음을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배교자

이들은 처음부터 배교의 목적을 갖고 그리스도 공동체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말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과 신성과 인성을 믿었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에 동의했고, 그분을 자신들의 입술로 고백하여 받아드리고 믿었습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공동체를 흔들었던 것이 아닙니다. 유대교에 쏟았던 그 열정만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열정을 쏟아 교회 공동체를 사랑하고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들 속에 피어났던 간헐적인 의심들이 그들의 믿음을 흔들었습니다.
사실 우리도 이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실까?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실까?” “예수님이 계시다면 나의 인생은 왜 이럴까?”
이런 고민이 들 때 어떻게 행동하시나요? 말씀을 더 듣고 읽거나 혹은 기도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더 의지하기 위해 집중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굳건한 믿음 속에 질문을 던지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더더욱 악해저가는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내가 믿는 믿음과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정리된 나의 생각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냥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치열하게 매달려 얻어낸 그 믿음의 결과물이 우리를 향한 도전을 견디고 버틸 수 있게 도와 주거든요.
그런데 이들은 좀 달랐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바탕이 되지 않은 의심과 질문은 그들을 넘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고민에 대한 답을 말씀과 기도를 통해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익숙했던 율법을 선택했고, 율법을 통해 의문과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들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율법은 더 이상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죄 용서하심은 단번에 이루어졌습니다.
율법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와 또 죄 용서를 모두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구약 시대처럼 값비싼 제물들을 가져와 머리에 안수하고 각을 떠서 피를 뿌리고 태우는 속죄제사를 다시 드리겠다는 의미입니다. 즉. 단번에 죄용서를 이루어주신 예수님의 구원사역이 틀렸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9절에 보면 ‘성령을 욕되게 한다’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 표현은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으로 개인적으로 모욕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이 사람들은, 성령님의 존재와 그 역할을 무시하는 것을 넘어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욕되게 하는 이 행위는 큰 문제가 있습니다. 31절의 말씀처럼 스스로 하나님의 품이 아닌 하나님의 심판의 손으로 걸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로 죄인을 찾아와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을 통해 우리에게 온 성령님을 거부하고 스스로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바로 유대교로 돌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기억하라

히브리서 저자는 이들로 인해 깨어져 가고 있는 공동체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32절입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반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아멘”
공동체를 그리고 개인을 뒤흔드는 이러한 고난과 공격처음 받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을 때 그들이 받았던 개인적 핍박과 고난은 지금보다 더 강력했습니다. 믿음이 어리고 미숙했던 과거에 공격은 지금보다 더 크고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향한 대안 없는 핍박. 비판을 위한 협박이 난무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아무런 대화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대화는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인데, 이들은 일방적인 언어 폭력을 당했습니다. 믿음이 막 생기기 시작해 더 큰 충격을 받았던 그 때 그들의 선택은 반응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저는 혹독한 핍박과 폭언 속에 노출되어 있는 히브리 독자들의 마음이 이해가 갑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참 여러 마음과 감정이 교차했습니다.
영문도 모르는 이유없는 비판과 폭언은요. 이상한 소문을 만들어내고 사람을 참 비참하게 만듭니다. 자존감을 좀먹을뿐만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존재 이유에 대한 의문을 갖도록 만듭니다.
이상하게도 저는 이런 경험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도대체 왜 그런 경험들을 많이 하게 하시는지 모르지만, 저는 신대원을 다닐 때에도 그리고 사역지에서도 이러한 경험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쯤 되면 하나님께서 사역을 그만두라 하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었습니다.
반응하지 않으면 상대는 더 약올라서 없는 말을 지어내더라구요. 히브리서 사람들의 인내 역시 똑같았습니다. 참을 수록 그들은 더 공격을 받았습니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이 교회 공동체 사람들이 잘못한 것이 있을까요? 잘못이라면 그저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고, 그분을 위해 살아가려는 열심을 낸 것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때를 떠올린 이들은 지금까지 살아 온 것처럼 폭언과 핍박 속에서 다시 예수님을 위해 열심을 내기로 합니다. 돌아보니 자신만 그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님을 발견합니다. 같은 처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가 깊어지기 시작합니다.
동일한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 공통적인 우선순위를 세우게 됩니다. 공격 당하는 이유 예수님을 끝까지 붙잡기로 합니다. 그만큼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이기에 세상이 빼앗아 가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더 의지하고 매달리기로 합니다.

인내

히브리 저자는 고난 속에 보였던 그 때의 모습을 기억하며 지금도 인내 할 때라 말합니다. 꾸준한 인내가 필요하다 말합니다. 어떠한 목표를 이루어 내기 위해선 절제하며 인내하고 포기하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제가 지난 사역지에서 어려움을 겪으며 힘들어하던 중 휴가를 내고 제주도에 간 적이 있습니다.
정말 답답하고 속이 상해서 무작정 걷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한라산을 등반하기로 했습니다. 좀 쉽다 말하는 성판악이 아닌 관음사 코스로 등반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힘들더라구요. 도중에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제 앞에 한 여성분이 걸어가시는데 성큼성큼 가시는거에요. 그래서 저 분이 가는 곳까지만 가보자.라는 생각에 그분을 따라 걷기 시작했습니다.
도중에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이정도면 충분해 처음 한라산 올랐는데 이정도만 해도 충분하잖아.’ 라는 마음이 계속 생겼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하기 아깝다’라는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갔습니다. 그렇게 한라산 정상을 찍고 내려와서 등반 시간을 보니 7시간이 걸렸더라구요. 평균 9-10시간 걸리는 한라산 관음사 왕복을 7시간만에 끝낸 것이죠.
제 체력이 좋음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걷는 동안 정말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정상이라고 아내에게 인터넷에서 퍼온 사진을 보낼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걸어온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또 언제오겠냐는 생각에 이를 악물로 백록담에 올랐습니다.
그렇게 참고 이 악물고 버티고 올랐더니 그 곳에서만 볼 수 있는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자연이 눈에 들어오더라구요.
히브리서 저자그들에게 그리고 저와 여러분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참고 견디는 것. 즉 꾸준한 인내는 인내를 단단하고 견고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38-39절은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입니다. 히브리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지금 우리가 하는 그 고민은 우리만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시기 전 구약시대의 선지자도 했던 고민이었다.
불경건과 불순종으로 인한 사람들을 바라보던 한 선지자가 하나님께 부르짖고 매달린 후 내린 결론은 이 것이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그것이 그가 하나님 안에서 내렸던 결론이었음을 기억하라! 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제2가족 여러분. 믿음은 시련을 당할 수록 역설적으로 빛이 납니다. 진정한 인내와 믿음은 결코 묻히거나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혹은 생활, 신앙, 삶에 대한 어려움은요. 곧 찾는 것이 될거에요. 저와 여러분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랑과 참 생명을 찾고 의지하게 만드는 순간들이 될 거에요.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믿음은 시련을 당할 수록 역설적으로 가장 빛이 납니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빛이 나는 신앙임을 믿고 지금의 상황을 인내하고 버티고 싸워 이겨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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