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사랑한 그 제자 Ⅰ] 윤리적 행위, 놓치는 진리(요3: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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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2년 7월 20일 수요일
제목 : [예수가 사랑한 그 제자 Ⅰ] 윤리적 행위, 놓치는 진리
본문 : 요한복음 3장 1-21절 *신145
결단찬양 : 믿음이 없이는
[도입1]
저는 “예수가 사랑한 그 제자”라는 소제목을 가지고, 사복음서 중 요한복음에만 등장하는 본문들 중 몇개의 본문들을 가지고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요한의 별명을 알고 계십니까? 요한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사랑의 제자”라는 표현을 받고 있습니다. 왜 그가 사랑의 제자인가를 보니, 요한복음 21장 20절에서는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며 베드로가 요한을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 표현했고, 또 요한복음 4장 7절부터 21절까지는 요한이 직접 사랑이라는 표현을 30회나 사용하며, 사랑을 강조 또 강조했으며, 요한복음 13장 23절에서도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본인 스스로가 예수가 사랑하는 제자라 표현하였기에, 그는 많은 이들로 하여금 “사랑의 제자”라는 표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요한의 제자된 삶에 있어 사랑을 빼놓을 수 없어, 오늘의 소제목도 “예수가 사랑한 그 제자”라 정하게 되었습니다.
[도입2]
성도님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어디까지 해보셨습니까? 물론 해본 적도 없고, 사실 앞으로 해볼 생각도, 또 막상 할 시간도 없을 것 같지만, 문뜩 “학 천 마리 접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학창시절 학을 접어 선물하며 고백하는 것이 트렌드였던 기억이 나면서 동시에 “왜 하필 학을 천마리나 접어야 했을까?”라는 생각을 하여 그 의미가 무엇인가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네이버 지식인에 올라온 글을 보았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그냥 한 6학년 여자애입니다. 저희반 남자애들은 다 오징어입니다. 근데 울반 오징어들이 어느새부터 학 천마리를 접겠다고 난리입니다. … 학 천마리 접는거에 의미를 아시는 분은 답변 부탁드립니다. 내공은 50이구요. 잘 모르겠네요 같은 저에게 도움되지 않는 답변은 하지마세요. 신고합니다. 많은 답변, 지식 부탁드려요 ^^”
이는 일본에서 유래한 것으로 학 천마리를 접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우리나라로 이어져 왔다고 합니다. 이에 덧붙여 학 천마리를 받은 군인은 전쟁에 나가더라도 살아 돌아온다는 등 많은 덧붙임이 있었지만, 학 천마리가 주는 의미는 “상대의 사랑을 쟁취하고자 하는 소원, 그 마음이 담긴 정성” 정도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냐 묻는다면, 지금으로써는 제 딸, 조아엘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내와 이야기 도중 나온 것인데, 이 아이를 위해서 대신 죽어도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지극히 제 눈에는 너무 사랑스럽고 소중합니다. 그래서 제게 무엇까지 할 수 있는가 묻는다면, “아파서 장기가 필요하다면, 가능하다면 내 장기를 대신 줄 수 있을 것” 같다 대답할 것 같습니다.
이런 감정은 대부분의 부모님들, 또 많은 성도님들이 공감하실 것 같습니다. 또 우리만 사랑을 줍니까? 우리도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한 존재들 아닙니까? 언제 우리는 사랑받고 있음을 느낍니까? 특히 성도님들은 언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 느끼십니까?
[니고데모, 그는 누구인가?]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본문은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속에서 우리는 절대적 진리가 무엇인지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는 니고데모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넘어갔으면 합니다. 니고데모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학자들의 다양한 시각과 의견들이 있지만, 거두절미하고 확실하게 드러난 것들로 니고데모를 설명하자면, 우선 그는 바리새인이었고 유대인의 지도자 였습니다. 또 그는 당시 유대인들의 최고 의결 기관이자, 71명의 소수인원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많은 이들로 하여금 인정받는 자였고,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결코 뒤쳐짐 없는 삶을 그는 살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메시야를 기다린 것은 맞지만, 그저 조금 유명세를 띈다고 소문난 젊은이, 즉 예수님께 관심을 가지기 까진 어려웠습니다. 특히나 바리새인들 중에는 더더욱이나 예수께 관심을 가진 자가 없었기에 더 그랬을 것입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내용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니고데모 스스로가 자신의 방법으로, 지식으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니고데모의 질문 : 당신이 정말 메시야 입니까?]
그러던 중 예수님을 만나 묻습니다. 2절입니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의 질문을 다루기 전에 먼저는 “밤”이라는 시간대를 다뤄보고자 합니다. 사실 이 밤에 대한 의견도 상당히 분분합니다. 누군가는 이 밤이라는 시간대가 현재 니고데모의 신앙 상태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또 누군가는 니고데모도 사회적으로 바쁜 직장인이었을 것이다보니 오전이나 낮에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아 밤에 찾아간 것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또 누군가는 요한복음에서는 밤에 특별한 영적 의미가 있어 밤이라는 시간대를 사용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누군가는 오로지 본인 혼자 예수님을 독대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밤을 택해 나아왔다 말하기도 합니다. 상당히 많은 밤에 대한 많은 의견과 소견이 있음에도 저는 그저 니고데모가 밤에 나아온 것은 “자신의 사회적 위치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피하기 위하여 밤을 택했다.”는 의견이 조금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밤 중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예수께로 나아간 니고데모가 묻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나이가 한참은 많은, 어쩌면 형보다 삼촌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는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향해 “선생님”이라 부르며 이어 말합니다. “나는 당신이 거짓 선생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행한 표적은 그 누구도 아무나 할 수 있는 표적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당신이 대단하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래서 당신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의 대답 : 거듭나야 한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와같이 대답하십니다. 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상식적으로 생각해봅시다. “당신은 누구냐?”라는 질문에 여러분들은 어찌 대답하시겠습니까? 만약 제게 여러분들이 니고데모와 같은 질문을 하셨더라면, 저는 이렇게 대답했을지도 모릅니다. “원빈급의 외모와 정우성급의 아우라와 김용명급의 말주변을 가진, 이어진교회의 간판 조광원 강도사”라고 소개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질문의 의도는 “Who are you?”였기에 저는 제가 누군가에 대답하기 위해 “팩트”를 기반으로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당신은 누구냐?”는 질문에, 3절처럼 뚱딴지 같은 대답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의중은 무엇이었습니까?
니고데모와 같은 당대 유대인들의 시각에서 볼 때, “메시야의 역할”은 무엇이었나를 알게 될 때, 예수님의 대답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들이 메시야를 기다린 이유는, 이들에게 있어 메시야란 존재는 “자유와 해방”을 주는 분이었습니다. 그럼 존재 이유가 맞는가 싶지만, 이들의 자유와 해방은 한정적인 자유이고, 제한적인 해방이었습니다.
니고데모에게 있어 “자유와 해방”은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자유케 하고 예루살렘에 다시 하나님의 주권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니고데모는 “당신이 우리를 자유와 해방을 선사할 메시야가 맞습니까?”라는 질문을 예수님께 던진 것입니다.
그런 니고데모를 향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거듭나야 볼 수 있음”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인자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그저 유대인뿐 아니라 온 인류에게 주실 구원과 해방,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었기 때문에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하나님의 나라, 메시야의 개념과는 크게 달랐습니다.
니고데모 입장에서 꽤나 당황스러울만한 대답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니고데모에게 있어 메시야는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함으로 끝내 영광과 성공의 메시야를 기다려왔는데, 지금 당장의 구원이 아닌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예수님의 대답은 꽤나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윤리적 행위]
니고데모는 종교생활에 있어 상당히 열심히었습니다. 가르치는 일에도 열심이었을 것이고, 종교적으로도 뭐 하나 빠짐없이 열심히 해왔을 것입니다. 또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격적인 사람으로 알려졌을 것입니다. 윤리적 행위에 있어 군더더기 없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를 향해 세상에서의 열심으로,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과 실패를 볼 것이 아니라, 영생의 관점에서 성공과 실패를 보라는 예수님의 대답에 니고데모는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질문 : 핵심은 거듭남의 가능성]
니고데모가 묻습니다. 4절입니다.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이 질문은 사실 매우 아이러니한 질문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분명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관심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또 장차 오실 메시야를 기다렸고, 또 가르쳤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거듭남”에 대해 질문한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 합니다. 정말 그는 거듭남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일까? 거듭남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인가?
분명 그는 당대 학생들을 가르치는 랍비였고,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었고, 또 당대 유대인들이 환생을 믿지 않았던 터라, 분명 어머니 뱃속에 들어가 다시 나온다는 말이 진정 거듭남의 의미가 아님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 니고데모의 질문은 “주님! 거듭남이 뭡니까?” 라고 묻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메시야임을 확인하고자 밤 중을 택하여 나아온 니고데모는 그저 단순히 거듭남에 대한 의미를 묻고자 질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거듭남에 대한 질문을 함은 의미가 아닌 “가능성”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보다 나이도 많고 꽤나 긴 시간 메시야를 기다려왔던 자 입니다. 그리고 지금껏 자신들이 정의내려온 개념들이 고착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있어 예수님의 대답은 상당히 파격적이었고, 그에게는 혼란이었을 것입니다.
“아니, 선생님! 저는 지금껏 우리를 로마로부터 구원하여 자유와 해방을 선사하실 메시야를 기다려 왔는데, 우리가 아니라 저 로마놈들을 포함해 온 인류의 구원이라니요? 이게 뭡니까 선생님? 지금까지 제가 믿고 또 가르쳐온 사실들이 틀린겁니까? 제가 틀렸습니까? 말씀 좀 해보세요. 선생님!”
지금까지의 니고데모가 쌓아온 경륜과 지혜에 도저히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을 하신 예수님을 향해 물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경륜과 지혜가, 지금까지의 경험과 나름의 노련이 그의 발목을 잡게 된 것이지요.
평소 니고데모는 사회적으로 워낙 높은 위치에 있다보니, 스스로가 민족적 우월감을 느낀채 살아가고 종교적 행위에 최선을 다했고, 윤리적 행위에 있어 결코 흠 없이 행동하려 노력했고 자기의 의를 드러내며 그 의를 통해 존경받고자 힘썼으며, 그것이 복이라 생각하며 지내왔는데,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너희들만의 구원을 위해 내가 온게 아니야. 내가 온 것은 온 인류의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 온거야.” 라며 니고데모가 쌓아온 모든 것들을 무너뜨리고 있지 않습니까?
17절이 이를 뒷받침 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심판이고 저주고 멸망이 아닙니다. 그저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 땅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윤리적 행위는 구원의 키가 아니다]
예수님께 거듭남에 있어 가능성을 물어본 니고데모를 향해, 예수님께서 5절과 같이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과 성령이 무엇을 의미하냐에 있어서는 학자들마다 소견이 다르나 어찌되었든 확실히 알 수 있음은 윤리적 행위가 하나님 나라를 입장케 하는 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입장의 키는 믿음]
그렇다면, 도대체 종교적 행위, 윤리적 행위가 구원의 키가 아니라면, 하나님 나라의 입장권이 아니라면 무엇이 하나님 나라의 키며, 그들이 놓치고 있는 진리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15절입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지금까지 니고데모를 비롯한 유대인들에게 구원은 윤리적 행위가 키였습니다. 하지만, 진짜 영생으로써의 키는 무엇입니까? 우리도 너무나 잘 아는 사실아닙니까? 그저 믿음이 우리를 구원케 하지 않습니까?
사역을 잠깐 쉴 때가 있었습니다. 그저 행복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신앙의 침체기를 걷고 있는 제 모습을 보며 “이거 큰일났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는 모든 분들과 또 부장으로 총무로 회계로 섬기는 모든 성도님들이 참으로 귀하다 생각합니다. 이 자리를 빌려 약간의 자랑을 하자면, 저희 청소년부 교사들이 제 부족함을 빠르게 캐치하여 적재적소에 도움의 손길이 내밀어 채워줌이 참으로 감사합니다. 멋진 교사들이 모여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교사뿐 아니라 주차팀과 안내팀, 미디어팀과 찬양팀과 그 외에 교회를 돕는 모든 손길들이 참으로 귀합니다. 성도님들의 열심을 볼 때, 저 또한 힘이 나고 더 열심히 하려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 채워져야 할 많은 섬김의 자리에 고민하고 계신 성도님들이 함께 하신다면 그 또한 감사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명심하십시오. 사역한다고, 교회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한다해서 구원받지 않습니다. 구원이 윤리적 행위나 종교적 열심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핵심 키는 그저 믿음에 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니고데모는 이 사실을 놓쳤습니다. 자신의 위치에 맞게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윤리적으로 성실히 또 열심히 일 했지만, 니고데모는 진정 진리를 완벽하게 놓쳤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참 적절한 말씀이라 생각이 듭니다. 예배를 드리며 마음이 동하여 사역의 자리로, 섬김의 자리로 나아갈 때, 처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자 고백했지만, 어느샌가 하나님은 없고 내가 세워진 주객전도의 현장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 모습이 마치 니고데모 같지 않습니까?
이처럼 오락가락하는, 혼돈 속에 있는 니고데모를, 또 오늘날 우리를 향해 하나님 나라로써의 키가 무엇인지 돌려 말하지도 않으시고 직설적으로 말씀해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또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16절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실 이 말씀을 보며, “아니 하나님,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으면 독생자 말고 차라리 한 100억 정도 제 계좌로 넣어주셨음 더 좋지 않았을까요?” 라는 생각을 하곤 했지만, 결과적으로 독생자를 주심은 그 100억의 가치보다 훨씬 큰 가치가 독생자에게 있음 아니겠습니까? 그 가치의 결과가 무엇이기에 독생자를 허락하신 것입니까? 그 결과가 바로 영생, 하나님의 나라 아닙니까? 그저 믿음으로 갈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 아니겠습니까?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니고데모는 그 누구보다 윤리적으로, 종교적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습니다. 흠없이 실수 없이 부족함없이 말입니다. 우리도 그 누구보다 교회 사역에 있어 최선을 다해 살아왔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도,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것도, 입을 열어 찬양하는 것도 무엇하나 빠짐없이 최선을 다해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그 열심과 열정 안에 진리를 놓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바라옵기로는 사역 좋습니다. 예배와 기도의 자리를 지키고, 서로를 축하하고 위로하는 것 모두 좋습니다. 교회에 도움이 필요한 곳에 선뜻 나서는 것도 좋습니다. 그럴 때 결코 진리를 놓치지 않는 성도님들 되시길 소망합니다. 믿음 외에는 구원이 없음에도, 우리는 믿음보다 윤리적 행위에 초점을 둘 때가, 주객전도가 될 때가 있으나 그럴 때 우리는 바로 잡아 다시금 돌이킬 수 있어야 합니다.
니고데모는 나중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더이상 윤리적 행위에 목매는 것이 아니라 뒤바뀐 삶을 살아냅니다. 종교적 신념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진리를 위해 살아냅니다. 바라옵기로는 이러한 모습이 우리에게도 임하길 소망합니다.
다른 복음서에 없는, 오직 요한복음에만 등장하는 이 본문을 통해 요한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그 메세지는 “자신의 행위에 의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종교적 신념과 자만심이 진짜 진리를 놓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자리에 모여 예배의 자리를 사수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만 온전히 믿고 먼저 그분을 우리의 마음에 모시어” 진리라는 터 위에 우리의 열심이 채워져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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